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구판절판


스윈든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 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결혼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듯이 잠깐 토튼햄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면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년 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 (스윈든, 트랜미어, 요크, 월솔, 로더햄, 렉스햄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달리 할 수 있은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56~57쪽

나는 축구를 보면서 즐거워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것들이 다 즐거웠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축구에 빠져든 것이다. 내게 꼭 필요했던 것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행이 마구 몰려오는 곳, 가만히 서서 근심에 사로잡힌 채 풀이 죽어 있을 곳이었다. 나는 울적했고, 아스날을 보고 있을 때면 잠시나마 울적한 속마음을 꺼내어 바람을 쐬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69~70쪽

여기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고한 신념(여기서도 이런 운명에 대한 소신을 자만심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거스 시저는 자만한 축구선수가 아니었다.)을 가진 지망자들에게 보내는 무시무시한 교훈이 담겨 있다. 소극장에서 연주한 경험이 있는 팝 밴드가 언젠가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연주하고 잡지 표지를 장식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듯이, 대형 출판사에 보낼 원고를 완성한 작가가 2년만 있으면 부커 상을 타게 될 거라고 생각하듯이, 거스도 자신의 실력을 믿었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에 대한 예감을 믿고, 그것이 보내주는 힘과 의지가 혈관 속에 헤로인처럼 퍼지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318~3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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