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고려사절요 -상
민족문화추진회 옮김 / 신서원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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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 견훤이 고창군(경북 안동)을 포위하였으므로 왕이 가서 이를 구원하려고 예안진(禮安鎭)에 머무르면서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상 공선과 홍유(洪儒)가 아뢰기를 "만약 우리가 이기지 못하면 샛길로 가야 하고, 죽령으로 가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유금필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군사는 흉한 것이요, 전쟁은 위태로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죽을 결심을 하고 살려는 생각이 없어야만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적군 앞에 나아가 사워보지도 않고 먼저 패배할까를 염려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경북 안동)의 3천여 대중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가.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기를 원합니다" 하니 왕이 그 말에 따랐다.
유금필이 이에 저수봉에서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왕이 그 고을에 들어가서 유금필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은 경의 힘이다" 하였다.-61쪽

계축일에 왕이 정전에 나아가 문무백관을 모으고 예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냈다.
기미일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하의 예를 갖추어 뵙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임신일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과 백관을 모으고 일렀다.

짐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경들 역시 옳다 하니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상 굳이 거절하기는 어렵다.-74~75쪽

봄 정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혔다. 왕이 재앙을 물리치는 방법을 묻자, 사천대(천문 관측을 맏은 관서)가 "무엇보다 덕을 닦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했는데, 이로부터 항상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었다.-103쪽

신은 또 시무 28조를 기록하여 장계와 함께 별도로 봉하여 올립니다.-129쪽

여름 5월에 교서를 내렸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만약 모든 백성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면 오직 삼농(평지, 산, 택의 농사)의 일할 시기를 빼앗지 않아야 한다.-147쪽

11월에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고치고 유수(留守)를 두었다.-151쪽

3월에 교서를 내렸다.

천자는 7묘를 세우고, 제후는 5묘를 세워 공로가 있는 이는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이라 하며, 왼편에 모시는 이는 소(昭)라 하고 오른편에 모시는 이는 목(穆)이라 한다.-162쪽

서희가 또 아뢰기를 "거란의 동경부터 우리나라의 안북부에 이르는 수백 리의 땅은 모두 생여진에게 점거되었었는데 광종이 이를 빼앗아 가주(嘉州),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았으니 지금 거란군사가 쳐들어 온 것은그 의도가 이 두 성을 빼앗으려는 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고구려의 옛땅을 빼앗는다고 소리치는 것은 실상은 우리를 공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군사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대번에 서경 이북의 땅을 그들에게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의 땅 또한 고구려의 옛땅이니 욕심 많은 저들이 한없이 요구한다면 그대로 다 주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준다면 진실로 영원토록 수치가 될 것입니다. 원컨대 임금께서는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이 한번 싸움을 한 연후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165쪽

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손소녕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평남 안주)에 주둔하게 하였다.-250쪽

2월 초하우 기축일에 거란군사가 귀주를 지나니 강감찬 등이 동쪽 들에서 맞아 크게 싸웠는데 양편의 군사가 서로 버티어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하러 왔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고 깃발이 북쪽을 가리키자 우리 군사가 형세를 타서 분발하여 치니 저절로 배로 용기가 났다.-251쪽

시중으로 치사한 강감찬이 죽었다. 강감찬은 금주(衿州)사람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검소하여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이한 계략이 많았다. 형체와 외모가 작고 못생겼으며 옷은 때가 묻고 해져서 볼품은 보통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얼굴빛을 엄정하게 하여 조정에 서서 큰일을 만나면 큰 계책을 결정하여 우뚝 국가의 기둥과 주춧돌이 되었다.-285쪽

임진에 배다리가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 하다가 많이 빠져 죽게 되자 왕이 근심하여 특별히 유사를 시켜 배다리를 놓게 하니 이 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에 걸어다니는 듯 하였다.-3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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