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너스
박지선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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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단맘 (@gbb_mom ) , #르온서평단 을 통해 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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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데 있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인공지능,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반려 로봇, 신체의 상당 부분을 기계로 바꾸는 기술. 《루미너스》는 그런 미래를 아주 멀리 있는 상상처럼 펼쳐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낯선 미래보다 지금 살아가는 현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일 이후의 한국이라는 배경이었다. 전쟁의 상처와 사회적 갈등, 계층과 지역의 격차, 북한 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둘러싼 반목까지 남아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래서 《루미너스》의 미래는 한쪽에는 고도로 발달한 로봇 기술과 부유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버려진 로봇을 해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오히려 새로운 빈곤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미래의 기술은 달라졌지만 인간이 가진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미래에는 무엇이 가능할까?'보다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루미너스》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로봇이 인간의 삶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소하고, 일을 돕고,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고, 반려동물이 되어주고, 심지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진 로봇까지 등장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를 우리는 어디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특히 책 속의 문장,
🔖“우리는 너희가 사랑하는 걸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어.”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로봇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편리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를 로봇이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로봇을 제공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가족을 닮은 로봇을 만들어주고, 늙어가는 몸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상실을 극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돈으로 구매하는 것일까.

책 속 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부분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로봇처럼, 슬픔에도 당혹스러운 매뉴얼이 따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를 가든 자본주의가 슬픔의 언어가 됐다.”라는 문장 역시 오래 남았다.

이 부분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을 때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슬픔을 견디는 대신 새로운 무언가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정말 치유일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슬픔마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루미너스》를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로봇의 존재보다 시간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얼굴이 달라지고 몸이 약해지고 기억도 조금씩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 역시 변한다. 그런데 바로 그 변화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함께 보낸 계절이 쌓이고, 어느 순간 사진 속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오래 함께했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런데 시간이 멈춰버린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모두가 나이를 먹고 변해가는데 한 사람만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삶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원한 이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요라는 존재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그는 기계이지만 작품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며,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테세우스의 '배'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도 떠올랐다.

🤔 부품을 하나씩 모두 교체한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일까.

그 질문을 인간에게 가져온다면 더 복잡해진다.
우리의 세포는 계속 변하고, 몸은 늙고, 기억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은 몸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관계일까.

나는 그 답이 관계와 시간에 조금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책의 첫 장면은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청소부가 로봇의 잔해를 빗자루로 쓸어서 치웠다. 미소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통만 보도 위에 남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더위가 심상치 않다고 재잘재잘 경고하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치워버리는 사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책이 보여주는 미래가 얼마나 기묘한지 느껴졌다.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쓰레기처럼 치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머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날씨를 알려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로봇의 비극보다 오히려 인간의 익숙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로봇이 일상에 들어오면 인간은 그들에게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익숙함은 때때로 존중을 지워버린다.
'매일 보는 존재라는 이유로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것.'
사람에게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다.


《루미너스》에는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사랑, 가족, 희생, 기억 같은 것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감정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받고 싶으면 맞춤형 로봇을 구매하고, 외로우면 반려 로봇을 들이고, 잃어버린 존재를 잊기 싫다면 기억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로봇에게 인간성을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로봇에게서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일까.


특히 작품 속에서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준과 로봇을 만드는 모건,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로봇의 육체를 갈망하는 뤼지예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같은 질문으로 한데 모인다.

몸이 인간을 결정하는가? 몸의 일부가 기계가 되면 인간이 아닌가.
반대로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가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린다면 여전히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의 몸이 아닌 로봇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끝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특히 섬뜩했던 것은 전쟁 기계에 관한 부분이었다.
기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될 거야, 로봇들이 우리보다 일을 더 잘해서, 실수로 우리를 멸종시키고 나중에 미안하다며 이런 형편없는 전시나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과장된 미래의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역할이 어디까지 남게 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루미너스》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로봇에게 점점 더 많은 역할을 맡기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깨닫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도 대신하고, 돌봄도 대신하고, 노동도 대신하고, 감정적인 위로까지 대신한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것과 인간의 삶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책은 그 경계선을 아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서 언급된 토끼 이야기가 무척 오래 남을 것 같다.
인류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 과정에는 언제나 기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누구를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가. 누구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생명과 고통에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누구의 고통은 쉽게 외면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구분한다.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안전한 사람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우리 편과 남의 편.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인가.


통제받는 미래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너무 편리해서 스스로 선택을 포기하게 되는 미래도 위험할 수 있다.

외로움을 견디지 않아도 되고,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늙어가는 몸을 바꿀 수 있고, 가족의 빈자리를 로봇으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더 행복해질까.

인간다운 삶에는 불편함과 결핍, 상실과 슬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루미너스》를 읽고 난 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까지 기술에게 맡겨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책을 덮은 뒤,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또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는 듯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같은 집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계절을 지나고, 같은 장소를 걷고, 서로의 얼굴에 생긴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시간이 멈춘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혼자 남는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등장해도 함께 살아온 시간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기억을 복원할 수 있고, 얼굴을 재현할 수 있고,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함께 먹는 한 끼.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은 계절을 지나가는 것. 서로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미너스》는 로봇과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가족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고, 통일 한국이라는 미래를 통해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가 완전히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차별도 존재하고, 계층도 존재하고, 전쟁의 상처도 존재하며,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마음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래를 바꾸는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이 결국에는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루미너스》를 읽으며 미래의 로봇이 인간처럼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의 인간이 과연 얼마나 인간다운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오더라도,
함께 살아온 시간까지 복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장 가까운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미래를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떠올랐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SF가 이렇게 오래 현재의 마음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루미너스》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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