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겨레21(아마 254호?)에 폴라니 특집이 실렸다. 해당 기사에서는 근대경제체제를 마르크스의 시대->케인즈의 시대->하이에크의 시대->폴라니의 시대로 정리하고서는 최근 인류학에 기초한 진보적 경제학을 모색하는 우석훈, 홍기빈 등을 데려다 놓고 대담을 열었더랬다.
정작 폴라니 자신이 어쩐지에 대한 논의는 차지하고서라도 나는 폴라니의 '한국적 전유'가 매우 낙관적인, 동시에 매우 상투적인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의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이 폴라니 열풍이 현 시대와 역사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기 보다는 또 하나의 천년왕국주의식 휴머니즘적 유토피아를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있느냐는 것이다. 고민은 없되 레토릭만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짧은 공부지만 그래도 내가 아는 한에서 이쪽 진영의 논자 우석훈을 비판해 보자면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2부 3장 5절 "자본주의의 세계성"절에서의 세계자본주의론을 논거로 들 수 있겠다 고진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에서 진정한 '노동계급'는 기껏어해야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도 한참 미치지도 못한다는 월러스틴의 주장을 따라 자본주의적 노동구조 생산구조가 오늘날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잘 사는 나라들을 보면 자본에도 국가에도 포섭되지 않는 제3부문이라는 생산영역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는 우석훈의 지적과 고진은 만난다.
헌데 재밌는 것은 고진은 우석훈처럼 거기서 희망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세계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고리라는 주장을 펼친다는 것이다. 즉 국가 단위의 개별자본이 아니라 세계적 총자본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자본주의적 생산영역은 자본주의의 외부, 예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이 아닌 타국에서의 노동력의 착취에 기초해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우석훈처럼 "국민경제"의 틀에 갇혀 있을 때는 볼 수 없는 통찰이다. 반대의 경우도 가능한데 전세계의 슬럼 지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공식 경제informal economy가 그것이다. 앞서 선진국의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이 타국의 노동력의 착취에 기반한다고 한다면, 슬럼에서의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은 명시적인 임노동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 뿐이지 제대로 된 임금'조차' 지불되지 않는 절대적 착취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인 것이다.
즉 고진의 관점에 따를 때,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의 사례를 아무리 많이 발견하더라도 오늘날이 '자본주의'사회라는 것을 반박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홍기빈 씨가 말하곤 하는 인간적 관계들이 모두 사물적 관계로 도치된 데에 현 자본주의의 근본악이 있다는 개탄과 연관해 고진의 물상화 이론에 대한 비판도 참고할 만하다. 고진은 상품경제, 사물들을 통한 관계가 없었다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는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며 물상화 이론들이 오히려 인과관계를 도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인 시켜줄 뿐이다. 따라서 폴라니나 모스와 같은 경제인류학적 성과들이 모두 거부되어야 할 유토피아적 환상이라며 기각해야 할 이유는 없다. 고진은 비자본주의적 생산 영역을 세계적 자본주의의 외부가 아닌 내부로 설명하는 데 이들의 연구를 전유하는 것 이외에도 증여/호혜적 교환관계를 통한 네이션의 형성을 논하며 이들을 다시 한번 활용한다
나는 좌파적 관점에서 인류학과 마르크스주의가 접합점을 찾을 수 있으며, 현 세계를 이해하고 이를 변혁하기 위한 주요한 이론적 지반을 형성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허나 지금 한겨레21 특집기사 방식으로는 뉴칼레도니아식 환타지를 제공하거나 이미 형성된 네이션을 문을 애처롭게 두들겨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퇴행적 시도들을 넘어 마르크스주의와 인류학의 접점을 고민하는 이론적 시도들을 모아본다. 언제 기회가 된다면 이 주제로 세미나를 가져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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