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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본 리뷰는 책의 논지와 직접적인 상관은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인용문의 경우,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독자들의 즐거움을 앗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아직 완독하지 못한 독자들은 참고하시길). 다음의 글은 그저 한 독자가 책과 '대화'를 시도해보려 하나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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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타자'라는 말이 인문학이나 비평계에 유행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것은 '비교-불가능한 어떤 것'에 대한 인정과 '평가에 있어서의 상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되곤 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타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타자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인식은 왜곡과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함과 동시에, 그 왜곡에 대해 항시 자각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242쪽, 강조는 인용자.
타자에 대한 순수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애당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고진의 칸트 도덕법칙 독해는 이 맥락에서 이해되야 한다.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는 방법이 '수단'으로 대하는 방법과 뚜렷이 구분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목적'과 '수단'의 이분법에 사로잡힐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칸트의 잘못은 적절하게 '주체화되는' 한에서만, 즉 순수 의지('정념적' 동기들로부터 자유로운 의지)로 성취되는 한에서만 행위가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행한 것이 사실상 유일한 동기로서의 도덕 법칙에 의해서만 촉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결코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즉, 내 동료의 평가에서 쾌락을 발견하기 위해 도덕적 행위를 수행했다는 의혹이 언제나 잠복하고 있기 때문에) 도덕적 행위는 사실상 결코 발생하지 않으며(지구상에는 어떠한 성자도 없다) 오로지 영혼 정화의 무한한 점근선적 접근의 최종점으로서 정립될 수 있을 뿐인 어떤 것이 된다."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611쪽.
'나'는 '타자'를 '왜곡'하지 않을 수 없다., 순수한 타자의 실체 따윈 없기에 '왜곡'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될 수 없다. 라캉의 "사랑이란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타자에게 주는 것이다"라는 언급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나에게 결여된 것, 때문에 내가 욕망하는 그 무언가(대상a)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간주된다. 나는 그/녀에게 이상적 자아를 투영하고 그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자아-이상의 관점에서 정립한다('라캉과 사랑'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책임질 수가 없으니 이쯤에서 접는다).
고진과 라캉, 그리고 조영일과 지젝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타자와의 근본적인 비대칭성이라는 문제다. 이는 단순히 '순수한 타자의 인정'으로서 평화롭게 해소될 수 없는 균열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당연한 질문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타자를 '수단'으로서 착취하지 않고, 타자를 순수한 '목적'으로 대한다는 기만을 피하고서,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한다는 것은 대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꽤나 어려운 질문이다. 라캉이 사랑에 대한 또다른 정의─"단지 사랑-승화만이 향유가 욕망으로 강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세미나『불안』)"─를 제시하고 했을 때 해결하고자 했던 것도 이 문제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운명적인 균열을 안고, 타자와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뚜렷히 답할 수는 없으나 조영일이 황석영을 비판하며 논한 다음과 같은 지적들이 어떤 '실마리' 정도는 제공해 주지 않을까.
"입담은 객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 반해, 비평은 주관성을 강조하지만 실은 탈─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바꿔 말해, 입담은 자신과 타인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왜냐하면 그래야만 한 세계의 완결성을 구성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평은 언제나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입장에서 볼 떄, 우리가 타인을 통해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입담에서는 '거대한 차이'가 중요한 반면, 비평에서는 아주 '작은 차이'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 무당의 입담은 우리를 치유(풀이)할지 모르지만, 소설의 정신은 그것이 불가능함을 끊임없이 보여주며, 비평가의 비판은 그 치유되지 않는 고통을 통해 우리의 건강함을 확인시켜줄 것이다." -조영일, 『가라타니 고진과 한국문학』, 25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