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공 상태나 다름없는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것이 축복이라고 했다. 하지만 축복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다. 두 개의 언어와 두 개의 문화를 알고 있으면 가슴속에 두 개의 세계가 담겨 있어야 하는데, 수지는 언제나 허전함을 느꼈다. 마치 한쪽 문화를 사랑할 줄 알아야 다른 쪽 문화도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았다. 문화에 대한 지식이 쌓여도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데미안이 '축복'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녀를 영원한 주변인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어느 쪽 문화에도 감동받지 않고 어느 쪽 문화에도 속하지 않는 진공 속에 살았다.-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