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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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인가를 말한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사건입니다.-122쪽

투쟁은 안전거리를 두고 그들을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향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론은 이러한 투쟁의 지역적(regional) 체계인 것이지요.-192쪽

핵심적으로 나의 정치적 선택(이 용어의 가장 넓은 의미에서)과 관련된 이유들 때문에, 나는 결코 해결책을 처방하는 역할을 수행하길 원칠 않습니다. 나는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이 규칙을 설립하거나 해결책을 제안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예언을 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식인, 권력이 특정한 상황(내가 보기엔, 비판받아야 마땅할 상황)에서 작동하는 데 도움을 줄 뿐입니다.-150쪽

(...)나는 권력의 현실적인 작동메커니즘을 이해하려고 고심해 왔습니다. 내가 이 작업을 한 이유는, 그 권력관계 속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천과 저항, 반란을 통해 그것들로부터 탈출하고, 그것들을 변환시켜 더 이상 예속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 자신에 의해 고안되고, 계획될 수 있는 수많은 할 일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내 모든 연구는 절대적 낙관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이요. 당신이 어떻게 갇혀 있는지 보시오.'라고 말하기 위해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사물들이 변형될 수 있다고 보는 한에서만 그것에 대해 말해왔습니다.-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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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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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문장을 다음과 같은 성경 인용으로 끝맺는다. 

 "주님의 날은 밤에 도둑처럼 찾아올 것입니다." (데살로니카 전서, 5장 2절)

 여기서 '밤'이란 손님이 주로 찾아오지 않는 때를 가리킨다. 즉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메시아는 도래한다. 그러나 그가 찾아온다 할지언정 우리는 그/녀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는 불청객을 가리켜 보통 우리는 "도둑"이라 한다. 

 우리는 메시아가 언제 올지도 설사 그가 왔다 할지라도 도둑인지 아닌지도 분간할 수 없다. 밤에 누군가 찾아왔다. 우리는 위험을 각오하고서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문을 닫고 평안히 잠을 청할 것인가. 바디우는 전자에 내기를 건다. 그의 "사건"개념은 예견치 못한 때 불현듯 찾아오는 도둑인지 메시아인지 알 수 없는 손님의 도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건, 타자에로의 열림은 주체의 동일성을 해체시킨다.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타자에게 언제나-이미 열려있다. 따라서 바울은 스스로 메시아로서 자임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타자가 이미-도래했음을 예수가 부활했음을 선언할 뿐이다. 이것이 바디우의 사건에의 "충실성"개념이다. 우리 자신의 자명적 정체성이란 내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외상적 타자를 배제하는 한에서만 성립가능하다. 바디우와 바울은 동일성의 행복과 안정을 거부하고 자신을 타자에게 열린 상태로 유지하길 고집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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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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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단지 한 위선자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의 가장 내밀하고 또 비열한 무의식적 환상을 정면으로 가격한다. 인도주의 활동가들은 "세계의 비참"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평화를 보호해주는 소비재를 제공해 준다(시청자들에게 세계의 비참에 대한 무능력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비교하게끔 하며 감동을 유도하는 모 통신사의 광고는 얼마나 역겨운가!). 때문에 인도주의는 세계의 양극화를 지탱해 주는 주요한 이데올로기이다. 마더 테레사는 하나의 증상일 뿐이다. 

 또한 그녀는 몸소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와 자유민주주의적 인도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도덕주의적 사고는 모두 자비로운 선진국과 빈곤한 후진국의 이원적 구도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극복과 투쟁의 의지는 없다. 단지 결벽증에 가까운 '선함'과 '신성함'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만,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라는 식의 기괴한 영웅주의도 끼워줘야 할 것이다.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 단지 잘못된 것을 개선하기 위한 "올바른" '싸움'만이 가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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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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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철학자를 한 줄도 인용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담론도 '비판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힘든 한국 출판계에서 우석훈은 경제학과 같은 '딱딱한' 사회과학의 역할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저자이다. 왜 사회과학인가? 세상에는 '불평등'이 있고 그에 대해 알만큼 아니, 뻔한 소리 술맛 떨어지는 이야기는 집어치우자고 말하는 뻔뻔한 시대에 우석훈은 사회과학에 아직 어떤 '역할'이 남아있음을, 아니 어쩌면 애당초 자칭 '사회과학'들은 시작도 하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 '역할'이 있다는 것을 논한다. 그리고 나아가 그 '역할'을 짊어지지 않고 지나가버린 대가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톡톡히 치르고 있는지 보여준다. 

 1부의 경제학사, 자본주의 시기 구분은 경제학이나 사회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 낯선 내용이 아니다. 우석훈은 여기서는 기존 학계의 논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헌데 재밌는 건 그렇다고 해서 그 도식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수의 자칭 '좌파' 담론, 특히 학생 운동 진영은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거의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반하여 자신들의 '좌파'적 정체성을 규정한다. 이런 식의 운동은 말잔치, 정치적 자위행위에 그치기 쉬운데 그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포괄하는 구체적 현상들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을 거의 포기하기 때문이다. '무자비한 시장', '민영화', '자본의 논리'같은 애매모호한 말들만이 넘칠 뿐이지 '신자유주의'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위협하고 있고 이를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이에 대응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신자유주의'만큼이나 추상적이고 공허한 '저항', '투쟁'등이 당위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의 수다들이 반복된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붙잡고 그 둘레에서 이뤄지는 저항(도덕주의적 좌파) 또는 비판적 분석(강단 사회과학계)은 스스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창출하는 대신, '대안'을 구상하고 실행한 책임을 정권, 지배 체제에 넘기고 '누구 탓'인지 따지는 데 시간을 보내는 불평꾼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뭐니뭐니해도 2부의 여섯번째 강의 즈음에서부터 이어지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 분석'이다. 1부의 다소 식상한 자본주의 도식에도 불구하고, 우석훈은 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유하길 멈추지 않는다. 내 생각에 자본주의는 뚜렷한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는 시장경제 이상의 '어떤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물학적/사회적 생존이 '화폐'에 의해 매개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국적 대기업의 진입과, 인간적인 교류들이 계산적 이해관계로 대체되는 속도를 자본주의화의 척도로 보는 것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이 이제 망하려나 보다'식의 보수주의적 개탄과 더욱 가깝다. 

 때문에 어떤 구체적 단위(이를테면 우석훈에게는 한국이라는 국가)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거시적 자본주의에 대해서 사유하길 포기하고, 맑스의 성과를 무시하고 부르주아 경제학적 분석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다. 우석훈은 과잉된 교육열, 지방과 수도권의 불균형, 토목경제, 환경파괴,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 지겹게까지 비판담론의 주요 대상들을 도덕주의적/계몽주의적 훈계가 아니라, 지극히 경제학적인 시각에서 차분히(그에게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만) 분석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다양한 문제들이 하나의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맥락을 통해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의 서사가 노동착취, 비정규직 문제 등에 국한되고, 주류 경제학자들의 서사가 '물론 여기저기 문제가 많지만 몇 년만 참으면 다같이 잘 살 수 있다'는 식의 이제는 일종의 최면주문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반복해 온 점을 생각해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우리가 '뭉쳐야(경제위기에 맞서 혹은 한나라당의 지배정권에 맞서) 된다'고 설교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이미 뭉쳐있음'을, 어떤 운명을 공유하고 있음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좌파적 담론이다. 좌파는 납득할 '이유'를 말하지 '도덕'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결론적으로 제3부문의 성장을 통한 국가, 시장과의 균형을 통한 건전한 국민경제라는 대안을 제시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대안이 크나큰 신뢰가 가지 않는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 경제로 이행해야 되고 그를 위해 제3부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 그는 무엇을 성취하고 싶은 것인가? 그의 분석들이 자본주의의 보편적 실재를 설명하는 데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음에도 그는 그런 식으로 논의를 이어가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이와 같은 산재해 있는 문제를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한 문제'로 국한한다. 때문에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는 국지적인 시스템의 오작동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본주의 자체의 보편적 본질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예감'의 성격이 강하다만 나는 저자의 낙관주의적인 성향에 적지 않은 불신을 가지고 있다. '공포경제학'이라는 별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자를 고려하면서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또 너무 '쉽게' 긍정하고 명랑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이든 현실에 대한 '적극적 대안'을 '쿨하지 못하게' 제시했다는 점은 무척 흥미롭고 고무적이다.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미래'를 말해야 할 좌파들의 입에서 우리는 '볼멘 소리'만을 듣게 되었다. '탁상공론 식의 대안연구보다는 지금 고통받는 이를 위해 거리로 나서야 한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한다만 대중이 안 따라주니 답답할 뿐이다' 등등. 남들이 알아주던 말던 자기 일을 꿋꿋히 해나가는 것이 세상을 바꾸겠다고 자임하는 이들의 1차적 책임이다. '현실투쟁'도 '대중계몽'도 중요하다만 '미래를 만들기 위한 준비'라는 좌파적 소임이 갖춘 상황에서나 중요한 말이다. 어쩌면 '고통받는 오늘'에 대한 그 끊임없는 수다들은 '미래'에 대해서 침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추상적' 슬로건을 반복하는 것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 변혁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우석훈은 이 수다들을 뚫고 다소 허무맹랑하고 빈틈도 없다만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낸 보기 드문 사회과학 저자다. 이에 대해 (리뷰어와 같이) 냉소를 보내기란 쉬운 일이다. 허나 다들 대강 넘어가고 나중에 해치우려던 '숙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대안이란 게 이토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비판적 분석에 근거하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절망'의 배수진을 치고 서투르게나마 '희망'을 얘기한다는 것. 우석훈은 오늘날 글을 통해서 어떤 좌파적 실천이 가능할지에 대해서 몸소 보여주고 있다. 만약 우리가 "좌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함에도 "우석훈"을 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우리가 강렬한 자기기만의 열정에 휩싸여 있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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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2009-01-06 19:32   좋아요 0 | URL
흥분해서 글을 썼다만, 몇 가지 오버한 부분이 있어 지적한다.

1. 우석훈은 좌파가 아니다. 그의 대안은 정직한 '제3의 길', 창조적 경제를 육성하자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입장이다. 그는 세계경제에 닥친 금융위기를 보고도 그에 대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를 고려하지는 않는다. 태도에 있어서 그는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라며 장기적 관점을 거부한 케인즈스러운 면모를 보인다.
'좌파'가 아니라고 자임하는 점에서 정직하다. 그러나 대안 제시에 있어서 너무나도 막연하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근본적 속성과 세계경제를 사유하는 데 있어서는 게으르다. 더 강하게 표현하자면 나이브하다.

2. 나 자신은 우석훈에게 '좌파'의 비전을 봄에 있어 경제주의적 시각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물론 좌파가 복잡한 경제학 공부를 포기하면서부터 각종 사회 문제들을 통합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공백, 그리고 했다하더라도 대중이 이해할 형태로 가공해내지 못했다는 태만(어쩌면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을 우석훈이 지적하고 메꾸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런 입장에 경도될 경우, 그 어떤 정치적 실천도 무의미하다고 냉소하는 허무주의적 경제주의에 빠진다. 이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게슴츠레 2009-01-09 19:45   좋아요 0 | URL
때문에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1. 지역경제의 자립구조 건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허나 이 질문은 조금 무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다 정당하고 진짜로 묻고 싶은 것은 다음 둘이다.

2. 세계자본주의 구조에서 제3부문을 강화하여 국민경제를 재구축한 대한민국의 '자리'는 어디인가? 얼핏 보기에 제3부문이란 포스트-포디즘 패러다임에 적합한 고급 소비재를 생산하자는 소리로 들린다. 우석훈이 선진국을 살펴봤을 때 제3부문들이 조금씩 있다더라 할 때 이는 보다 명확해진다. 제3부문이란 별다른 게 아니라 그저 사치재 생산이라는 선도산업을 점유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포스트 포디즘에 적응한 국가란 자본/국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진출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일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가 야기하는 전세계적 모순에 눈을 감는 경제적 국가이기주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또한 글로벌한 금융위기가 닥친 이 시점에서 이와 같은 산업전환은 단기적으로 보다 심각한 경기침체를 야기할 수 있지 않은가? 허나 우석훈은 이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때문에 이를 '위대한 선택' 일종의 도박이라 칭한 것이리라. 허나 장기적으로는 전망이 '정말'괜찮은가?

3. 개인적으로 나는 모 학교에서 생협을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대학생협이 학교 자본/권력 구조에 있어서 미칠 수 있는 변화란 무엇인가? 대학생협은 정말 세계를 변화시키는 한 알의 모래알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저 생태주의 메세지의 게릴라식 전파와 유기농 식품을 판매하고 생태주의적 생활방식이라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주장하는 단체에 자신의 역할을 국한해야 하는가?

놀이네트 2009-01-31 19:18   좋아요 0 | URL
리뷰 감명깊게 잘 봤습니다.

우석훈씨가 요즘 밀고 있는 게 제3부문인데, <소유의 종말>을 좀 참고했는지가 저는 궁금합니다. <소유의 종말>에서 리프킨은 제1부문과 제2부문이 제3부문과 다른 점을 '놀이'라는 과정과 원리로 아주 명료하게 보여주었는데요. 우석훈씨는 정말 제3부문을 생협이나 하이엔드급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때가 많아요.
 
까다로운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5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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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이데올로기적 자세를 특징짓는 두 가지 특징─냉소적 거리두기와 편집증적 환상에 대한 완전한 의존─은 엄밀히 공의존적이다: 오늘날의 전형적 주체는 그 어떤 공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냉소적 거리를 보이면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음모와 위협과 타자의 향유의 과도한 형태들에 관한 편집증적 환상에 탐닉하는 자이다. 큰 타자(상징적 허구들의 질서)에 대한 불신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주체가 거부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 즉 실제로 '배후 조종'을 하면서 쇼를 진행하는 비밀스럽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능한 행위자가 있다는─눈에 보이는 공적 권력 배후에 또 다른 외설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가 있다는─믿음에 의존하고 있다.-588쪽

강렬한 성적 쾌락에 대한 이 섬뜩한 무관심은 즉각적 만족과 쾌락추구에 열심인 바로서의 후근대적 사회라는 공식 이데올로기와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주체는 자신의 삶을 쾌락에 바치며 예비적 행위(조깅, 마사지, 선탠, 크림과 로션 바르기……)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력의 공식적 목표의 매력은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거리나 첼시를 조금만 걷다보면 수백 명의 게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들여 보디 빌딩을 하고 있으며, 늙는다는 두려운 가능성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으며, 쾌락에 헌신하고 있지만, 분명 항구적 불안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 실패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597쪽

부성적 권위의 이런 붕괴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적 규범들은 점차로 (사회적 성공이라든가 멋진 육체와 같은) 상상적 이상들에 의해 대체된다. 다른 한편으로 상징적 금지의 결여는 사나운 초자아 형상들의 재출현에 의해 보충된다. 따라서 우리는 극도로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갖는다. 그는 모든 것을 자신의 불확실한 상상적 균형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서 지각한다(희생양 논리의 보편화를 예로 들어보자. 다른 인간과의 모든 접촉은 잠재적 위협으로서 경험된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면, 타인이 탐욕스럽게 나를 쳐다보면, 그는 이미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나르시시즘적 자기-폐쇄는, 교란되지 않은 균형 속에서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닌) 자비에 주체를 내맡긴다.-5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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