키보드 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3
한윤형 지음 / 텍스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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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추억할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멋진 일은 아닐지 몰라도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크게는 한 시대의 이름이건, 아니면 작게는 한 인생의 이름이건. 아니 보다 작게는 1년이 되었든 2달이 되었든 간에 어떤 때를 추억할 이름을 가진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그 이름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추억하고 또 거기에 기대어(물론 그 기댐이 지나치면 우울증에 빠지지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자랑스런 것이든 아니면 머리가 굵고 나서 돌아보니 참 부끄러웠던 것이든 간에 일련의 이름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어떻게든 살아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 그런 자신의 이름들을 다른 이들의 이름과 견주어 보면서 조심스레 한 발 한 발 걸어 나간다.

 오늘날, 그러니까 2009년의 20대 중 '대학생'들이 처한 곤란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 자신을 부를 이름이 없다는 것, 즉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군대는 카투사로 가고 싶어하고 취업은 외국계 기업에 하고 싶은 데다가 얼핏 민족주의 비판을 주워 듣기도 한 대학생들에게 '민족'이란 아버지의 이름일 수는 있지만 자신의 이름은 아니다. 학원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고 20대에 들어서는 지방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한국에서 '대학'이란 말은 개념적으로 지방대 혹은 비명문대는 포함하지 않는다)에서 젊은날을 보내게 되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가족' 역시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의 이름은 될 수 있겠으나 '나' 자신의 이름은 아니다. 소위 명문대의 대학생들의 사정은 그럼 좀 낫지 않을까? 현재 고려대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나는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하고 싶다. 해병대 전우회, 호남 향우회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마피아로 불리우기도 하는 대학이 바로 고대이지만, 적어도 지금 캠퍼스에 구성원들에게 드넓은 자부심과 상징적 정체성을 제공해 주던 의미에서의 '고대'는 없다. 끈끈한 선후배간의 연대를 강조하는 '보수적' 고대이든 4.18 민주화 운동의 기수로서의 '진보적' 고대이든 간에 사태는 마찬가지다. 오늘날 고대생들은 그 이름이 들어 있던 '무게'를 비웃고 냉소하며 스펙 위의 한 줄로 이용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들'과 '그녀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해온 '대학생'이라는 이름은 어떨까? 이 이름은 통계 위의 한 범주는 될 수 있으나, 개인들의 정체성을 담보해 주는 이름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역설적이게도 스스로를 대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윤형이 잘 지적하듯이 16년 이상의 제도교육을 받고 자란 오늘날의 대학생들은 부모와 사회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도 잘 안다. 그들과 그녀들은 자신을 '대학생'으로 만들기 위해 들어간 정성을 하나의 '비용'으로 생각할 줄 아는 똑똑한 젊은이들이다. 오늘날의 실용주의적인 대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곳이 별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스펙 위에 들어갈 하나의 '자격증'을 얻는 곳이라는 '사회적 진실'을 너무나도 잘 안다. 물론 이런 사실이 그들이 낭만적인 '대학시절'을 즐기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맞이하게 될 현실이 거친 것을 너무 잘 알기에 대학생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이 시절을 즐기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젊음, 해방, 자유 등을 의미했던 '대학 시절'은 입시와 취업 사이에 놓인 '자투리' 시간으로 전락한다. 어떤 대학생도 자신을 대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생 역시 편의상 사용하고는 있다만 그들과 그녀들에게 하나의 정체성을 제공해 주는 이름은 아닌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88만원 세대 역시 남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일 수는 있겠지만, 자신이 자신임을 확인케 해주는 이름은 아니다. '유행'이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 이 개념에 대해 대학생들은 묘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이름을 얻지 못한 '그들' 중의 한 명으로서 나는 한윤형이 솔직히 부러웠다. 이 책에서 제시된 한윤형의 9년은 단순히 자서전적 회고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윤형의 9년은 아직은 너무 가까워서 그런지 잘 주목되지 못했던 한국 진보 정당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으며,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에서부터 다음 네이버 등 포탈까지 한국 전자통신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시작된지는 얼마 안 됐지만 나름 '개울' 정도의 모습은 갖춘 한국사의 몇몇 물줄기들에 그는 '키워질'을 통해 자신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해서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고 부모에 수험공부를 하러간다고 말하고 PC방을 가기를 즐겼던 한 소년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스스로가 말하듯이 "조울증이 있고, 주변사람에게 종종 신경질을 부렸으며, 술자리에선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아 골려먹는 걸 좋아한" 철없고 자기중심적인 시절이었는가 보다만 적어도 그는 그 시절을 통해 자신의 '바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직활동을 하며 '대학생이 아닌 20대(30쪽, 대학을 다니는 이들은 흔히 잊는 사실이다)'를 볼 수 있었으며, 대학사회가 완전히 취업시장으로 재편되기 이전 마지막 학생운동 세대와 놀 수 있었으며(44쪽),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을 통해 386세대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분노할 수 있었다(136쪽). 나아가 그는 여기서 '한국전쟁'을 자신의 출발로 기억하는 '보수적'인 노년층과 '광주민주화 항쟁'을 안고 사는 '진보적'인 장년층을 발견한다(138쪽). 사실 '안'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그와 구별되는 '바깥'이 어딘지도 알 수 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바깥'의 발견은 '안', 즉 스스로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과정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적으로 일어난다. 윗 세대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의 기원, 정확히는 "2004년 6월(135쪽)"을 현재 자신의 시작점으로 삼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여기서 그는 '한국사(역사학보다는 경제학에 관심이 많은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는 참 와닿지 않는 말 중 하나다)'라는 크고도 거센 물줄기 속에서 자신의 뿌리와 "이름"을 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한윤형은 이런 자신의 '행운'에 대해 명확히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26세도 학부생인 내 처지는 "88만원 세대인 주제에 대학생활을 386세대처럼 한 어떤 한심한 문화지체자의 그것"이겠지만, 선후배 관계라는 문제로만 본다면 나는 이들에 비해 훨씬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21세기 초반, 인터넷 운동의 여명기에 '선배' 지식인이나 활동가들과 함께 놀 수 있는 '물'에 합류할 수 있는 기회가 19살이었던 내게 아주 잠깐 열렸고, 아마도 그 이후 그 문은 닫혀 버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막내였던 것이고, 내가 술값까지 뜯어내는 그들을 지금의 20대들은 텍스트로밖에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168-9쪽)." 

 그리고 그는 또 누군가를 발견한다. 자신과 달리 그런 행운을 얻을 수 없었던 '후배'들, 보다 넓게는 자신의 목소리를 갖지 못한 20대를 그는 발견한다. 그가 말하듯이 "우리 20대들은 각자의 헛소리"를 지껄이지만 "우리들도 서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170쪽)." 20대의 목소리란 없다. 우리는 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20대란 생물학적으로는 존재할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인 것이다. 물론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20대'라는 화두를 한국 사회에 던져 놓는 데는 성공했으나 오늘날 20대가 처한 곤궁을 온전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목소리를, 입을, 이름을 가지고 있지 못한 20대는 역설적이게도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매우 익숙하다. 수험생들은 입시경쟁의 필요성에 대해 이해하고, 취업준비생들은 기업이 비정규직을 확충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이해한다. '자기'가 누군지 모르다 보니 남의 이익이 마치 자신의 이익인 것처럼 착각한다. 요즘 들어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인지 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지 헷갈린다. 삶은 항상 내 쪽이 아니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저기 건너편 어딘가 즈음에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렇게 우리는 삶을 1년 그리고 2년 조금씩 유예해 나간다. '스펙'이란 말은 그래서 천박하기보다는 슬프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만 있는 것이다.

 한윤형의 처녀작인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말을 건네려는 시도에 다름아니다. 허나 이 말건넴은 거만한 스승이나 부유한 복지가의 기름낀 자비로움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운이 좋았지만 자신 역시 이 이름없는 세대의 일원임을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고 자신이 너희를 대신해 입이 대신 되어주겠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이제는 무언가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고 싶다(184쪽)." 

 어찌 보면 '후배' 중 한사람으로서, 그리고 같은 이름없는 세대의 일원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이 말에 충실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어떻게든 이름을 찾을 수 있었던 행운을 얻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가 우리 세대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으리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그의 또다른 싸움의 시작을 목격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또한 그의 편지를 받은 이로서, 나도 우리도 무언가를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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