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강수정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3월
품절


책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우리의 경험과 허구의 경험 사이, 그러니까 우리의 것과 지면에 실린 두 개의 상상 사이에 우연의 고리를 걸어야 할 것이다.-28쪽

위베르 니셍은 뇌가 거의 무한에 가까운 기억을 담고 있는 주름잡힌 두루마리 책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 책과 같은 정신.-38쪽

'그의 책은 천천히 읽어요." 영국인 환자가 한나에게 말한다. "키플링은 천천히 읽어야 해요. 쉼표가 있는 곳을 유심히 살펴야 숨을 돌릴 자연스런 지점을 찾을 수 있어요. 그는 펜과 잉크로 글을 썼던 작가거든요. 종이에서 수없이 고개를 들어야 했죠."-72쪽

오래된 이치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것, 모든 권력은 악용된다는 것, 광신은 어떤 것이든 이성의 적이라는 것, 선동은 불의에 맞서는 힘을 규합할 목적이라도 여전히 선동이라는 것, 전쟁은 신이 더 막강한 군대의 편이라고 믿는 승자의 눈에만 영광이라로 비친다는 것.

어쩌면 이게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 암흑의 순간에 책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글로 확인하기 위해.-88쪽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나는 당장이라도 누군가 내 겉모습을 꿰뚫어서 모든 비밀을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걸려서 추궁을 당한다면 생각마저도 그리 오래 감춰두지 못하고, 날카로운 탐정처럼 예리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온갖 종류의 금지된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아낼까봐 겁이 났다.-111쪽

6장의 말미에서 홈스는 (독일어로) 괴테를 인용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조롱하리라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추리소설은 조롱에 대한 가능성을 끌어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방해한다. 독자는 이미 믿음으로 개종하여 알기를 원치 않으며 더 큰 재미를 위해 기꺼이 속기를 원한다.-120쪽

에두아르가 소리 내어 읽으면서 샤로테가 어깨 너머로 본다고 짜증을 내는 짧은 장면(그리고 지적인 성찰)에는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이 모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글을 읽어준다면 그건 뭔가를 말로 설명하는 것과 똑같은 것 아니야? 손으로 썼거나 인쇄된 글자들이 내 감정과 의도를 대신하는 것이고. 만약 내 이마나 가슴에 창이 있어서 내 생각이나 감정을 차근차근 전해주고 싶은 대상이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안다면, 내가 애써서 알아듣게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읽은 걸 누가 어깨 너머로 보면 늘 내가 둘로 쪼개진 느낌이 든단 말이야."-149쪽

침대 옆에 쌓아둔 책들은 내가 잠을 자는 동안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는 것 같다. 불을 끄기 전에 책 한 권을 넘기면서 한두 구절을 읽은 다음 내려놓고, 또 다른 책을 집어 든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면 그 책들을 다 알게 된 것 같다.-158쪽

수업 시간에 진도를 따라가는 것과 혼자서, 그것도 나무 아래서 책을 읽는 건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예를 들어, 보좌신부와 이발사가 더 이상의 미친 짓을 막기 위해 벽을 발라버리기로 한 돈키호테의 서재에 대해 레르네르 선생님이 꼼꼼하게 설명하시던데 기억난다. 그런데 혼자 읽었을 땐, 늙은 기사가 자다 말고 일어나 책을 찾으러 갔는데 그 방을 찾지 못하는 부분에서 거의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내게 그건 악몽 그 자체였다. 잠에서 ƒ틴?책을 보간했던 방이 사라졌음을 발견하고 더 이상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에 휩싸이는 것. 그레고르 잠자는 변신을, 자아의 상실을 받아들인다. 돈키호테는 그러는 대신, 계속 돈키호테이기 위해 사악한 마법사가 서재를 사라지게 했다는 설명을 씩씩하게 받아들인다. 환상을 가정함으러써 그는 상상 속의 자아를 충실히 간직한다.-184쪽

다른 사람 책이 집에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차라리 책을 훔치거나 당장 돌려주는 편이 낫다. 빌려온 책을 어쩐지 그만 가줬으면 하는데도 눈치 없이 앉아 있는 손님 같다.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책을 읽으면 개운치 않은 느낌, 즐기다 만 느낌이 든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마찬가지다.-199쪽

세이 쇼나곤은 전한다. "세상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단 한 순간도 더 못살 것 같고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가 있 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어쩌다 미치노쿠 종이 같은 질 좋은 흰 종이, 또는 장식이 들어간 종이라도 얻게 되면 상황을 조금은 더 그냥 참아줄 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는다."-232쪽

가끔 글로 생각을 표현하려 하는데 단어들이 정확하게 자리를 잡아 신기할 때가 있다. 생각의 타래가 풀리면서 이미 정해진, 형태와 소리가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순서를 되찾아가는 것처럼. 마치 단어들이 맨 처음부터 어떤 형태로 모여 있었는데, 멀리 있을 때는 희미하게 윤곽만 보이다가 다가갈수록 또렷해지면서 이해할 수 있는 형태를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럴 경우, 글쓰기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뭔가를 분명히 바라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233쪽

세이 쇼나곤은 책읽기에 대해 말한다. "즐거운 일들이란, 아직 읽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발견하는 것, 또는 상권을 재미있게 읽은 책의 하권을 손에 넣는 것. 하지만 실망스러울 때도 많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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