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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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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의 책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최근의 정치철학들이 보여주는 지적인 탁월성보다는 살에 와닿는 싱싱한 사례들이 제시되는 더 큰 매력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핸드폰'에 대한 단상이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휴대전화의 전화번호부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고, 잃어버린 친밀성을 대신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며, 일련의 기대 ─ 온전히 지탱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것을 품을 힘도 없는 ─ 를 채워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 '이러한 가상의 공동체들은 흥미로워 보일지는 모르지만 친밀성에 대한 환상과 공동체의 가면을 만들어낼 뿐이다(C.Handy 인용)' (…) 사실 우리는 점점 더 대면 접촉을 꺼린다. 우리는 '운명의 인질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주변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진짜 사람들'과의 복잡하고 어지럽고 예측불가능한 ─ 끼어들거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 상호 작용에서 도망치기 위해 휴대전화에 손을 뻗어 격렬하게 버튼을 눌러대며 메시지를 빚어낸다. 3분 데이트와 휴대전화 메시지로 이루어진 허깨비 공동체가 방대할수록(설사 더 얄팍하더라도) 진짜 공동체를 엮어서 유지하는 작업이 더 힘겹게 느껴진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정일준 옮김, 237-8쪽.

여기서 나는 과거에 싸이월드 프로필에 올렸던, 아직 종결되었다고 보긴 어려운, 또한 종결될 전망 역시 없어보이는 딜레마 하나를 떠올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내 외로움의 딜레마
1. 하고 싶은 말이 많다.
2. 말을 할 사람을 찾아 본다.
3. 그러나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별로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4. 사람을 찾을 때부터 '말할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에 대화는 결국 성립되지 않는다. '아무한테나' 말을 하지 않는 게 문제인 거다.
5. 그래서 외로워진다. 그래서 신 또는 싸이월드에 대고 말을 한다. My Jesus Cyworld

 학부제로 운영되는 대학에서 난 '과반'이라는 공간에서 공동체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과반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 과반을 공동체로 여기는 사람들은 줄어가고 있다. 그 많던 대학생들은 죄다 어디로 갔을까. 토익/플 학원? 인턴? 알바? 과외? 그 쪽으로 가는 이들도 있겠으나, 아마도 나처럼 방구석에서 궁상떨며 핸드폰 전화번호부나 만지작거리는 이들도 꽤 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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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2009-05-31 22:02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헉..너무 재밌고 공감가는 딜레마네요. '과반'에 관해서도요. 덧붙여 나는 내게 말 거는 사람을 '말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내가 '말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은 나를 '말할 만한' 대상으로 여기지 않을 것 같고 그러네요. ㅠㅠ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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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책의 논지와 직접적인 상관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인용문의 경우,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아직 완독하지 못한 독자들은 참고하시길). 다음의 글은 그저 한 독자가 책과 '대화'를 시도해보려 하나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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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타자'라는 말이 인문학이나 비평계에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것은 '비교-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한 인정과 '평가에 있어서의 상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타자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식은 왜곡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 왜곡에 대해 항시 자각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242쪽, 강조는 인용자.

 타자에 대한 순수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애당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고진의 칸트 도덕법칙 독해는 이 맥락에서 이해되야 한다.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방법이 '수단'으로 대하는 방법과 뚜렷이 구분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목적'과 '수단'의 이분법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칸트의 잘못은 적절하게 '주체화되는' 한에서만, 즉 순수 의지('정념적' 동기들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로 성취되는 한에서만 행위가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행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동기로서의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촉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즉, 내 동료의 평가에서 쾌락을 발견하기 위해 도덕적 행위를 수행했다는 의혹이 언제나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는 사실상 결코 발생하지 않으며(지구상에는 어떠한 성자도 없다) 오로지 영혼 정화의 무한한 점근선적 접근의 최종점으로서 정립될 수 있을 뿐인 어떤 것이 된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611쪽.

 '나'는 '타자'를 '왜곡'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타자의 실체 따윈 없기에 '왜곡'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될 수 없다. 라캉의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언급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나에게 결여된 것, 때문에 내가 욕망하는 그 무언가(대상a)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나는 그/녀에게 이상적 자아를 투영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자아-이상의 관점에서 정립한다('라캉과 사랑'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책임질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접는다).
 고진과 라캉, 그리고 조영일과 지젝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타자와의 근본적인 비대칭성이라는 문제다. 이는 단순히 '순수한 타자의 인정'으로서 평화롭게 해소될 수 없는 균열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당연한 질문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수단'으로서 착취하지 않고, 타자를 순수한 '목적'으로 대한다는 기만을 피하고서,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꽤나 어려운 질문이다. 라캉이 사랑에 대한 또다른 정의─"단지 사랑-승화만이 향유가 욕망으로 강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세미나『불안』)"─를 제시하고 했을 때 해결하고자 했던 것도 이 문제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운명적인 균열을 안고, 타자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뚜렷히 답할 수는 없으나 조영일이 황석영을 비판하며 논한 다음과 같은 지적들이 어떤 '실마리' 정도는 제공해 주지 않을까.

"입담은 객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 반해, 비평은 주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탈─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바꿔 말해, 입담은 자신과 타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그래야만 한 세계의 완결성을 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은 언제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볼 떄, 우리가 타인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입담에서는 '거대한 차이'가 중요한 반면, 비평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 무당의 입담은 우리를 치유(풀이)할지 모르지만, 소설의 정신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비평가의 비판은 그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건강함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2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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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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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해당 책에 대해서가 아니라 주로 우석훈이라는 인물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우석훈은 아카데믹한 측면에 있어서는 구라꾼 기질이 농후한 저자다. 역사적 팩트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할 때도 있고, 상이한 철학자들의 아이디어를 폭력적으로 접합하고, 배보다 더 큰 빼꼽 식의 문화 해석을 시도하며, 각종 새로운 학문분과를 창조하는 모습을 보면 나르시시즘에 도취해 있는 (그러나 또한 야심차기도 한) 학부생의 레폿을 보는 듯 하다. 강유원은 우석훈의 글을 보고 "마치 도사의 글과 같다"라고 평했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대중적인 사회비판서적을 추천할 때, 항상 아니 언제나 그를 찾게만 된다. 판타지 소설 느낌도 나지만 국제/국내의 현실문제에 생생한 증언, 쉽게도 너무도 쉽게만 읽히는 (그래서 싸보이기까지 하는) 문체, 오버하는 것 같지만 문제의 시야를 넓혀주는 '통찰력(학자들은 우석훈에게 이 단어를 붙이길 거부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대중 사회과학 서적의 그 어떤 저자들도 가지고 있지 못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Originality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 그를 평하자면 훌륭한 구라꾼이랄까. 그의 저작들은 항상 약간의 과대망상을 담고 있지만, 아카데미즘의 체통, 기만적인 엄숙함과 포퓰리즘의 식상함을 요리조리 잘 피해간다. 그런 식으로 미국과 유럽권이 아닌 한국의 현실을 바탕으로 '음식'문제를 다룬 『도마 위에 오른 밥상』이 나왔고, 유행을 제대로 타 모 보수 정당의 공모전 슬로건으로도 쓰인 『88만원 세대』이 출간되었다. 그 특유의 해몽 능력으로 1, 2차 세계대전과 동북아의 미래를 엮어낸 『촌놈들의 제국주의』도 출간되었다. 그리고 대안 경제시리즈의 마지막인 그의 신간이 이렇게 출간되었다.

 끈기있는 학계의 연구가 아닌 '재담'에 의해 비판적인 의식이 사회에 함양되고 있지 않나 싶어 슬픈 심정도 든다만 누구를 탓하겠나. 아카데미는 잘난 척은 할 대로 하면서 구태의연한 소재로 자위하고 있는 것을. 그가 어느 선까지 한국 사회에 통찰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메마른 사회과학 출판계의 보배같은 존재다. 모 강의에서 그는 대안경제시리즈 이외에도 4~5가량의 유사한 시리즈를 출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구라도 이만하면 그냥 구라가 아니다. 아직 그의 의미를 평가하긴 이르지만, 때가 됐을 때 그를 '위대한 구라꾼'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한 번 기대해 보며 보관함에 책을 담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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