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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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슬로우리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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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박피》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먼저 떠오른 생각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이미지였다. 피부는 우리 몸을 가장 먼저 감싸고 있는 표면이지만, 피부 아래에는 근육과 혈관, 장기처럼 훨씬 복잡하고 연약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박피’라는 단어는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그 아래 감춰진 욕망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성형외과 의사 지호와 그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만들어낸 AI 리얼돌 ‘성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성미는 지호가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준다.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절과 갈등, 실망과 오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성미는 리얼돌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처럼 다가왔다. 지호가 만든 것은 어쩌면 ‘완벽한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관계였던 것은 아닐까.

현실의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다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와 다른 생각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때로는 나를 거절하기도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과 예측할 수 없음이 인간관계를 인간관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호가 성미에게 점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편안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나를 거절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얼마나 달콤할까. 하지만 그 편안함이 현실의 관계를 견디는 힘을 오히려 빼앗아간다면 어떨까.

책 속에서 성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모든 영혼을 걸고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자기 왜 그래?”
“당신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아니, 애초에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였지.”

이 장면은 《박피》가 독자에게 하고자 하는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같은 것일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며,
내가 외롭지 않도록 언제나 곁에 있어준다고 해도 그 존재에게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맞춰 완벽하게 만들어진 존재를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성형외과라는 공간과 성미의 존재가 연결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성형은 외모를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깝게 바꾸는 행위이고, 지호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연인의 모습과 반응까지 만들어낸다.
몸의 표면을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 관계의 상대방까지 ‘맞춤형’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함일까.

책을 읽으며 알고리즘도 떠올랐다. 오늘날 검색하고, 영상을 보고,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자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끊임없이 추천받는다.
불편한 것은 조금씩 멀어지고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이 내 화면을 채운다.

성미가 어쩌면 이런 세계의 극단적인 형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나를 거절하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상대방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때로는 내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사랑은 피곤하고 어렵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관계는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실수하며 살아. 이 세상에 완벽한 관계가 어디 있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거야. 가끔은 스스로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를 때가 있잖아.”

완벽한 관계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꾸 완벽한 관계를 꿈꾸게 된다.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나를 안아주는 사람을 바란다.
하지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사랑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지호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하면서 발생하는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미는 지호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인 동시에 그의 외로움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최첨단 기술과 무속신앙이 한 작품 안에서 충돌한다는 점이었다. 지호는 AI라는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과 욕망을 통제하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무당의 말 앞에서는 흔들린다.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라뇨?"

이 문장은 작품의 분위기를 조금 더 넓은 영역으로 끌어가는 듯했다.
인간은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처럼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박피》 속 지호의 불안은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의 불안처럼 느껴졌다.

팬데믹이라는 배경도 이러한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 사람 사이의 단절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립감을 경험하게 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호가 현실의 관계 대신 자신에게 맞춰진 존재를 선택한다는 설정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람과 만날 수 없고,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워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던 시대에 ‘나를 절대 거절하지 않는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것을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작품의 공포는 미래의 어느 날 갑자기 AI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식의 공포와는 조금 다르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 인간과 관계 맺는 일을 점점 어려워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를 사랑하게 될까.

🔖“말씀하시던 여자친구가 이게 맞나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것’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것. 너트와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생명이 없는 기계.”

‘사람’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성미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다. 지호에게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성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에서 타인을 얼마나 쉽게 역할이나 기능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사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처럼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순간은 없었을까.

그런 점에서 ‘AI 리얼돌’이라는 낯선 소재는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장치가 된다.

《박피》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기술 그 자체를 악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에 있다. 기술은 외로움을 덜어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나에게 맞춰진 존재’를 만드는 것이라면, 점점 타인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랑에는 상대방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자유.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자유.
때로는 나를 떠날 자유.
그 불편한 자유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면, 성미와의 관계는 사랑의 가장 편안한 부분만 남겨놓고 가장 어려운 부분을 제거한 관계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불완전한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게 됐다.
실수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대화하는 관계.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곁에 남아 있는 관계.
그런 관계는 분명 피곤하고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내가 원하는 사람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피》라는 제목이 마지막까지 의미심장하게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표면을 만든다. 아름다운 얼굴, 성공한 모습, 괜찮은 척하는 표정, 행복해 보이는 관계. 하지만 그 표면을 한 겹씩 벗겨내면 그 아래에는 외로움과 불안, 욕망과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

지호 역시 그랬다. 겉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결핍이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마음에 남은 건 것은
오히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의미였다.

나를 언제나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항상 해주는 사람도 없다. 때로는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
그런데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롭지 않고 싶다는 마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욕망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너무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순간,
오히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타인의 불완전함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 소설이 벗겨낸 가장 깊은 피부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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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
박지선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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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단맘 (@gbb_mom ) , #르온서평단 을 통해 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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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데 있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인공지능,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반려 로봇, 신체의 상당 부분을 기계로 바꾸는 기술. 《루미너스》는 그런 미래를 아주 멀리 있는 상상처럼 펼쳐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낯선 미래보다 지금 살아가는 현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일 이후의 한국이라는 배경이었다. 전쟁의 상처와 사회적 갈등, 계층과 지역의 격차, 북한 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둘러싼 반목까지 남아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래서 《루미너스》의 미래는 한쪽에는 고도로 발달한 로봇 기술과 부유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버려진 로봇을 해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오히려 새로운 빈곤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미래의 기술은 달라졌지만 인간이 가진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미래에는 무엇이 가능할까?'보다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루미너스》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로봇이 인간의 삶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소하고, 일을 돕고,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고, 반려동물이 되어주고, 심지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진 로봇까지 등장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를 우리는 어디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특히 책 속의 문장,
🔖“우리는 너희가 사랑하는 걸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어.”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로봇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편리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를 로봇이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로봇을 제공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가족을 닮은 로봇을 만들어주고, 늙어가는 몸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상실을 극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돈으로 구매하는 것일까.

책 속 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부분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로봇처럼, 슬픔에도 당혹스러운 매뉴얼이 따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를 가든 자본주의가 슬픔의 언어가 됐다.”라는 문장 역시 오래 남았다.

이 부분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을 때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슬픔을 견디는 대신 새로운 무언가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정말 치유일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슬픔마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루미너스》를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로봇의 존재보다 시간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얼굴이 달라지고 몸이 약해지고 기억도 조금씩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 역시 변한다. 그런데 바로 그 변화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함께 보낸 계절이 쌓이고, 어느 순간 사진 속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오래 함께했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런데 시간이 멈춰버린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모두가 나이를 먹고 변해가는데 한 사람만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삶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원한 이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요라는 존재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그는 기계이지만 작품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며,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테세우스의 '배'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도 떠올랐다.

🤔 부품을 하나씩 모두 교체한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일까.

그 질문을 인간에게 가져온다면 더 복잡해진다.
우리의 세포는 계속 변하고, 몸은 늙고, 기억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은 몸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관계일까.

나는 그 답이 관계와 시간에 조금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책의 첫 장면은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청소부가 로봇의 잔해를 빗자루로 쓸어서 치웠다. 미소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통만 보도 위에 남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더위가 심상치 않다고 재잘재잘 경고하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치워버리는 사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책이 보여주는 미래가 얼마나 기묘한지 느껴졌다.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쓰레기처럼 치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머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날씨를 알려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로봇의 비극보다 오히려 인간의 익숙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로봇이 일상에 들어오면 인간은 그들에게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익숙함은 때때로 존중을 지워버린다.
'매일 보는 존재라는 이유로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것.'
사람에게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다.


《루미너스》에는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사랑, 가족, 희생, 기억 같은 것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감정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받고 싶으면 맞춤형 로봇을 구매하고, 외로우면 반려 로봇을 들이고, 잃어버린 존재를 잊기 싫다면 기억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로봇에게 인간성을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로봇에게서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일까.


특히 작품 속에서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준과 로봇을 만드는 모건,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로봇의 육체를 갈망하는 뤼지예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같은 질문으로 한데 모인다.

몸이 인간을 결정하는가? 몸의 일부가 기계가 되면 인간이 아닌가.
반대로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가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린다면 여전히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의 몸이 아닌 로봇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끝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특히 섬뜩했던 것은 전쟁 기계에 관한 부분이었다.
기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될 거야, 로봇들이 우리보다 일을 더 잘해서, 실수로 우리를 멸종시키고 나중에 미안하다며 이런 형편없는 전시나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과장된 미래의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역할이 어디까지 남게 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루미너스》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로봇에게 점점 더 많은 역할을 맡기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깨닫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도 대신하고, 돌봄도 대신하고, 노동도 대신하고, 감정적인 위로까지 대신한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것과 인간의 삶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책은 그 경계선을 아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서 언급된 토끼 이야기가 무척 오래 남을 것 같다.
인류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 과정에는 언제나 기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누구를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가. 누구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생명과 고통에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누구의 고통은 쉽게 외면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구분한다.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안전한 사람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우리 편과 남의 편.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인가.


통제받는 미래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너무 편리해서 스스로 선택을 포기하게 되는 미래도 위험할 수 있다.

외로움을 견디지 않아도 되고,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늙어가는 몸을 바꿀 수 있고, 가족의 빈자리를 로봇으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더 행복해질까.

인간다운 삶에는 불편함과 결핍, 상실과 슬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루미너스》를 읽고 난 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까지 기술에게 맡겨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책을 덮은 뒤,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또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는 듯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같은 집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계절을 지나고, 같은 장소를 걷고, 서로의 얼굴에 생긴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시간이 멈춘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혼자 남는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등장해도 함께 살아온 시간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기억을 복원할 수 있고, 얼굴을 재현할 수 있고,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함께 먹는 한 끼.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은 계절을 지나가는 것. 서로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미너스》는 로봇과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가족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고, 통일 한국이라는 미래를 통해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가 완전히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차별도 존재하고, 계층도 존재하고, 전쟁의 상처도 존재하며,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마음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래를 바꾸는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이 결국에는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루미너스》를 읽으며 미래의 로봇이 인간처럼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의 인간이 과연 얼마나 인간다운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오더라도,
함께 살아온 시간까지 복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장 가까운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미래를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떠올랐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SF가 이렇게 오래 현재의 마음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루미너스》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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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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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를 떠올리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수많은 괴물과 신들, 바다 위에서 펼쳐지는 모험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트로이아 전쟁을 끝낸 한 영웅이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세월을 떠돌고, 수많은 죽음과 유혹과 상실을 지나 마침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뒷세우스의 여정은 먼 옛날의 영웅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이라는 길을 걷고 있는 독자 자신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작품이 처음부터 오뒷세우스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귀향을 둘러싼 이야기는 다른 인물들의 삶에서 시작되고, 텔레마코스의 성장과 함께 오뒷세우스의 부재가 더욱 선명해진다.

오뒷세우스가 없는 집에서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서고, 페넬로페는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다. 그러다 마침내 오뒷세우스가 등장했을 때, 그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고향이라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왕으로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까지 되찾아야 했다.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귀향'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뒷세우스의 긴 항해가 오래전 그리스의 한 영웅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끝내 돌아가려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살다 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길로 너무 멀리 떠밀려 갈 때가 있다. 내가 원했던 삶과 실제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도 하고, 수많은 선택과 실패를 거치면서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흐릿해질 때가 있다. 수없이 낯선 장소와 관계와 상황을 지나고, 때로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을 견디며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정말 돌아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우스가 긴 방황 끝에 이타카를 향하는 모습은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아가는 과정'처럼 읽힌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트로이아 전쟁이 있고, 각자의 키르케와 세이렌이 있으며, 아무리 멀리 돌아가더라도 결국엔 자신이 돌아가야 할 곳을 찾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오뒷세이아》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번역'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이나 정신, 분별력처럼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받아들일 만한 표현을 이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살려 '횡격막'이라고 옮겼다.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다. '횡격막에 담즙이 솟구친다'는 표현도 현대의 독자인 나에게는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그 낯섦 때문에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현대인은 생각과 감정을 주로 머리나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오늘날과는 다른 신체적 개념으로 이해했다. 이를 현대적인 말로 매끄럽게 바꿔버린다면 읽기는 편해질지 모르지만, 그 시대의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던 방식까지는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번역은 '낯선 세계를 낯선 모습 그대로 만나게 하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특히 🔖“‘횡격막에 담즙이 솟구친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흔히 '화가 날까 봐'라고 바꿔버릴 법한 표현을 그대로 살려 놓으니, 정말 오래된 시대의 인간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낯섦은 불편함이라기보다 시간의 거리였다. 책을 읽으면서 그 거리를 억지로 좁히기보다 잠시 그 낯선 세계에 머물러 보는 것이 《오뒷세이아》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를 내게 말하라, 무사여, 곡절 많던 그는 아주 많이 / 떠돌아다녔다,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함락한 후에.”

오뒷세우스는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완벽함에 있지 않다. 그는 실수하고, 자만하고, 동료를 잃고,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다시 길을 나선다. 인간의 위대함은 넘어지고도 다시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찾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문장에서 특히 '떠돌아다녔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영웅의 삶을 한 단어로 압축한다면 어쩌면 '방황'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큰 파도가 몰고 다녔다, 흐름을 따라 이리저리.”

이 장면에서는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강하게 느껴졌다.

바다는 사람을 어디까지 데려갈까? 바다 위에서는 인간의 힘이 너무나 작다.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파도와 바람 앞에서는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오뒷세우스의 여정이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것을 이겨내는 초인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이다.

삶도 그렇다.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때로는 아무리 애써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닥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 위에 서게 된다. 중요한 것은 바람이 불어오는 상황에서도 다시 방향을 찾는 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귀향은 '수없이 방향을 잃고도 다시 돌아가는 과정'으로 읽힌다.


오뒷세우스에게 가장 큰 적은 괴물만이 아니었다.
그를 붙잡았던 것은 때로 유혹이었고, 때로 망각이었으며, 때로는 자신의 자만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못된 일은 잘 되는 법이 없지. 느린 자도 빠른 자를 잡는 법.”이라는 문장도 그런 인간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듯했다.

오뒷세우스가 강한 사람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때로는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다리고, 속이고, 변장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이 문장은 세상에서 모든 일이 즉각적으로 결판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빠르다고 반드시 이기는 것도 아니고, 늦다고 반드시 지는 것도 아니다.

오뒷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 삶에서도 어떤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그런 의미에서 《오뒷세이아》는 조금 이상하지만 중요하다고 느끼는 질문을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정말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을 알고 있는가?

목적지가 분명하다면 아무리 긴 방황도 여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걸어도 그저 떠돎에 머물 수 있다.
오뒷세우스가 끝내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었던 힘 가운데 하나는, 수많은 유혹 속에서도 이타카를 잊지 않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또 하나의 문장.
🔖“죽음이란 모두에게 동등한 것, 신들이라도 사랑하는 남자에게서조차 그것을 막아 줄 수는 없지”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가. 이 문장은 오뒷세우스가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 해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운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오뒷세이아》에서 인간은 신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방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는 인간의 힘에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오히려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고 느꼈다.

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시간이 중요하다. 언젠가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누군가 죽었을 때 살들도 뼈들도 힘줄들이 더 이상 꽉 잡아 주지 못하고, 그것들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강력한 기세가 제압한단다, 일단 기개가 하얀 뼈를 떠나고 난 다음엔, 그러면 넋이 꿈처럼 푸드덕거리며 빠져나와 날아다니지.”

이 문장 역시 현대적인 표현과는 상당히 다르다. 죽음을 추상적인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않으며, 육체와 넋이 분리되는 모습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읽으면서 죽음이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았다는 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오뒷세이아》에는 영웅적인 순간도 있지만, 그만큼 죽음과 상실이 반복된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이 값진 이유도 그가 무언가를 얻기만 한 여정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여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귀향은 살아 돌아온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까지 함께 품고 있는 이야기다.


책을 읽고 난 뒤 오뒷세우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오뒷세우스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인물이 페넬로페였다.

오뒷세우스가 세상을 떠돌며 싸우고 살아남았다면 페넬로페는 같은 장소에서 기다리며 자신의 삶을 지켜냈다. 움직이는 사람만이 용감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자리를 지키는 일 역시 엄청난 인내와 지혜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책 속의
🔖“얼마나 좋은 횡격막이 있는가, 흠 없는 페넬로페에겐, / 이카리오스 딸에겐, 얼마나 잘 기억했나, 오뒷세우스를” 이 구절이 기억에 남았다.

페넬로페는 남편을 기다리는 여성으로만 비춰진 것이 아니라,
내게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기억과 판단을 지켜낸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오뒷세우스가 돌아왔어도 모든 것이 단숨에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고, 서로가 겪은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재회가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귀향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변해버린 시간을 다시 건너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닐까.


수천 년 전 만들어진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계속 읽히는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어도 인간이 겪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비슷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떠나고, 길을 잃고, 유혹받고, 실패하고, 누군가를 잃고,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내가 정말 원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품으며 산다.

오뒷세우스는 그래서 고대 그리스의 영웅이면서 동시에 아주 현대적인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가 괴물과 싸우는 장면보다 길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들이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오뒷세이아》를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귀향'이라는 단어였다.

사람은 태어나면 어딘가를 향해 살아가지만, 그 목적지가 언제나 분명한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그랬다. 때로는 남들이 정해준 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한참을 돌아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언젠가 내가 진정으로 돌아가고 싶은 곳을 알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방황 역시 완전히 헛된 시간은 아닐 것이다.

오뒷세우스는 긴 여정을 통해 수많은 죽음과 상실, 유혹과 실패를 지나온 뒤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오뒷세이아》의 마지막은
긴 여정을 지나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고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는지를 마주하는 과정의 완성처럼 느껴진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각자의 이타카가 있을 것이다.
아직 그곳이 어디인지 모를 수도 있고, 너무 멀리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이라는 항해에서 중요한 것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은 순간에도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을 완전히 잊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책을 덮으며 오뒷세우스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잘 돌아왔다고...

그리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묻고 싶어진다.

지금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이타카는 어디일까.

인생에서 가장 긴 여행은 세상을 돌아다니는 여행이 아니라,
수많은 경험과 상실과 선택을 지나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인간은 여전히 길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돌아갈 곳을 찾는다.

그래서 《오뒷세이아》는 앞으로도 수많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타카를 떠올리게 하는 명저로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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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호메로스 #김헌 #을유문화사
#그리스신화 #그리스로마신화 #고전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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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 - 한 번뿐인 아름다운 삶에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진정으로 믿는 법
제이미 컨 리마 지음, 허선영 옮김 / 알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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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알레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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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왜 항상 부족하다고 느낄까?”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이루면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 될 것처럼 살아간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돈을 더 벌면, 원하는 몸을 갖게 되면,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면 그때는 나 자신을 조금 더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 나면 또 다른 기준이 눈앞에 놓인다.
‘이것만 이루면 괜찮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어느새 ‘그다음에는 이것을 해야 해’라는 마음으로 바뀐다.

문제는 충분히 이루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제이미 컨 리마 저자 역시 눈부신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지만, 성공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족함까지 해결해주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이 책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어떤 조건이 붙지 않아도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들여다보게 하는 책에 가깝게 다가왔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저자가 자신감과 자존감을 구분하는 방식이었다.
자신감은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라면, 자존감은 잘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내가 여전히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에 가깝다. 그래서 자신감은 성과와 환경, 타인의 평가에 따라 쉽게 흔들릴 수 있지만 자존감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곳에 자리한다.

책에서는 이를 집에 비유한다. 자신감이 집을 지어 올리는 것이라면 자존감은 그 집을 받치는 토대와 같다는 설명이다. 이 비유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사람들은 자신감을 키우기 위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고, 성과를 만들어내려고 한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아무리 멋진 집을 지어도 토대가 약하다면 작은 흔들림에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나는 실패해도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면 실패를 경험했을 때조차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자존감은 ‘나는 최고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힘에 더 가깝다.


특히 마음 깊숙이 들어온 부분은 책 속 질문이었다.

🔖“누군가가 당신을 거부했을 때,
열심히 했는데도 실패했을 때,
혹은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때,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요?”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에 덧붙이는 해석 때문에 더 아파할 때가 많다.

‘이번에는 안 됐구나’가 아니라 ‘역시 안 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구나’가 아니라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실패했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자야’까지 나아가 버리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어쩌면 고통받는 많은 순간에는 사건과 자기 가치 사이에 필요 이상으로 강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절은 하나의 사건이고 실패 역시 하나의 경험일 뿐인데, 그것을 너무 쉽게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 번의 실패가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오래된 믿음을 다시 확인해주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는 “당신은 미친 게 아니라 처음일 뿐이다”라는 문장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처음 해보는 일 앞에서 서툰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처음 거절당했을 때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처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두려운 것도 당연하다.

서툼을 결함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 역시 자존감을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또 하나 오래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목표 체중이 되기를 기다리지 마라’는 이야기였다. 외모뿐 아니라 삶의 여러 영역에서 끊임없이 ‘~하면 그때 시작하겠다’고 말한다.

조금 더 날씬해지면 사진을 찍고,
조금 더 자신감이 생기면 사람들을 만나고,
조금 더... 조금 더...

그런데 이렇게 조건을 하나씩 붙이다 보면 삶은 계속 미래형으로 남는다.
책 속에서 저자는 몸에 대한 자기 제한적 믿음 때문에 놓칠 수 있는 수많은 순간들을 떠올린다. 수영을 함께할 시간, 여행과 추억, 사람들과의 유대감처럼 지금 당장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내가 충분히 괜찮아진 다음’으로 미뤄지는 것이다. 이 부분은 외모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고 느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된 다음에야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미래의 완성된 나를 위해 현재의 나를 자꾸 희생한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언제나 또 다른 기준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래서 p.109의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은 자유로움 그 자체다.”
라는 문장이 특히 오래 남았다.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었던 모습을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책은 개인적인 자존감의 문제를 넘어 여성이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과 존재감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는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여성이 단호하게 행동하면 ‘공격적’이라고 평가받고, 같은 행동을 남성이 하면 ‘자신감 있다’고 평가되는 이중적인 기준에 대한 이야기는 사회에서 여전히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특히 ‘돋보이면 쫓겨날 것이다’라는 믿음은 여성 리더의 문제만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괜히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고내가 잘하는 것을 일부러 낮춰 말하고,
칭찬을 받아도 “별거 아니에요”라고 넘기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다른 사람이 편한 쪽을 선택하는 것.

그렇게 해서 갈등은 줄어들 수 있지만, 동시에 나 자신의 존재감까지 줄어들 수 있다.

책 속 p.113의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으려면 당신은 당신이 되어야 하고, 당신이 진정한 당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라는 문장이 이 부분과 정확하게 맞닿아 있었다.

진짜 관계는 내가 만들어낸 ‘괜찮은 사람’과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나와 맺어지는 관계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받기 위해 끊임없이 나를 수정하는 삶은 가장 중요한 사람인 나 자신과의 관계를 잃게 만들지도 모른다.


🔖“자신과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진짜 모습을 온전히 보고,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또한 이 문장을 읽고 나니 자존감이라는 단어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다.
자존감은 거울 앞에서 매일 “나는 소중해”라고 외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내가 질투하는 모습도 보고, 실패해서 초라해진 모습도 보고,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는 모습도 보고, 상처받고 화내는 모습도 보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모습까지 바라보면서
‘그래도 너는 나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어쩌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의 시작일 것이다.


책을 읽으며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타인에게 가격표를 붙인다.

직업이 무엇인지, 얼마나 벌고 있는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몇 명에게 사랑받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순간 그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한다.

하지만 인간의 가치를 성취의 합계로 계산한다면 평생 불안할 수밖에 없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내 가치가 줄어들고, 실패하면 또 줄어들기 때문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충족감 = (자신감 × 성장 × 기여) × 자아 가치’ 라는 공식 역시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자아 가치가 0이라면 다른 요소가 아무리 커도 결과가 0이 된다는 설명이다.

물론 인간의 행복과 충족감을 실제 수학 공식처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성과와 성장만으로는 내면의 충족감을 완성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비유적인 공식으로 읽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많이 이루는 것과 나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느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은 가치 있다. 당신은 사랑이다. 사랑은 이미 당신이다.”

는 처음에는 선언하는 것처럼 들렬지만, 책 전체를 읽고 나니 이 문장이 왜 마지막에 놓였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에게 들려왔던 ‘나는 부족하다’라는 목소리를 하나씩 의심해본 끝에 도달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지 못한 순간에도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

누군가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선택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한 번의 실패가 나의 전체를 설명할 수도 없다.

p.318에 소개된 틱낫한의 문장,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필요는 없다. 당신은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역시 같은 맥락에서 오래 남는다.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은 너무 자연스럽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간에게 당연한 욕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타인의 인정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것보다, 타인의 인정이 내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도록 내어주지는 말자는 의미로 읽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나의 가치》를 읽고 난 뒤
아주 평범한 하루에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실수했을 때 나는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거절당했을 때 나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한 부분만 찾아내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나를 인정해주겠다고 미루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

자존감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주 작은 선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책 속 p.322의
🔖“매일 아침 일어나서 어제보다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면 그 작은 부분들이 누적될 것이다.” 라는 문장처럼.

작은 변화들이 쌓여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의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이것이 《나의 가치》가 말하는 가장 중요한 변화일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데서부터 더 나은 삶이 시작된다는 것.

때로는 자신감이 넘치다가도 아주 작은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때마다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거절은 나의 가치에 대한 판결문이 아니고, 실패는 나의 존재에 대한 평가가 아니며, 타인의 기준은 나를 정의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무언가를 증명한 뒤에야 가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오늘도 어딘가에서 ‘나는 아직 부족해’라고 생각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그리고 가끔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게도 이 책의 마지막 메시지를 건네고 싶다.

당신은 가치 있다.
당신은 충분하다.
그리고 지금의 당신으로도, 삶을 시작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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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성공학 #인생지침서 #인간관계 #신간 #신간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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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
페마 초드론 지음, 신동숙 옮김 / 윌마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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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요조앤 ( @yozo_anne ) 님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윌마 ( @wilma.pub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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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힘들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후회되는 기억은 지워버리고 싶고, 불안한 미래는 미리 통제하고 싶으며, 관계에서 생긴 상처는 빨리 아물기를 바란다. ‘조금만 더 나아지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의 나를 끊임없이 고치려 한다.

그런데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는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안에 머무르는 법을 이야기한다. 괴로움을 삶의 실패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 순간이 나 자신과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자리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특히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애에 대한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명상 수련은 자신을 버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친구처럼 다정히 돌보는 연습입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해왔던 것은 아닐까 싶었다. 종종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부족한 자신을 끊임없이 수정하려 한다. 더 부지런해야 하고, 더 긍정적이어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하며,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마 초드론이 말하는 자애는 그런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화를 내고, 겁을 먹고, 질투하고, 스스로 초라하게 느끼는 순간까지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완벽해진 다음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지금의 나를 돌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수행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실수에는 유난히 가혹하다. 다른 사람의 상처에는 충분한 시간을 허락하면서 자신의 슬픔에는 빨리 털어내라고 재촉한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당장 달라지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또 하나 깊게 남은 가르침은 무상과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라는, 무상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점차 자유의 길로 이끕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것을 원한다. 사랑도, 관계도, 건강도, 익숙한 일상도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가 찾아올 때마다 그것을 붙잡으려 한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예전의 나를 붙잡고, 떠나가는 관계를 붙잡는다. 하지만 붙잡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큰 불안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책은 불확실한 상태에 그대로 머무르는 연습을 이야기한다.
고통스럽더라도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보는 것. 당장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고 지금 느끼는 감정과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 처음에는 무척 불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불편함을 견디는 순간부터 조금씩 알게 된다. 내가 두려워하던 감정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 지금의 고통 역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흔들리는 중에도 수행할 수 있다면, 이미 훌륭하게 익힌 것이다.”라는 문장이 더욱 와닿았다.

수행이나 마음공부를 생각하면 마음이 늘 평온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화가 나지 않아야 하고, 불안하지 않아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아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수행은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불안하면 불안한 나를 보고, 화가 나면 화가 난 나를 보고, 두려우면 두려워하는 나를 바라보는 것. 그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고 하지 않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공부가 조금 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책에서 소개하는 ‘세 가지 어려움을 수련하라’는 가르침도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병적인 상태임을 인정하고, 익숙한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며, 그것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실제 삶에서 변화하기 어려운 이유를 정확히 짚어주는 듯했다.

특히 첫 번째 단계인 내 마음의 문제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먼저 찾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익숙한 패턴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그 반복을 멈추기 위해 자신을 비난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기심으로 자신을 바라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럽게 타인에게로 향한다.
🔖“연민은 상처 입은 사람과 치유를 돕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에서 주고받는 감정입니다.”

연민이라고 하면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기고 도와주는 마음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연민은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당신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위아래의 관계가 아니었다. 나 역시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고, 두려워할 수 있는 사람이며,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래서 🔖“자신의 어둠을 잘 알아야만 다른 사람의 어둠에 함께할 수 있다.”는 책의 문장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의 상처도 조금 더 판단 없이 바라볼 수 있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인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도 결국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삶은 내가 노력한 만큼 반드시 보상해주지 않는다. 착하게 살았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사랑했다고 해서 모든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삶에 끊임없이 요구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렇게 노력했는데 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지만 삶이 반드시 내 기대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또 다른 고통을 만들어낼 수 있다.

책의 제목은 어쩌면 냉정하게 들리지만, 읽고 나면 오히려 묘하게 따뜻하다. 삶이 나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역설적으로 삶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고통은 형벌이 아니며, 기쁨은 보상이 아니랍니다.”

고통을 벌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스러운 현재를 어떻게든 없애려고 한다.
반대로 기쁨을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행복을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고통도 기쁨도 삶의 일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쁨이 영원하지 않듯 고통도 영원하지 않다.
모든 것은 변하고, 지나가고, 또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행복을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정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에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고, 평온과 불안이 함께 있으며, 상실과 새로운 시작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정리한 뒤에야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박수를 기대하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고도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애쓴 만큼 감사받기를 바라고, 한 만큼 상대도 돌려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당연한 마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기대가 커질수록 상대의 반응에 따라 내 마음도 흔들린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몰라주지?’

이 책은 선의를 베풀면서도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 연습을 이야기한다. 쉽지는 않지만, 타인의 반응에 내 마음의 평온을 맡기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말하는 자유는 원하는 것을 모두 얻는 데서 오는 자유가 아니다.
붙잡지 않아도 되는 자유,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완벽해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에 더 가깝다.

특히 🔖“편안함과 안전함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세계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자유입니다.”라는 문장에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안전해지고 싶어서 많은 것을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조금 편안해질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남은 여운은 ‘나를 바꾸려고 애쓰기 전에 나를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안한 나도, 때로는 무너지는 나도, 실수하는 나도 삶의 한 부분이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며 어떤 부분이 혼란스럽고 어떤 부분이 찬란한지, 무엇이 괴롭고 무엇이 즐거운지 알아내는 것은 단순히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세상을 이해하는 일과 연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의 끝에 다가갈수록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떤 경지라기보다 내가 경험하는 아주 평범한 순간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순간에도 도망치지 않는 것. 화가 난 순간에도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
상처받았을 때 나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 것. 그리고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어쩌면 이런 작은 연습들이야말로 삶을 대하는 태도를 조금씩 바꾸는 수행일 것이다.

《삶은 그대에게 잘해줄 의무가 없다》는 답을 서둘러 찾으려는 마음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책에 가깝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자꾸 다른 곳으로 도망치고 싶어진다.
“지금 도망치고 싶은 그것을, 정말 피하면 사라질까?”
결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잠시 그 자리에 머물러 보는 것은 어떨까.

발밑이 흔들려도 괜찮다. 완벽하게 평온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직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해도 괜찮다.
흔들리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타인의 아픔에도 조금 더 마음을 열어보는 것.

그렇게 한 걸음씩 마음을 닦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토록 찾고 있던 평온은 고통이 모두 사라진 뒤에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있는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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