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구판절판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상대방과 그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게 되면, 나는 새삼스럽게 말이라는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머리가 번잡스러워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 위해 낭비되는 팽대한 말들이 내게는 너무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때문이다. 내 가슴속에 감춰진 이 체념은, 이해시키고자 하는 정을 쾌불쾌의 정에 간단히 연결시키고 만다. 일상적인 단 한줌의 쾌를 위해 많은 말을 사용하는 것을, 나는 치졸하게 여기는 것이다.-60~6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삼 유스타스의 쇠약에 흥미를 가진 것은, 그거시 너무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인 듯이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쇠약은, 단지 한 성직자가 신앙에 무지몽매한 민중의 생활로 추락해버렸다는 의미만을 가지는 것일까. 아무래도그렇게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보다 극심한 타락에서 진부한 타락으로' 쇠약해지고 만 것처럼 보였다. 보다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본질적인 타락에서 주변적인 타락으로' 쇠약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는, 극히 최근에 유스타스 개인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주 이전부터 우리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만, 꼭 그렇게만 여겨졌던 것이다.-100쪽

그건 두려움이었다. 단지 미지의 어둠에 대한 불안 때문만이 아니라, 그곳에 예비되어 있을 것만 같은 무언가 부드럽게 나를 유혹하는 듯한 힘, 어떤 그윽한 아름다움 같은 것을 향한 호기심이 몰고 오는 까닭 모를 두려움이었다. 거기에서 달아나려 할수록 한층 더 그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이 내 안에서 무서운 기세로 차올라오고 있었다.-114쪽

이 안드로규노스는, 젊음이라는 것이 가지는 어떤 명쾌함을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젊음 자체는 아마도 몇백 년 몇천 년이라는 광물적인, 느릿하기 짝이 없는 성장을 통해, 말하자면 '늙음'으로써 얻어진 것이리라. 그것에 드러난 명확함에는 벌써 이면으로부터 노회한 회닉이 다가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123쪽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인간이 행하는 바 어떤 결과가 오직 한 가지의 원인에 반드시 귀착된다고 하는 단순한 낙관주의를 점점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미묘한 카오스(혼돈)에 의한 것이며,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찾아낸 원인이라는 것은, 유기적인 카오스로부터 조금 떼어온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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