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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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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번역이 필요한 책이다. 버틀러 자신은 요즘 나오는 이론서들에 비하면 명쾌하지만 일관되지 않은 번역어, 이론적 함의를 살리지 못한 형용사 번역과 복수 표기 생략, 그냥 번역 누락 등으로 일관된 이해가 어려워진다. 굳이 보시려면 영어 원문과 꼭 함께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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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효과 - 통치성에 관한 연구
콜린 고든 외 지음, 이승철 외 옮김 / 난장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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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人口)로만 통치성 연구의 원조가 드디어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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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시대의 정의 -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프리즘 총서 5
낸시 프레이저 지음, 김원식 옮김 / 그린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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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프레이저, 『지구화 시대의 정의: 정치적 공간에 대한 새로운 상상』, 김원식 옮김, 김재훈 편집, 그린비, 2010.

1. 문체의 미덕: 낸시 프레이저의 이 책은 그야말로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교과서라고 부를 만한 책이지 않나 싶다. 특히 어떤 면에서 그러하느냐면 서술이 놀라우리만치 명확간결명료하며 건축적이다.
  명확간결명료하다는 것은 저자가 특정한 주제를 묘사하는 데 사태를 과장하기 위한 문학적 장식을 달지 않고, 모국어 이용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장난 애드립을 치지 않으며, 특정한 이론의 추종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어휘를 쓰지 않고, 교과서 류의 전공서적에 주로 쓰이는 중립적이고 일반적인 어휘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일반화를 하면서도 본래 이론적 배경이 되는 사상들의 힘을 거의 축소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해당 사상들의 호환가능성을 윈도우급으로 격상시킨다는 데에서 그 힘을 적어도 현행적인 차원에서는 증진시킨다. 그러니까 거칠게 소화해보자면 원래 잠재된 힘이 100인데 쓸 수 있는 것은 10밖에 안 되었다면, 여기서는 잠재된 힘을 80으로 축소하는 대신 적어도 70은 사용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잠재되어 있는 힘이 100인지는 10밖에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20이라는 가상적 잠재력에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사용할 수 있는 힘 60의 증가에 기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렇다고 책이 절대로 딱딱하거나 하지 않은 것은 놀라울 정도로 건축적인 구성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문제가 3개 있고 각 문제당 실제 사례당 3개가 배정되어 있다. 그리고 대안도 따라서 3개이며 이런 문제분석과 대안제시를 위해 참조되는 이론적 전통은 2종류로 나뉘어 3가지 방향에 조명된다 등등...뭔 소리나 싶을 수 있겠는데 책이 정말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따로 노트나 여백에 논의의 구조를 힘겹게 적을 필요가 없다. 거기에다가 이런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 내용들은 마지막에 가서는 한 문단 정도에 따로 요약되며 길어야 2~3문장으로 축약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적/실천적 요청으로 정리된다. 사유의 소재를 공급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이를 즉각 활용하거나 독자의 맥락에 접합가능한 형태로 가공해서 내어놓는 것이 아주 기가 막히다.
  이런 명확간결명료성과 건축성이 결합되어 독서는 교과서류 전공서적의 지겨움과는 달리 매우 술술 읽힌다. 오히려 역으로 교과서가 지루한 건 충분히 교과서답지 못했기 때문이구나 하는 반성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독자는 책장을 넘겨가며 복잡해 보이는 경제주의, 문화주의, 정치주의, 하버마스, 푸코, 아렌트 등의 비판적 현대사회이론의 사조와 이름들의 관계를 파악하고 이들이 현재의 역사적 조건과 현실의 투쟁들과 맞물려 어떤 이론적/실천적 과제를 제시하고 있는지에 대한 좋은 정리 중의 하나를 파악하게 된다. 물론 이건 낸시의 관점일 뿐만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본 메모에서는 낸시에 대한 비판적 접근은 일단 생략하기로 한다. 모든 교과서들이 흠이 있지만 적어도 그것들은 좋은 출발의 계기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불린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 바로 밑 수준 정도의 명료함을 가진 문체는 가지고 반박에 임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아니면 이렇게 서술이 명료해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기술하던가. 구슬이 서말이에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다. 우리는 이 '꿰는 행위'를 부차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내 주장일 뿐이지만 호환성은 진리의 우회불가능한 계기 중 하나이다.


2. 사회과학이라는 쟁점: 3장에 등장하는 '사회과학'에 대한 언급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낸시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사회현실을 가장 핵심적인 불평등 원인으로 강조하는 이들이 그 무시무시한 전망과는 달리 모종의 순진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한 사실들이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묵시적인 사회이론적 가정들과 역사적 해석들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각은 자신들이 요청하고 있는 '사실'이 논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한다. 이러한 상황의 결과는 사회과학자들이 이미 그런 어려운 질문들을 해결해 둔 것으로 추정되는 무대 뒤의 '다른 어떤 곳'을 상정하는 것이다."(70쪽)

  낸시는 이렇게 되면 '무엇이 정의(내용)고 누구의 정의(당사자)인지'에 대해서 결국 (아마도 주류) 사회과학자들이 결정권을 쥐게 된다면서 정의의 내용과 당사자를 결정하는 과정이 지식을 가진 소수가 참여하는 '과학적' 방식이 아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에 의해서 수행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가끔 사회과학이 너무 부정적인 의미로 쓰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사회과학의 '폐기'를 말하기보다는 사회과학의 '활용'정도로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낸시 자신이 사회과학,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전문적 지식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할지 확신에 찬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앞서 말한 정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과학에의 종속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관련된 모든 당사자 원칙'이 '종속된 모든 사람들의 원칙'으로 전화되어야 함을 말하는데 결국 "협치(governance) 구조에 대한 포괄적 이해"(118쪽)라는 것도 사회과학자들의 역할이 클 수 밖에 없지 않겠나?
  만약 낸시가 이 쟁점을 충분히 다루길 원했다면 '지식의 민주화'라는 별도의 쟁점을 다뤄야만 하지 않았을까. 엘리트들에 의해 형성된 지식의 분배에 측면에 있어서나, 지식 자체를 사회적으로 형성하는 생산의 측면에 있어서나 말이다.


3. 규범과 현실 사이에 다리놓기를 고민하기로서의 '공론장'에 대한 비판적 개조: 어쩌면 낸시가 위에서 말한 지식의 민주화, 다른 말로 하자면 일반 공중(public)의 '말'이 모이고 현실을 주조한다는 의미에서의 '정의에의 민주적 참여' 측면을 다루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5장에서 시도하는 것일런지도 모르겠다. 낸시는 공론장에 사람들이 충분히 진입했느냐는 의미에서의 '정당성'과 그렇게 형성된 공론장이 과연 자신의 기획에 따라 현실을 바꿀 힘으로 전환될 수 있느냐는 의미에서의 '유효성' 차원 둘로 나눠 질문을 던진다. 지구화 시대에 이 둘은 모두 위기에 처했는데 정당성은 국민 이외의 사람들이 공중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효성은 초국적 사태들에 과거나 현재의 국가 기구만큼의 힘을 가지고 개입할 제도적 장치들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개인적으로는 하버마스의 논의를 그 자체로서나 그 잠재력에 있어서나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생각들이 많이 들었던 절이었다.


4. 자신의 과거에 대한 현실적 평가: 여성주의, 특히 제2물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하고 있는 6장은 핵심 논점 자체도 좋겠지만 뭔가 낸시의 자전적 회고를 듣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기도 한다. "재분배에서 인정으로"라는 왕년의 논문 부제에 연상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는 이런 이행이 긍정적이었다기보다는 결국 탈베스트팔렌화와 신자유주의라는 역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인정'이라는 기획이 마땅히 지향해야 했을 평등주의적 성격을 스스로 박탈했다고 자평한다. 한국 사회의 90년대 이후 소수 지식인들과 출판시장의 조금 특이한 상품으로만 유통되었던 문화주의적 정치를 여기에 비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의 경우 더 슬픈 것은 이런 운동들이 현실 자체에 그때나 그 전이나 큰 영향력은 없었기에 실패해봤자 더 낙담할 껀덕지도 없다는 것이 아닐까...라는 섣부른 짐작을 잠깐 해봤다.
  6장 6번째 절 "복음주의: 자아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기술"은 내가 이 장이 낸시의 자전적 회고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고 어림짐작하게 만든 주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그녀는 부시가 당선된 대선과 오바마가 당선된 경선을 예로 들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이 세심한 이론적 차이에 집착하는 도중에 결국 현실정치와의 접점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뼈아프게 지적한다("미국의 여성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본질주의에 관해서 논쟁하는 동안에 자유시장과 기독교 근본주의 사이의 사악한 동맹이 조국을 장악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185쪽)). 복음주의에 대한 숱한 비판들이 그러는 것과 달리 낸시는 여기서 하층여성들의 ('계급배반적'이라는 수사를 패러디하면) '젠더배반적' 자기의식을 내재적으로 이해하려 하는데 나는 여기서 그녀가 그녀 자신 역시 '미국의 여성주의자'로서 자신의 책임을 찾으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계속 받게 되는 것이 이 책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 절 자체가 생뚱맞다. 배경과 주장을 한데 뭉쳐서 한 절로 몰아놓는 다른 장들과 달리 이 장의 이 절과 바로 앞 절은 앞으로 하려는 주장의 배경으로서의 정치적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자리가 배치되어 있다. 과민한 독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기서 낸시의 자신의 정신적 유산 중의 가장 큰 부분 중의 하나를 다룬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5. 선배 사상가들에 대한 평가: 도 역시 매우 깔끔하다. 각 사상가를 거부하지도 무작정 계승하지도 않고, 그런 비판적 계승을 각 사상가가 제시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를 취하는 방식으로 전개하는데(자세한 건 직접 읽어보시길) 놀랍게도 푸코와 아렌트 둘 모두에게 이렇게 동일한 논리적 구조의 틀을 적용하여 그렇게 한다. 말 그대로 똑같다. 이런 것을 보고 있자면 결국 이론의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반성의 기회를 얻기도 한다. 말로 혁명을 일으키거나 대체하려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담담히 기계적으로 성실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지평을 열어주기. 그리고 이것의 성격의 제한성을 분명히 말하고, 그럼으로써 목적성과 유효성을 분명하게 하기.


   문체의 문제, 이론의 역할(분석이냐 규범이냐), 이론과 현실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저런 산만한 고민을 하던 차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적지 않을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좋은 예감을 얻었다. 이 예감을 잘 간직해 놓기 위해서 완결되지 않은 형태고 누구에게 충분히 읽힐만한 형태의 글은 아니지만 감상을 짤막하게 정리해 공개적 공간에 올려놓아 본다. 좋은 책을 추천해주신 구멍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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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발견 -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
박상훈 지음 / 폴리테이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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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정치의 발견』, 폴리테이아, 2011.

1.
  '최장집'은 한국 사회의 무수한 정치 관련 담론 생산자들 중에서 오롯이 제 위치를 가지는 이름이다. 우선 체계적이고 내적인 정합성을 가진 이론틀을 가지고 있고 이를 사람들에게 저술의 형태로 내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자신의 의견을 총체적인 형태로 가지고 있든 아니든 그러한 형태로 잘 제시하지 않는 정치인과 기자와 구분되는 '정치 이론가'이다.{(아마 이 포스트의 주된 독자일)'이론의 독자'로서 정치인이나 기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개념적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하는 것은 무례할 뿐만 아니라 둔감한 행동이다. 정치인과 기자에게는 '사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사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언어와 그의 구성이 다를 뿐이다. 이 비이론적인 이론의 존재 방식이나 의미는 매우 재미있고 또 지금 서술에서도 부연되어야 할 필요가 분명히 있는 것이지만 본 포스트의 목적과 논자의 모자람으로 인해 뒤로 미루기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론을 개념적으로 연마하거나 다른 국산/외산 이론과 비교하는 일보다는, 이론을 자신의 문제의식이 촉발되었고 함께 정치적 운명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장소, '현대 한국사회'에 대한 분석에 적용하거나 기초하거나 반성하는 방식으로 전개했다는 점에서 그는 다른 이론 종사자들과 구분되는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 그리고 그 '한국 정치 이론가'들 중에서도 아카데미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 지속적으로 후학을 배출할 여건을 갖춰 이른바 '학풍'까지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한 한국 정치 이론가'이다.{이론의 유효성 역시 성공의 요인 중 하나겠지만 최장집이 정교수가 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제자들을 길러내고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론(가)의 사회적 생명은 이론과 무관한 이유 때문에 지속될 수 있으며, 특히 정치적 이유에서든 학술적 이유에서든 이론에 대한 고정적인 수요층이 두텁지 못한 한국같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해당 이론을 폄하하는 논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상훈은 이 학풍을 대표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우선 최장집 교수가 있는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 논문(「한국 지역 정당 체제의 합리적 기초에 관한 연구」, 1999)을 썼으며, 해당 학풍에서 중요시하는 이론가들의 번역서와 최장집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한국 학자들의 저서를 출간하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대표이다. 이러한 박상훈은 그야말로 '최장집의 제자'라는 말을 붙이기에 적합한 사람인데 이론적으로 스승이 제기한 문제틀(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론)을 따르고 있다는 '이론'의 측면에서 수동적으로 그러하고, 또한 자신의 주장뿐만 아니라 스승과 동료의 주장을 출판물의 형태로 보존하며 단순이든 확대든 학풍의 재생산을 도모하게 하는 물적 기초를 제공한다는 '활동'의 측면에서는 (스승이 하지 않았던 것을 한다는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그러하다.

  이런 박상훈이 '정치학 강의'를 내었다면 견적은 이미 어느 정도 나온 셈이다. 본서는 박상훈 개인의 독립적인 견해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최장집과 제자들이 현재 정치이론과 한국정치 성찰에 있어서 도달한 잠정적 결론들을 담고 있고, 또 그런 논지들을 알기 쉽게 풀어놓음으로서 이 경향의 이론적 영향력을 보다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저자로서의 박상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보자면 이 책은 박상훈의 '활동'의 연장선에 놓여 있으며, '지역주의'라는 한국 정치에 고유하진 않지만 특징적인 문제를 다룬 『만들어진 현실』(박상훈, 후마니타스, 2009)과 함께 짝을 이루며 마치 그간 박상훈의 학술적 사회적 삶을 중간결산하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해당 학풍의 이기적이고 당파적인 확장 욕심의 산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자기가 믿는 무엇이 있고 적절한 반성을 거쳐 이것이 공적으로도 옳거나 유용하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그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일반을 어떻게 이기심이라는 좁은 말 안에 다 담을 수 있겠는가? 아니면 우리는 이 책의 주된 논지 중 하나가 제안하듯이 '당파적'이나 '이기적'이라는 말의 정의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 물론 '적절한 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각자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 더더욱 비판을 받아 그 반성이 이번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공적인 장에 펼쳐질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갈등과 차이가 제거될 수 없는 '민주주의 사회', 아니 '인간 사회'에서 담론장에서의 당파적인 활동은 그 갈등을 언어의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처한 문제 내지는 최소한 '너와 나'의 입장 차이를 공적으로 드러내고 토론의 대상의 삼음으로써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나는 이런 면에 있어 박상훈이나 후마니타스는 '글'로 세계와 관계하고자 하는 이로서 '당파적 이론 활동의 모범'이라 할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내용도 내용이지만 (자신이 믿기에) 올바른 것을 쓰는 것 말고도 읽히려고도 하는 '활동'의 측면에서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런 '활동'의 측면과 양상은 이론과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실천의 제도성을 중요시하는 이론에서 연유하는 것 같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이러한 책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서 이 책을 '예상 독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정치적 의도', 저자가 '의도했을 법한 정치적 효과'의 측면에서 읽어내 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선입견을 확인하는 것 이외에도 역으로 이를 수정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2절과 3절). 그리고 수정에도 불구하고 저술에 표시할 수밖에 없는 불만들을 짤막하게 제시하는 식으로 서평을 마무리짓고자 한다(4절).


2.
   이 책의 내용은 해당 학풍이 '정치'를 사고함에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들 "정치가", "정치적 실천", "민주주의", "진보파의 맹목적인 정치관"을 해당 학풍이 이 주제들을 고민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술들 (각각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알린스키의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사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 셰리 버만의 『정치가 우선한다』)을 요약하며 다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심플하지만 흥미롭기도 한 구성인데 자신이 믿고 있는 혹은 빚지고 있는 정치학적 조류의 경향을 '전달'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겸손하고 정직한 구성이며, 독자를 추가적인 독서와 구매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친절한 혹은 여러 의미에서 상업적인 구성이다.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의 구성에서도 박상훈의 출판인-활동가적인 면모가 슬며시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내용'의 측면으로 돌아가자면 이 책은 그러니까 이중의 요약인 셈인데 해당 저술들에 대한 요약인 동시에 무엇보다도 최장집과 제자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요약이다. 따라서 오래전부터 이 학풍의 논지를 차근히 따라온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새로울 것도 읽을 이유도 없겠지만, 나와 같이 몇몇 단편적인 기사나 논문, 전해들은 이야기로 이들에 대해서 '대강' 알고 있던 사람이나 아예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거의 들어본 적이 없지만 정치 문제에 약간의 관심은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훌륭한 견학 기회를 제공해주며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샤츠슈나이더)"를 지향하는 이 책의 부제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가 아니라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학 강의"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란 곧바로 '진보'라는 특정한 정치적 당파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게 된다. 그 이유는 보수는 이미 권력을 가지고 있기에 굳이 정치에서 가능성을 찾을 필요가 없으며, 설령 가능성을 찾을 일이 있더라도 후마니타스와 같은 학계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아도 규모나 영향력으로 봐서는 작디작은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담론적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매체나 지식인, 연구소를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논지 역시 보편적인 독자에 대한 효과보다는 진보적 성향의 독자에 대한 효과를 중심으로 그 유효성을 평가받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이 책 역시 그러한 독자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책은 진보적 성향의 현역 또는 희망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한 '정치바로 아카데미'에서의 강의를 기초를 쓰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굳이 이런 책의 배경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책의 논지에서 충분히 이 책이 '진보파'를 의도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볼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저자가 대놓고 말하는 대목 이외에도 1~4장에 걸쳐 전개되는 메인 테마들을 다룸에 있어 진보파는 항상 '이 중요한 걸 모르는 자'라는 비판과 안타까움의 대상이라는 이론적 배경으로서 등장한다. 진보파는 이에 대해 주로 정당활동으로 포섭될 수 없는 운동들을 무시한 의회지상주의라며 대립각을 세워 왔다.


3.
  이 예상독자에 관한 부분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 책에서 '무지한 자'의 범주는 그 외형적 명료함과 달리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호함은 책의 주논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작지 않은 혼동을 가져다 주지만 제대로 이해되었을 경우 우린 이 학풍 내지 저자의 이론이 어째서 의회지상주의 이상의 것인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가정하는 "우리"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현실적인 정치가와 활동가의 상을 묘사하고 이를 요청하는 대목인 1장과 2장에서는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보다 분명하다. 여기서 저자는 틀림없이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와 변혁에 관심있는 직업정치가나 활동가, 그리고 일반인들을 포괄하는 '진보파'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책의 부제가 가지고 있는 양의성이 보다 분명해 진다. 이 책은 주로 진보파에 의해서 말해지는 정치(1)에서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을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2)에서 가능성을 찾게끔 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헌데 1장과 2장에서 뚜렷했던 의도와 독자는 논의가 정치적 실천가의 덕목이 아닌 민주주의론 일반을 논하게 되는 3장에 들어가게 되면 모호해지게 된다. 더이상 무지한 자는 '진보파'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일반'으로 확장된다. 1장과 2장에도 그러한 서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만 3장에서는 보다 전면화된다. "민중적인 것, 진보적인 것의 가치만 앞세우면서 현실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경시"(98쪽)하는 사람들이야 분명하겠지만 "정당은 당리당략이나 일삼는 집단으로 보는 풍토"(같은 쪽)도 그 사람들의 풍토일까?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싸움"에서 '이해해야 할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 걸까? "문제는 시민이 아니라 정치가"(107쪽)라고 말하며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1억8천만명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반엘리트주의적 민주주의론을 펼치며, 마지막 페이지(174쪽)에서는 "한국 정치의 주변을 박차고 나와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심적 기여자"가 될 "진보"를 기대하는 저자를 보면 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비판하는 부분들을 헷갈리게 된다. 이런 몰이해에 대한 비판 내지 불평은 마치 저자가 실은 1억8천만명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는 엘리트주의라는 이상하고 자기모순적으로 보이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한편으로는 대중을 신비화하거나 책망하는 무책임한 정치 엘리트들을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를 개탄하며 나아가 이를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주요한 원인 중의 하나로 보는 것 같다. 이 두 논의를 모순없이 종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알린스키의 대중관에 대한 서술(61~2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알린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열악한 상황을 바꿀 힘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때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 사람들이 조직화되어 변화를 일으킬 힘을 갖게 될 때 그때 그들은 변화의 문제에 부딪히면서 어떻게 변화를 이끌 것인가를 생각하고 질문을 던진다. …… 힘을 위한 도구나 환경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알려고 하는 이유를 갖게 하고 지식을 필요로 하게 만든다."

  이를 고려해 볼 때 위의 모순을 종합하는 서사는 아마 이런 것이 되지 않을까?

'정치 엘리트와 대중 모두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 부분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으면 해당 학풍의 논지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하게 된다)이다. 정치가가 아무리 올바른 민주주의관을 가지더라도 대중의 민주주의 이해도가 낮다면 말짱 꽝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대중의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 변화될 수 있다. 이 변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이해까지 이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일정한 수준, 즉 대중으로 하여금 전체적이고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정치 효과를 산출하기 위해 충분한 민주주의적인 개별적/집합적인 정치 결정을 내리거나 그런 결정 과정에 동원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끔(이 표현이 문제적이라면 '형태를 띠게끔')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순간들에 필요한 그 '특정한 조건'이란 바로 1장과 2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핵심인 잘 성장한 정치가의 노력과 그 노력의 실천을 정책적 실현의 측면에서나 지속성의 측면에서나 보장해 줄 수 있는 정당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저자에게 있어 보다 대중보다 엘리트의 무지가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대중의 무지, 정확히 말하자면 불안정성은 직접적으로 교정불가능하나 정당에 소속된 정치가의 활동을 매개로 교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정치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심지어는 이들이 그리도 강조하는 '정당' 역시도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정치가'야말로 저자에게 있어 대중을 정치적 결정으로 이끌어내는 동시에, 정당의 기능을 정상화하며, 민주주의 이론과 구체적인 정치 현실을 연결하는 매개항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회지상주의라는 일부 좌파의 신경질적인 반응은 솔직히 설득력을 읽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베버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정당이면 다 되는가?
  아니다. 정당에서도 결국 지도자가 중요하다. "지도자와 그 추종자는 모든 정당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기본 요소"이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경우도 "정당이 가진 추상적 강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 개인적 헌신"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다. 널리 인정받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인간은 "명망가들의 허영심과 이해관계에 매몰되거나 당 관료들의 손에서" 놀아나게 된다." (37쪽)

  요약하자면 대강 이런 그림이 될 거 같다. '민주주의 이론은 정치 엘리트를 교육하나 대중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정치가는 대중을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동원할 수 있다. 그래서 나님은 올바른 민주주의가 실천되기 위해서, 그리하여 나님이 생각하는 '진보적인 것'이 관철되기 위해서 제대로 된 정치가가 나왔으면 좋겠고 서로 지금 생각은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열정이라도 가진 것은 진보파 님들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니 한 번 내 말 좀 들어다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논하는 책인 동시에 그 자체가 이미 설득을 목표로 한 "진보파를 위한 전략적 계몽주의"라는 '정치적'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4.
  지금까지가 책을 평상시 최장집과 박상훈, 후마니타스에 대한 내 선입견을 갱신하면서 읽으려는 다소 수더분한 시도였다면 이제는 책에 대한 불만을 짤막하게 말해보겠다.

  우선 몰역사성 내지는 좌파를 포함한 대중에 대한 외재적인 접근이 그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의 그릇된 정치관을 훈계조로 곧잘 비판하는데 이런 비관 자체가 정치 학습의 모자람이 아닌 정치를 통해 득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대중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자가 그런 역사적 경험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상층 엘리트의 기획이 아닌 하층의 배제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하는 부분(91쪽)과 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러한 민주주의 학습의 기회를 일제와 미국이라는 외부의 요소에 의해 빼앗겼음을 논하는 부분(93쪽)은 저자가 역사적 맥락에 민감함을 짐작케 해준다. 헌데 어째서 이런 역사적 고찰을 대중을 논하는 부분에서는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무시하는지 모르겠다. 저자 자신이 알린스키를 통해 강조하는 이론을 주입하기보다는 다리를 놓는 식의 실천론을 본인의 서술에서도 실천했더라면 참 좋았지 않을까 싶다.{그리고 몰역사성과 관련해서 셰리 버먼을 활용해 서구 유럽 현대사를 해설하는 대목인 4장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저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사민주의 세력을 비판하는데 좌파 일반을 사민주의와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사실 그 당시 사민주의 까는 거야 공산주의 진영에서 천년만년 해오던 거라 저자가 기대하는 좌파 일반에 대한 공격은 잘 성립되지 않는다. 특히 정치적 소극성에 관한 부분은 그렇다. 좌파라면 "그러니까 로자를 죽이지 말고 혁명을..." 식으로 되받아치면 될 일이다. 게다가 나치즘의 등장을 독일의 1차대전 패전과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이라는 이제는 매우 상식적인 역사적 조건을 고려치 않고 그저 사민주의의 실패에서만 찾는 것은 황당하다. 나아가 여기에서 좌파의 반정치성의 정치적 해악이라는 일반적 결론으로 나아가는데 내가 알기로는 전후 유럽사에서 공산주의의 외양적 급진성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사례로 손꼽이곤 하는 사민주의 질서의 성립에 환원불가능한 기여를 하였다. 나는 셰리 버먼의 책이 이런 측면을 다루어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만약 박상훈이 하는 것처럼 제한된 시기의 역사적 실패를 좌파 일반의 문제에 끼워맞추는 그런 불성실한 책이라면 구매를 재고해 봐야겠다...}

  좌파에 대한 서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자꾸 좌파를 인간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이념의 문제에 미친 사람들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김문수의 전향에 대한 코멘트(56~57쪽)에서 뚜렷히 드러난다. 그는 김문수의 문제를 사회주의의 신념을 지키지 못했다는 데에서가 아니라 애당초 처음부터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투쟁이 아닌 이름뿐인 이념에 매몰되었다는 데에서 찾는데,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이상에 대한 헌신과 인간에 대한 헌신을 칼같이 분리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 둘을 어떻게 그렇게 무자르듯 나눌 수 있겠는가. 자기가 -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일까? 비록 개인이 저자가 칭송하는 알린스키처럼 정치적 실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이라고 반성된 형태로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비정치적인 성공의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어느 정도 인간에 대한 애정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사랑의 방식이 괴팍해 보일 수는 있다는 점과 그게 교정되어야 한다는 점은 말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에게 사랑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편의적인 사고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의 조건, 규정성에 대한 충분하지 못한 강조를 들 수 있겠다. 저자는 일단 이 저술에서는 제대로 된 정치가의 부재를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규정했지만 전문적인 정치가가 등장하기 힘든 척박한 정치계의 물적 풍토나 또 진보적 정치가가 온전히 활동을 펼치기 힘든 현실적 조건들을 역사적이든 현재적이든 뚜렷히 보여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와 저자가 속한 학풍이 이에 대해 둔감한 것은 절대 아니고 그 역이라는 것은 후마니타스의 다른 출판 목록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후마니타스라고 최장집과 사츠슈나이더를 경전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열심히 읽었기에 한국 사회 지배 구조에 대한 분석부터 노동자 수기에 최근에는 문학까지 이르는 책을 다양하게 내는 것이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는 한국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의 예상 독자와 그들에 대해 품었을 법한 '전략적 의도' 역시 이에 대한 서술을 부연하지 않은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님들, 이런 건 잘 알잖슴까..." 그렇지만 그래도 다리를 놓으려면, 그리고 정치에 대해 좀더 '현실적'으로 접근하긴 위해서는 한 소절이라도 이에 대한 주의를 표했어야 하는 게 '정치학 강의'라면 맞지 않았을까? 아니면 저자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도 않는 정치의 종속성에 대해 내가 너무 호의적인 평을 해주는 것일까?
  다음과 같은 구절은 의심을 더해주는 데에서 나아가 황당한 심정도 들게끔 한다. "정치에서의 비극은 돈 때문이 아니라 돈의 위력에 압도되어 늘 변명을 찾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168쪽) 정치인을 자본의 꼭두각시로만 보는 맑스주의적 정치인관(?)에 대한 문제의식은 이해하겠다만 그렇다고 정치인의 당당함만으로 자본에 대한 경제적 종속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일까? 138쪽에 나오는 경제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굳이 없어도 되었을 부분이다. 경제의 규정성을 말하는 것이 무조건 경제 환원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경제 결정론이란 둘 중 어느 항을 긍정하든 이렇듯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일 수 있다.
  이 모든 물음은 저자가 정치의 가능성과 조건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을 했을 때에나 속시원하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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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사상 -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
사사키 아쓰시 지음, 송태욱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사사키 아쓰시, 『현대일본사상』,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10.


1.
  이 책은 일본에서도 2009년에 출간된 번역서치고는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1980년대 아사다 아키라로부터 대표되는 이른바 '뉴아카데미즘'부터 2000년대 후반 아즈마 히로키의 『비평지도』까지를 '현대일본사상'이라는 규정에 묶어내 그 변천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책이다. 논술 교재로도 활용되는 푸코나 롤스, 그리고 최근 사람으로는 마이클 센델같은 유럽이나 영미권 사상가들에 비하면 일본의 사상, 특히 현대일본사상이 상대적으로 낯설기도 하고 관심이 덜 동하는 주제임은 사실이다. 하물며 현대일본사상'사'라니?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사다 아키라의 『구조와 힘』과 『도주론』같은 책과 아즈마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며 특히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에는 80년대 이후의 주저들이 띄엄띄엄 번역되어 오다가 최근 들어 거의 다 번역되어 있는 상황이다. 또 이렇게 번역된 저서들이 젊은 대학원생들의 학위 논문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아직 스테디나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출간만 되면 알라딘 세일즈 포인트 1,500은 넘기고 서평도 2~3개는 꾸준히 올라오는 것을 볼 때 한국 인문학계에서 현대일본사상은 꼭 그리 낯선 주제만은 아닌 듯싶다. 오히려 한국 인문학 시장에서 현대일본사상에 대한 수요는 이론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물론 본서에서 보여주듯이 오늘날 이 둘의 경계는 모호하다) 증대하고 있는 추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진 않았지만 젊은 인문학 소비층이 현대일본사상을 어떻게든 소화 활용하려는 모습을 세미나나 블로그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상 자체의 수요 증대는 사상사에 대한 진지한 수요 증대를 수반할 수 밖에 없는데 개별 저자들의 개별 저술만을 읽는 것으로서는 해당 저술의 문제의식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어떤 공백에서 시작되는 순수한 정신활동과는 거리가 있다. 사상은 언제나 배경을 가지는데 첫째, 그 이전에 있었던 사상에 대한 논평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고 둘째, 그 사상이 처한 사회적 역사적 조건과 셋째 그 조건과 관계맺는 자신, 그 안에서 사상이란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를 간과하면 독자는 유사한 부분들을 찾아 끼워맞춰보는 그림맞추기 수준 이상으로 개별 사상들을 묶어낼 수가 없다. 그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본서는 너무 일찍 도착한 손님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일본어를 할 줄 알고 현대일본사상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온 소수 이외에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이런 책이 필요했다고 생각할 만한 독자 풀이 충분히 형성될 수 있는 출판조건이 갖춰져 있는 것이다(물론 서평자 자신도 후자에 속한다).


2.
  그러나 모든 독서의 경험이 그러겠지만 특히 본서에서 독자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자신에게 부족했던 지식을 채우는 경험만을 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또 가장 강한 매력 가운데 한국 사상 시장과의 '동시대성'이다. 달력 위의 시간상으로만 봐도 본서가 다루고 있는 시기는 '지금 여기'와 매우 가깝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시대적 조건이 지금 한국의, 특히 출판시장, 대안담론/비판담론 시장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이를테면 맛뵈기로 뉴아카데미즘 유행시 학생들의 상태를 회고적으로 묘사한 사사키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자.

"비정치적이고 무슨 일에나 관심이 없는 세대라 불렸던 당시의 젊은이지만, 지적 호기심이나 향학열이라 부를 수 있는 에너지를 학생 운동이나 입시 전쟁에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비축하며 부풀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부끄럽지만, 필자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지적 리비도가 향한 곳으로,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은 아주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37쪽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지 않은가? 이러한 유사성은 시공간적 근접성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그보다는 사사키의 '사상사'가 내용보다는 형식, 그것의 옳고 그름보다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행위로서 행해졌던 방식을 기술한다는 관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사사키는 자신의 방법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일본의 사상>을 개괄한다고 하면서도 이 책에서는 개별적인 사상의 내실과 내용에 일일이 깊이 파고들어 각각의 변천을 논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 이유는 필자가 애초에 <일본의 사상>은 사상의 '내용' 자체보다 오로지 그 사상의 '행위'에 의해 성립해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 그 사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상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고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8쪽

  혹자는 이런 사상사가 사상의 컨텐츠, 핵심을 외면하는 몰지성적인 태도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상이 현실에 끼친 영향도로 따지자면 '담고 있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아니면 '담고 있다고 가정되는 것'이 우선이었을까? 사사키는 "때로는 내용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고 있지 않는데도(또는 내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경우조차도?) 어떤 유효한 퍼포먼스에 의해 그 사상이 효력을 발휘하는 일도 있습니다(19쪽)"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상이 '보이고 싶어하는' 주관적 모습이 아닌 실제 '보인' 객관적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상과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이런 객관화는 모욕적인 것일 수 있겠지만 사사키는 거침없이 솔직한 관점을 택한다. 그는 거친 말투를 쓰진 않지만 현대일본사상가는 끊임없는 구별짓기의 과정이었으며 이를 멀리서 보면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시소'에 불과했다고 굉장히 거친 논의를 펼친다(하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그는 현대일본사상에 '성과'가 없다고까지는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사상>의 역사를 '행위=퍼포먼스'의 응수로 그리려 하면 그 변천의 양상도 내용을 좇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예컨대 어떤 사상이 새롭게 등장할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 이전의 사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 적어도 타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는 것입니다." -19~20쪽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의 사상>의 변천을 더듬어 가는 것은 시소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수없이 역전이 일어나고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외로 전보다 그다지 나아진 것 같지가 않습니다." -22쪽

  이렇게 사상을 철저히 탈신비화해서 보려는 태도에 입각해 『구조와 힘』15만부 판매로 시작된 화려한 뉴아카데미즘의 성공 요인을 그 내적 논의의 정교함이나 위대성이 아닌 마치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 아사다나 나카자와의 책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해외 문헌이 아직 일본어로 번역되지 않았는데, 그들은 해외 문헌을 원문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독자의 흥미와 갈망을 더한층 자극하여 그들의 책이 단지 '소개'라는 기능 이상의 흡인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읽을 수 있다/아직 읽을 수 없다'는 이 미묘한 상태도 뉴아카데미즘 현상의 절묘한 지점이었을 것입니다." -40쪽

"뉴아카데미즘의 전성기인 1984년 말에 (...) 『알고 싶은 당신을 위한 현대 사상 입문』이라는 무크지가 간행되었습니다. (...) 이 '알고 싶은 당신'이야말로 뉴아카데미즘 현상이 산출한(또는 드러낸?) 새로운 독자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뉴아카데미즘의 퍼포먼스는 '알고 싶은 당신들'을 위해 이루어졌고 그것에 의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대량 생산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92~3쪽

"여기에는 <일본의 사상>의 그 이후 흐름을 생각할 때 아주 시사적인, 어떤 중요한 동기 부여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다(=읽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당신'들에게는 알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것보다 될수록 빠르고 편하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알 수 있게 되어) 그것에 대해 '말(할수 있는)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사다 아키라나 나카자와 신이치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든, '작품=텍스트'를 '읽는' 행위(이것도 일종의 '노동'입니다)를 경시하는 뉴아카데미즘의 특징은 그들이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123쪽

  헌데 이런 문제의식, 사상이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문제의식 내지는 위기의식은 사사키 자신의 고유한 관점만은 아닌 아사다나 가라타니같은 뉴아카데미즘의 논자들에 대해서 작든 크든 자각되고 있는 것이었다. 사사키는 고진의 「비평과 포스트모던」같은 논문이나 『탐구』이후 '타자'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작업을 이런 맥락에서 높게 평가한다. 또한 아사다 역시 그러한 반성을 수행했다는 것을 1987년 12월 『겐다이시소』 임시증간호에 실린 「어린이의 자본주의와 일본의 포스트모더니즘 - 하나의 요정 이야기」라는 강연기록문에서 찾는다.

"[아사다는] <1980년대 일본>에 나타난 '포스트모던'은 사실 1930년대의 전전 '포스트모던'과 비슷한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아사다는 그런 비전을 '관념론적 도착의 극치'로 단정하고 마치 자신이 제기한 논의를 내팽개치듯 강연을 끝내 버립니다.
 아사다는 강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히 자조적으로 "이 비전이 자괴에 이르는 것처럼 저는 감히 그로테스크한 패러디를 계속해 왔다"고 말한 뒤 "이 도착을 철저히 해체하고 그 안에서부터 현실적인 분석을 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발언은 이 강연에서의 논지에 대한 것이겠지만, 뉴아카데미즘의 스타인 아사다 아키라의 '행위' 전반에 대한 자기반성의 변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86쪽

  회고담이긴 하지만 아사다와 함께 뉴아카데미즘을 주도한 나카자와 신이치에 따르면 이런 불안과 반성, 자각은 뉴아데미즘의 시작 때부터 있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사사키는 그런 사후적 회고가 진실이든 말든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뉴아카데미즘에 대해서 가차없는 평가를 아끼지 않으며 이를 재밌게도 가라타니의 메인 테마이기도 했던 '아는 자'와 '행하는 자' 논의를 활용해 논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해도, 그들은 계속 '뉴아카데미즘'이라는 춤을 추었습니다. 그 춤은 밝고 경쾌하고 멋있었고, 무엇보다 무척 즐거운 것이어서 옆에서 보기에는 그런 의심이나 아이러니가 숨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춤'이 확실한 종언을 고하기 위해서는 '쇼와'가 끝나고 '1980년대'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139~40쪽

  어찌보면 이런 비평을 사상의 주논지를 무시한 '탈맥락화' 내지는 '트집잡기'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사사키의 비판에는 치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케팅론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사상을 다룰 때에도 사사키는 판매 데이타나 '몰이해한' 독자들만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만이 아니라(그런데 이들을 근거로만 내세우면 과연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뒤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다시 답해볼 것이다.) 해당 사상가들이 딛고 서있으나 뚜렷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이론적' 전제를 함께 제시한다. 이를테면 사사키는 아사다 아키라가 뉴아카데미즘 풍조와 이를 따랐던 사람들에 대해서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식으로 가혹한 비판을 하는 대목을 두고 "<일본의 사상>의 '병적인 성격'" 중 하나를 본다.

" (...) 아사다 아키라는 여기에서도 철저하게 '올바릅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일 정도로 다음의 두 가지 물음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째, 왜 사람들은 때로 그렇게 '바보'같고 '하찮은' 생각에 빠지는 것일까? 둘째, 도저히 그런 '바보'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일까?하는 물음입니다. (...) 굳이 말하자면 '지성'의 차원과는 별도로, 그래도 사람은 '어리석음'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는 게 아닐까요? 옴진리교가 뜻밖에 가르쳐 준 것은 오히려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정리해 버리는 것은 간단합니다. 아사다 자신이 '지진아'라는 말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여기에는 사실 그 자체가 현실을 회피한, 지적 엘리트주의가 얼굴을 내밀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짐)" -215~6쪽, 강조는 인용자.

사사키는 여기서 아사다, 그리고 뉴아카데미즘을 규정해 오던 근본적인 '부도덕'을 본다. 그것은 '비판적'이기는 했으나 동시에 '초월적'이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멍청'하기도 한 타자를 용인할 수 없이 자신의 템포로만 세계를 재단하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다. 사사키가 보았을 때 90년대의 사상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것이며 80년대와의 차이가 가장 뚜렷히 드러난는 대목이 바로 천황제에 대한 태도와 옴진리교 사건에서였다.

"하지만 그[오쓰카 에이지]는 아사다 아키라와 같은 세대이기는 해도 '1980년대 뉴아카데미즘' 논자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쓰카의 연구는 철학적인=이론적인 해독 코드를 '현실=현재'에 적용해 가는 '현대사상'적인 것과는 정반대로 어디까지나 '현실=현재'를 향한 시선과 필드 워크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182쪽

"그러나 아사다 아키라나 가라타니 고진과 달리 세 사람은 각자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천황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일본의 사상> 사이에 가로놓인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요쿠'(좌익)와 '우요큐'(우익)의 차이가 아니라 '이념(ideal)'과 '리얼(현실=현재)'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1990년대의 세 사람은 현실로서는 어떻게든 천황이 존재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여기기 때문입니다." -199~200쪽

"'바보 같고 하잖은 현실=세계'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하는 1980년대의 사상과, 아니, 바로 그것을 논해야 한다는 1990년대의 사상, 이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 것이 '옴진리교 사건'이었습니다." -216쪽

  하지만 그렇다고 사사키가 뉴아카데미즘을 지워야 할 부끄러운 과거로 넘겨버리고 90년대 사상에 양 손을 들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우선 90년대 사상의 경우에는 철저히 가장 평면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에 근거하려고 했다는 점은 중요한 전회로 본다. 비록 서문에서 현대일본사상을 '시소'에 비유하긴 했으나 그는 이런 반성들과 그에 기초한 작업들을 나름의 '성과'로 보기는 하는 것 같다. 다만 세계에 내재적으로 접근해 변혁보다는 기술에 초점을 두다보니 비판을 포기하고 세계를 그냥 긍정하는 것으로 기울 위험이 90년대의 사상에 있었다.
  뉴아카데미즘에 있어 그는 그 컨텐츠가 있던 없던 자기과시였던 말던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킨 건 사회적 사실이고 거기에서 읽어내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유행이든 스노비즘이든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가 일정한 수의 '층'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연합 적군 사건' 이후 대략 1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93쪽)" 그리고 그 의미를 '도주'와 같은 시대적 과제나 전복 전략보다는 좀더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찾는다. 즉 아사다라는 인물 자체도 시대를 속해 있는 인물로서 비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문[『도주론』]이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이론적인 틀을 거의 억지로 '대학론'에, 더욱 자세히 말하자면 '대학생(젊은이)으로서의 생활방식론'에 적용시키고 있는 점입니다. 차이화라는 용어는 단숨에 생활 방식의 모드로, 이른바 처세술로 변환합니다. (...) 마지막 문장에 아사다 아키라의 '대학생=젊은이' 에 대한 메시지가 집약되어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집필 당시 스물네 살의 젊은이였던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55쪽, 강조는 인용자


3.
  사사키가 보기에 2000년대의 아이콘, 아즈마 히로키는 이런 <일본의 사상>의 특성에 대해, 그리고 이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객관적인 인식을 수행한 사람이었다. 아즈마는 데뷔 이후 뉴아카데미즘에 거리를 두는데 흔히들 그 단절점을 오타쿠 분석인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찾는 것과 달리 사사키는 그의 데뷔작 『존재론적, 우편적』의 말미에서 찾는다. 거기서 아즈마는 데리다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를 썼을까 묻다보니, 결국 자기가 궁금했던 것은 내가 왜 이런 기묘한 텍스트는 읽는 것일까이였으며, 이것이 하나의 "함정"이었다고 말한다. 사사키이 대목에서 아즈마를 80년대와 90년대가 주는 교훈을 가장 의식적으로 잘 섭취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언급적인 함정'이란, 뭔가에 대해 말하는(생각하는) 것이 어쩐 일인지 '이 나'에 대해 생각하는(말하는) 것으로 반전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여기서 아즈마가 말하는 것은 분명히 일종의 '문학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문학'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더한층 '이 나'를 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아즈마 히로키는 어떻게든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이지 않은 사고의 양상을 모색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 나'가 품고 있는 '악순환'을 어떻게 뒤집을까, '자기 언급'이라는 '함정'에 어떻게 '타자'를 도입할까(...) 이를테면 '타자 언급성'을 어떻게 작동할까 하는 시도였습니다." -257~8쪽

  이에 근거해 보았을 때, 데리다에서 오타쿠로 넘어간 아즈마의 행보는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아즈마의 뉴아카데미즘과의 단절은 앞서 보았던 아사다의 다소 위선적으로도 느껴지는 자기반성보다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99년 초에 열린 『비평공간』의 심포지엄에서의 아즈마와 아사다의 직접 대화에서 드러난다.

아즈마: 아사다 씨와 저의 의견이 다른 단 한 가지는, 아사다 씨는 좋은 텍스트가 어딘가에 있으면 누군가 읽을 거라는 것이지요.
아사다: 아니, 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아즈마: 읽지 않았다면, 사후적으로 보면 그저 사라진 것일 뿐입니다.
아사다: 사라져도 어쩔 수 없겠지요.
아즈마: 그건 일종의 니힐리즘인데, 글을 쓰고 싶은 저로서는 그런 입장을 취할 수는 없습니다.

(...)

  필자는 이 어긋남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투병 통신'에 대한 위화감과 '사라져 버리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그 후 아즈마 히로키의 퍼포먼스를 구동시켜 가는 최대의 행동 원리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61~2쪽

  이렇듯 '읽히는 글'을 쓰고 싶고, 또 그래야만 사상이 의미가 있다는 아즈마의 아이디어는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하나는 콘텐츠, 내용, 콘스탄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저널리즘적 측면의 강화이다. 아즈마는 이제 데리다에 대해서 말하기보다는 오타쿠나 정보자유에 대해서 말한다. 사사키는 이런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그는 이 논고[「정보자유론」]에서 '뉴아카데미즘'적으로 '현대 사상'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오타쿠'로서 '모에'만 말하는 것도 아니며 확실하게 사회나 공공성에 대해 자극적이고 유효한 말=사상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이 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280쪽

"이에 따라 그는 '이념=이론'에서 '현실'로, 아카데미즘에서 저널리즘으로 전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이행이 아닙니다. 1980년대의 요소도 적당히 유지하면서 1990년대에 다리를 놓고 중심을 이동한 것입니다. (...) 오히려 아즈마는 그 사고의 발판을 커다란 '거대 서사'에서 작은 '거대 서사'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철학이나 문학이라 불리는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상'에서 좀 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사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강한 관심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 사회학도 심리학도 이를테면 '거기에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학문입니다.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데이터 수집과 그 해석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여기에 없는 것'을 희구하는 철학이나 문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공학이나 법학에 대한 관심도...)" -285쪽

  다른 한 가지 측면은 스타일, 행위, 퍼포머티브한 측면의 변화로서 아즈마는 현대일본사상가들 중 거의 최초로 자신이 사상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려고 한다. "(...) 단지 콘스탄티브하게 뛰어난 '텍스트=작품=사상'을 쓰면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났습니다. 퍼포머티브한 '효과'를 짜 넣으면서, 그러나 콘스탄티브이기도 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퍼포먼스'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 서두에 등장하는 비평가 양성 프로그램 '아즈마 히로키의 제로아카 도장'이다. 이 이벤트에서는 거기에 참가한 비평가 예비군들이 차례로 몇 개의 관문에 의해 걸러지고 최종 관문을 돌파한 사람은 단행본으로 초판 1만 부를 내며 데뷔를 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비평가 예비군들은 리얼리티쇼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만든 비평 동인지를 들고 서점에 나가 제한시간 내에 더 많은 부수를 파는 쪽이 우승하게 된다.

  사사키는 이런 아즈마와 2000년 <일본의 사상>의 전개를 마냥 긍정하지만은 않는다. 우선 콘텐츠의 측면에 있어서는 보다 현실적이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일 수 있지만 스타일의 측면과 얽혀 다음과 같이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때때로 후자에서 전제가 되고 있는 '공공성' 개념이 이를테면 '사상'을 하기 위한 구실처럼 생각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는 진실로 리얼한, 필사적이 되어야 할 '문제'로서가 아니라, 말하자면 '누구의 머리가 가장 좋은가 하는 경쟁'의 게임보드로서 일단 '공공성'이라는 규칙"이 내세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90쪽

  스타일의 측면에서는 그것은 자본주의나 승자독식의 논리를 그대로 내면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사사키는 다음과 같이 현대일본사상의 흐름을 정리한다.

"198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비판적(부정적)'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관여적(보류가 붙은 긍정)'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의 사상은 현 상황에 대해 '수용적(긍정적)'입니다. 2000년대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개변)'하려고도, 세계를 '기술(설명)'하려고도 하지 않고 이 세계를 '감수'하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그저 '받아들일' 뿐입니다." -285쪽

  나는 이를 '사상과 세계와의 관계설정'을 기준으로 80년대=초월적, 90년대=긴장을 띤 내재적, 2000년대=긴장을 잃어가는듯한 내재적 식으로 정리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사키는 이런 2000년대 사상의 특색이 그저 안일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름의 극약처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사상이 '현실적'이기 위해서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현실 안으로 뛰어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재설정된 게임 보드의 조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어쨌든 승패가 확실히 결정되는 것, 둘째는 어떤 구체적인 성공과 결부되는 것입니다. (...) 확실히 거기에는 고이즈미 정권하에서 양성된 '이기는 쪽/지는 쪽'이라는 나쁜 이항 대립이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현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사상'은 그에 대항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아니라 같은 도식에 감히 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심심풀이 놀이가 되어 벌비니다. 2000년대의 사상이라는 게임은 이제 '유희'일 수 없으며 그것이 어떤 의미든 진지한 '경기'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왜 이제 와서 일부러 '사상'같은 걸 하려 하겠습니까?" -292쪽

"다만 한가지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만, 저는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이 '살아남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했기 때문에 게임 보드를 '재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오히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일본의 사상'의 생존과 연명을 깊이 생각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292쪽


4.
급마무리하자면 사상 역시 다른 인간의 이런저런 활동과 마찬가지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 세계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주는 과정이며, 또 이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지점에서 본서는 보다 보편적인 질문 "사상이란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었고 현실과 어떤 관계(해석? 변혁? 비판? 규범? 상품?)를 맺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가며, 이를 현대일본사상이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사사키를 이를 살펴 보았다. 그리고 아마 사사키 자신 역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전개했다기보다는 이들 대답으로부터 배운 관점을 역으로 적용해 본 것일 게다. 아마 우리도 비슷한 것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것저것 특히 나같은 잉문학도가 생각해 볼 지점이 널려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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