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선생님이 제게 말씀하시길, 책을 한두 해 읽다보면 읽는 속도도 빨라지고 처음 읽는 것보다 이해도도 높아져서 똑똑해진다 하셨다.

 

15년이 넘어서야 스스로 깨달은 책에 대한 나의 경험은 이렇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바보로 만든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책에 배신당한 첫번째 사례로 난 내가 얼마나 바보인가를 책을 읽을 때마다 느낀다. 읽지 않을 때보다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말이다. 내가 아는 게 뭐 있지? 이게 무슨 말이야? 이거 한글인데 한글을 해석해야 되나? 읽을 때마다 명사, 동사를 검색하고 띄어쓰기를 확인하는 나는 바보가 틀림없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똑똑해진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국사를 배우지 못한 세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알고 있는 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아는 척하다가 인터넷 검색 한방으로 망신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것이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속물로 만든다.

자신을 하염없이 낮추며 책에 대해 겸손한 척, 사실은 앎이 얕은데도 많이 아는 척 얕은 행세를 하며 타인으로 하여금 책 읽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길 바라게 만든다.  책 읽는 속물이 바로 나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꼬리를 물게 만든다.

목로주점 한 권 읽었다고 다 번역 출간되지도 않은 루공마카르총서에 도전하는 것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게 만든다. 읽지 않은 책이 쌓여가는 이유다. 논어 한 권 읽었다고 읽지 않은 맹자, 중용, 대학이 책장에 꽂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삶이 피곤해진다.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 꼭 있다. 책 속에 언급된 이를 따라하다가 읽는 책에 따라 하루가 색다르게 피곤해진다. 경계하라. 삼가하라. 빈부를 떠나 시간은 평등하게 소비된다. 새로운 일은 지금 시작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하루 10분, 20년이면 몇 시간이고 년으로 따지만 몇 년이고... 피곤하다. 따라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 한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움직이게 만든다.

난 책을 읽으면 좀 더 정적이고 차분한 성격으로 바뀔 줄 알았다. 결과는 정반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장소가 실존하는 곳이면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달래지 못해 쩔쩔맸었다. 읽을수록 나에게 직접 경험을 강조하며 끝없이 나를 밖으로 밀어낸다.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다 읽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글자만 읽은 주제에 한 권을 다 읽었다고 뿌듯함에 만족하며 책을 덮어버리고 다시 찾지 않는다. 읽은 책 내용을 한달 안에 까먹지 않고 읊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 궁금하다. 난 정말 잘 까먹는다. 분명 1시간 전에 책을 다 읽었는데도 책 내용을 말해보라고 하면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한마디도 떼지 못한다. 텍스트를 읽었을 뿐 내용을 읽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 읽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리뷰를 남기지만 난 여전히 '다 읽었다'는 착각 속에 빠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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