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킴
에바 틴드 지음, 허여 셀린느 옮김 / 산지니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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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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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행기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이 문장은 《민 킴》이라는 책을 받아 읽기 전부터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 사람이 자신의 출생을 이렇게 표현한다는 것은 낯선 나라로 보내졌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삶의 출발점에서는 분리되고, 자신의 이름과 가족, 언어와 기억까지 다른 체계 속에서 다시 부여받아야 했던 한 인간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75년, 김남숙과 김미인은 다른 여덟 명의 아이들과 함께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다. 남숙은 에바가 되고, 미인은 꿀마이가 된다.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떠난 두 아이였지만,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 서로 편지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열두 살 무렵 연락이 끊기고, 무려 30년이 지나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 만남은 보통의 재회가 아니었다.

한 사람은 자신이 겪어온 삶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듣고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여성의 기억은 한 권의 책이 된다.

🤔 “왜 입양인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만 말해왔는가?”

이 책에서 느낀 것은 ‘입양’이라는 단어 하나로 너무 많은 삶을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입양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랑, 새로운 가족, 새로운 삶, 구원 같은 단어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실제로 입양을 통해 사랑과 안정된 삶을 얻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입양인의 경험을 대표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을 얻은 일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뿌리를 잃은 일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가족 안에서조차 폭력과 학대를 경험해야 했던 일이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감사해야 한다’는 말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겉으로 보면 선의에서 비롯된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을 계속해서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고통을 말할 권리를 빼앗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새로운 가족을 얻었으니 감사해야 하고, 다른 나라에서 살게 되었으니 감사해야 하고, 경제적으로 더 나은 환경에서 자랐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묻지 않는다. 더 나은 환경을 제공받았다는 사실과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민 킴의 이야기는 이 책을 입양 에세이나 성장담으로만 읽을 수 없게 만든다. 입양 가족 안에서 경험한 폭력과 학대, 그리고 그것을 말할 수 없었던 시간은 ‘새로운 가족을 얻었다’는 한 문장으로 절대로 지워질 수 없다.

더 아픈 것은 아이를 국경 너머로 보내는 과정에는 여러 기관과 서류와 절차가 존재했지만, 그렇게 보내진 아이가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장치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를 보내는 시스템은 있었지만 아이를 보호하는 시스템은 부족했다는 문제의식은 무겁게 다가온다.

그리고 또 하나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이름이었다.
김미인이라는 이름을 떠나 꿀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한 사람이 다시 자신의 이름을 찾는 과정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타인이 붙여준 정체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정의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름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나를 누가 불렀는지, 어떤 기억 속에서 자라났는지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 킴이 자신의 옛 이름을 되찾고 스스로를 새롭게 명명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은 자기 삶의 서술권을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못생긴 아이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변해 가는 시절을 맞았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으며 오히려 뒤에 이어지는 생각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외모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모델로 활동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예쁘다고 말해주어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어린 시절 반복해서 ‘다르다’고 느꼈던 경험. 즉, 피부색과 얼굴 생김새, 언어와 문화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매일 자신의 존재가 주변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동양적으로 예쁘다”는 칭찬이었을 말조차 그 사람에게는 자신이 여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말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씁쓸했다.

또 하나의 장면은 아이와 함께 금발의 공주가 등장하는 그림책을 읽다가 결국 그 공주의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칠해버렸다는 부분이다.

🔖“나는 매직펜을 들어 그 금발 공주의 머리칼을 검은색으로 칠해버렸다.”

이 짧은 행동에는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는 세상의 아름다움이 언제나 금발과 하얀 피부, 자신과는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아이와 함께 책을 읽는 순간, 그 세계를 직접 바꾸어버린 것이다.

금발의 공주를 검은 머리의 공주로 바꾸는 작은 행동.
그것은 “우리의 모습도 이야기 속에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 아니었을까.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책이나 미디어 속에 등장하는 ‘평범한 얼굴’이 과연 누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자신과 닮은 사람을 이야기 속에서 만나는 것은 ‘나도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감각과 연결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민 킴의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이 무거웠던 부분은 폭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 점점 말을 잃어가는 모습이었다.

🔖“점점 더 희미해지고 긴 문장으로 말하기를 멈추고 느리게, 더 느리게 말하기 시작했다.”

이 문장은 폭력의 결과를 굉장히 조용하게 보여준다.
폭력은 반드시 몸에 남는 상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가는 과정 역시 폭력의 흔적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더욱 의미가 깊어진다.

말하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는 것은 때로 다시 그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말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에바와 민 킴의 이야기는 상처를 상처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과정에 가깝다.


🔖“제 서류에는 제가 고아라고 적혀 있었어요.”

한 사람의 신분을 기록하는 서류에서 ‘고아’라는 단어 하나가 붙는 것은 그 사람의 가족관계와 과거,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출생과 가족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어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입양인은 자신의 출생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조차 다른 사람의 결정과 제도, 기록에 의해 가려질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마음을 무겁게 했다.

‘뿌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다.
처음에는 뿌리를 찾는다는 것이 자신의 친생가족이나 출생지를 확인하는 문제라고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이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한때 나의 입양이 다행스러운 사건이었고 사랑의 행위였으며 하나의 모험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결코 온전한 진실이 아님을 안다”는 고백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처럼 느껴졌다.

입양이 누군가에게 사랑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상실과 폭력의 경험이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이야기를 지우고 다른 하나만을 ‘진실’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민 킴》은 입양을 둘러싼 단 하나의 완성된 서사를 의심하게 하는 책이라고 느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누군가가 정리해준 이야기일 수도 있다. ‘버려진 아이가 좋은 가족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 안에는 아이가 잃어버린 이름, 가족, 언어, 문화, 기억,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감정이 존재할 수 있다.

진실은 때로 아름답지 않다. 불편하고 복잡하며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진실을 지워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입양이 여전히 합법적 관행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진실을 찾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모르는 가족의 역사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부모가 말하지 않는 과거 때문에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을 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삶을 다른 사람이 대신 정의할 권리가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고 자신의 이름과 뿌리를 다시 선택할 권리를 우리는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가.


두 아이가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지만, 그 비행기가 데려간 곳은 서로 달랐다. 그리고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두 여성은 다시 만나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기록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옛 이름을 되찾으며 스스로를 다시 명명한다.

그 모습이 참 오래 남는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것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택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일 것이다. 《민 킴》은 그 차이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고 나니 ‘뿌리를 찾는다’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뿌리는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잃었는지를 스스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더 이상 침묵으로 물려주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책이 말하는 가장 깊은 의미의 ‘돌아감’일지도 모르겠다.

《민 킴》은 입양이라는 제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말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워진 이름과 기억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는 가능성 역시 보여준다.

한 사람의 과거를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직접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
이것이 입양과 입양인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훨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감당하기 어렵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진실을 대신 지워줄 수는 없다.
《민 킴》이 끝까지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삶을 설명할 권리는 당신에게 있다고.
당신의 이름을 부를 권리도, 당신의 뿌리를 찾을 권리도,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당신의 언어로 말할 권리도 결국 당신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뿌리를 스스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 모든 일은,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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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사슴뿔버섯 - 서순희 장편소설
서순희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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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마이디어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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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태어난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특히 한 사람이 성장하는 동안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상처,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서순희 작가의 《붉은사슴뿔버섯》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처럼 다가왔다. 한 장애 소녀의 성장기를 따라가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개인의 삶을 넘어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이 사라져갔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엄만 왜 나를 낳았어? 이렇게 병신으로 키울 거면서 왜 나를 낳았냐고!”

이 한마디가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윤희에게 이 말은 원망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불편한 존재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분노이면서, 그런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가족을 향한 절망이고, 무엇보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어린 마음의 처절한 질문처럼 느껴졌다.

《붉은사슴뿔버섯》은 장애를 가진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이지만, 한 인물이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로만 읽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윤희가 성장하는 동안 함께 변하는 것은 그녀의 몸과 마음 뿐만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싼 가족과 학교, 공장과 도시, 사람들의 가치관까지 빠르게 달라진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산업화가 있었다.

1960~70년대 대구라는 공간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도시였겠지만, 윤희에게는 자신이 얼마나 ‘다른 사람’으로 취급받는지를 뼈아프게 깨닫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고향의 바닷가와 논밭을 뒤로하고 대구로 옮겨온 윤희가 마주한 것은 발전의 빛만이 아니었다. 가난, 차별, 가족의 붕괴, 돈을 향한 욕망, 성적 욕망과 폭력적인 관계들이 뒤엉킨 세계였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성장’이라는 단어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성장한다는 것은 윤희에게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세상이 얼마나 잔인한지도 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윤희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다리의 자유가 아니라 ‘안전한 세계’였는지도 모르겠다.

대천의 바닷가 마을에서 할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풍경은 윤희에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세계, 아직 사람들의 욕망과 계산을 알지 못했던 세계에 가깝다. 그런데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대구로 오면서 그 세계가 무너진다.

🔖“눈을 감으면 고향 오포리의 논밭과 일렁거리는 바닷가의 전경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이 문장에서 마음에 남는 것은 ‘그리움’의 크기다. 윤희는 살던 곳을 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에서 윤희는 목발을 짚고 학교에 간다. 하지만 학교는 배움의 공간인 동시에 차별을 경험하는 공간이 된다.

아이들이 던지는 돌은 윤희에게는 자신의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시키는 폭력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야기할 때 흔히 ‘장애를 극복했다’는 표현을 쉽게 사용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질문이 생긴다.

정말 윤희가 극복해야 했던 것은 자신의 장애였을까?

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극복해야 했던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무능하거나 불쌍한 존재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윤희의 몸은 그녀의 삶을 제한하는 부분이 분명 있었지만, 그녀를 가장 깊이 상처 입힌 것은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었다. 그녀가 자신을 미워하게 된 데에는 자신의 몸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붉은사슴뿔버섯’은 왜 그렇게 붉어야 했을까.
아름답게 보이지만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버섯.

나는 이 버섯이 윤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붉고 강렬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죽음에 이를 만큼 위험한 독이 있다.

윤희의 마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독이 쌓인다.

🔖“내 마음속 시커먼 웅덩이에는 탁한 물이 고였고 그곳에서 독버섯이, 그 어떤 분노가 자라났다.”

이 문장은 이 소설에서 윤희의 내면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표현 중 하나라고 느꼈다. 분노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무시당하고, 상처받고, 이해받지 못하고,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까지 자기 탓으로 돌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속에 무언가가 자라기 시작한다.

그것이 윤희에게는 ‘독버섯’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그 독버섯이 처음부터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분노였고, 그다음에는 원망이었고, 그다음에는 자책이었으며, 결국에는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해간다.

사람의 마음이 무너지는 과정이 이렇게 섬뜩하게 묘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윤희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기는 것은 낯선 사람들만이 아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언제나 안식처는 아니기에,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녀를 더 깊이 흔든다.

아버지의 외도, 어머니의 죽음, 미란의 등장, 이복동생, 그리고 무너져가는 집.
특히 어머니의 죽음 이후 윤희에게 집은 더 이상 예전의 집이 아니다.
엄마가 사라진 집에서 윤희는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가출’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탈출처럼 느껴졌다.

이 작품이 아픈 이유는 윤희가 악한 사람들만 만나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결핍과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

아버지도, 미란도, 주변의 어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원한다. 돈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 욕망을 채우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짓밟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악은 특별히 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가난과 차별, 돈에 대한 집착, 성별과 장애에 대한 편견,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지는 억압처럼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윤희와 상범의 관계는 이 소설에서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윤희는 자신을 장애인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고 한 사람으로 대해주는 상범에게 마음이 기울어간다.

누군가에게 평범한 친절이 윤희에게는 너무 특별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범에게서 느낀 작은 다정함이 윤희에게는 사랑으로 커져갔을 것이다.

그 마음이 결국 다음과 같은 절박한 말로 터져 나온다는 사실이 너무 아프다.
🔖“나 한 번만 안아줘. 아니, 나하고 자도 돼. 절대 책임지라고 안 할게. 발목 잡지도 않을게.”

이 문장을 읽으며 윤희가 얼마나 사랑받고 싶었는지를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동시에 더 슬펐던 것은 윤희가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고 있다는 점이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발목 잡지도 않겠다’는 말은 사랑을 원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기보다, 자신이 상대에게 짐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내놓는 자기 포기처럼 느껴진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사랑받고 싶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욕망을 느끼며, 질투하고 상처받는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도 사회는 오랫동안 장애인의 욕망과 사랑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취급해온 부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윤희의 욕망은 불편하면서도 중요하다.
그녀 역시 욕망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윤희에 대해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은 ‘상처받은 사람은 어디까지 책임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윤희에게는 분명 분노가 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아무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처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작품이 바로 그 애매한 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윤희는 완벽하게 선한 인물도 아니고, 모든 것을 극복한 성녀도 아니다.
때로는 흔들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자신의 욕망에 휘둘린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독자들은 성장소설의 주인공에게 마지막에는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훌륭한 어른이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실제 인간의 성장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상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 성장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윤희의 성장은 ‘극복’보다는 ‘생존’에 가깝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60~70년대이지만, 읽고 나면 오히려 지금의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가?
도시가 발전하면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가?
돈이 많아지면 사람들의 삶도 반드시 풍요로워지는가?

작품 속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사회가 발전하는 속도와 사람의 마음이 성장하는 속도는 반드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도시 밖으로 밀려났고, 누군가는 가난 때문에 자신의 존엄을 포기해야 했으며, 누군가는 장애 때문에 자신의 가능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과거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지 않다.

오늘날에도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거나, 생산성이 낮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쉽게 배제하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스스로 극복하라’고 요구하는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래서 《붉은사슴뿔버섯》은 과거를 재현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비추고 있다고 느껴진다.



윤희가 보여주는 ‘성장’의 의미는 자신도 상처받았던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에 가깝다.

처음의 윤희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더 외롭고, 더 힘겨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만 바라보던 시선이 조금씩 다른 사람에게 향한다.

나는 이것이 윤희의 진짜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상처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볼 가능성이 생긴다.

윤희가 더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가지고도 세상 속으로 나아갔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덮은 뒤에도 남는 것은 ‘죽음’보다 ‘삶’이었다.
붉은 독버섯을 바라보며 죽고 싶어 하는 윤희의 모습보다, 그럼에도 결국 가출하고, 사람을 만나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윤희의 모습이 더 오래 남았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붉은사슴뿔버섯은 죽음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그것은 윤희의 마음속에서 자란 분노이면서 동시에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분노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받고 싶지 않았다면 상범을 향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살고 싶지 않았다면 ‘새로운 인생’을 다짐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윤희가 그렇게 많은 불행을 겪고도 어떻게 계속 살아갈 수 있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됐다.

성장은 상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가는 것.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무너뜨렸던 것들만으로 내 인생 전체를 결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였던 성장의 의미가 아닐까.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죠? 신이 계시다면 이럴 순 없어.”

윤희의 이 질문에는 부당한 일을 겪으며 한 번쯤 세상에 던져본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살다 보면 정말 설명할 수 없는 불공평함을 만날 때가 있다.
착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산 사람이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붉은사슴뿔버섯》은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해주는 듯하다.

세상이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지 않더라도, 내가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붉은사슴뿔버섯처럼 치명적인 독을 품은 시대와 욕망 속에서도
윤희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고.

아마도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완벽하게 깨끗한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리고 그 한 걸음이 비록 목발을 짚은 걸음일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내디딘 것이라면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의 증거가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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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연 지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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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황소미디어그룹 (@hwangsomediagrou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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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포장도로였지만, 드라이브는 즐거웠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묘하게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인생을 돌아볼 때 너무 쉽게 길의 상태부터 따지는 것 같다. 얼마나 순탄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남들보다 얼마나 앞서갔는지. 곧고 매끄러운 길을 걸어온 사람의 삶은 잘 살아온 인생처럼 보이고, 굴곡이 많았던 삶은 어딘가 부족했던 인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윤혜연 작가의 《제법 쓸 만한 인생》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길이 꼭 평탄할 필요는 없다고. 때로는 넘어지고 돌아가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멈춰 서기도 하지만, 그 길을 지나온 시간 자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고.

무엇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대단한 사람의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가족 이야기, 자식 이야기, 부모 이야기, 남편 이야기, 친척과 친구 이야기, 여행과 음식에 얽힌 기억들까지. 얼핏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소재들인데, 작가의 시선이 닿는 순간 그 안에서 오래된 시간과 사람의 마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순셋에 글쓰기를 시작하고 예순여섯에 첫 책을 펴냈다는 이력만 보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신인 작가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소개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히려 ‘글쓰기에는 늦은 나이가 있을지 몰라도, 살아온 이야기에 늦은 나이란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젊은 작가에게는 아직 쌓이지 않은 시간이 있지만,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는 가족과 사랑, 후회와 미안함, 웃음과 눈물, 관계에서 얻은 상처와 뜻밖의 위로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66세에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66년을 살아낸 사람이 이제야 꺼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인 《제법 쓸 만한 인생》도 그래서 참 좋다.


🔖“뭐 꼭 이 나이에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야 맛인가요?”

이 문장은 나이 든 사람의 여유로운 농담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는 꽤 중요한 삶의 태도가 들어 있다고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젊을 때는 꿈을 가져야 하고, 중년에는 성취를 만들어야 하며, 나이가 들어서는 멋진 인생의 결실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식이다.

어느 시점까지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제대로 살아온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꽃처럼 화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꿈을 미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평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인생이 실패한 인생일까.
이 책은 그 평범한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대단한 업적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고, 가족을 위해 애쓰고, 힘든 날을 견디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조금은 소박하고, 조금은 능청스럽다.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치켜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저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괜찮았다고.'


책 속에서 기억에 오래 머문 부분은 ‘자식 울타리’에 대한 이야기다.
🔖“다들 부모가 자식의 울타리라지만 내겐 평생 두 자식이 나의 울타리였다.”

이 문장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아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위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올바른 길을 걷도록 가르치며, 힘들 때 기댈 곳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삶의 방향을 배우고, 자식 때문에 자신을 다잡으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자식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자식이 보고 있으니 더 바르게 살려고 했으며,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일도 끝까지 해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부모라는 존재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부모가 언제나 자식보다 강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부모도 흔들리고 두렵고 지칠 수 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일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자식이 자라고 나면 그때의 부모 마음을 자식이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잔소리처럼 들렸던 말들이 나이가 들어서야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나치게 엄격해 보였던 행동이 사실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제법 쓸 만한 인생》은 바로 그런 ‘뒤늦은 이해’의 순간들을 많이 품고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월이 늘어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일일 수도 있다.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을 중년이 되어 이해하고, 젊었을 때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어른들의 선택을 어느 순간 조금씩 헤아리게 된다.

<큰외삼촌의 약속>에 나오는 대목도 그런 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자식이었구나.”

이 짧은 깨달음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시선의 변화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받은 사랑보다 자신이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더 크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자신도 누군가를 걱정하고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면, 과거의 행동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 ‘왜 그때는 몰랐을까.’

아마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특별한 가족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법한 오해와 후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애틋하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남는다.


이 책의 다른 매력은 웃음과 눈물이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생에는 분명 아픈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비장한 것은 아니다.
아주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밥을 먹고, 웃고, 농담을 하고, 가족과 티격태격한다. 울다가도 어이없는 일에 웃게 되고, 웃다가도 갑자기 오래된 기억 하나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실제 삶이 그렇다.
그래서 삶을 진짜로 닮은 이야기는 웃음과 눈물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제법 쓸 만한 인생》이라는 제목 역시 그런 삶의 결을 품고 있다.
‘쓸 만하다’는 말에는 자부심보다는 유머가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는 듯한 여유가 있다. 그리고 그 여유가 삶을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더 깊게 다가온다.

젊을 때는 실패 하나에도 인생 전체가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던 일도 결국에는 지나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고 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 ‘그때도 참 열심히 살았구나.’


🔖“세상살이 아무리 힘들어도 넘어졌을 때 손 잡아주고 일으켜주는 좋은 사람 몇 명만 곁에 있으면 그럭저럭 다 살아지더라.”

사람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인생에서 반드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힘든 순간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버틸 힘이 생긴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이런 평범한 말 한마디가 어떤 날에는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아주 작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조금 조심스럽게 읽고 싶은 문장도 있었다.

<가사 실습>에 나오는
🔖“처음에 되도록 세게 대응해야 무서워 다시는 그런 짓 못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책 전체의 따뜻한 분위기와 별개로, 오늘날의 독자가 읽을 때에는 문자 그대로의 행동 지침이라기보다 당시의 경험과 작가가 가진 생존 감각에서 나온 강한 표현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과거의 여성들이 관계와 가정 안에서 자신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처럼 책 속의 모든 문장을 아름답게만 받아들이기보다,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한 권의 에세이를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오래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조금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밥 한 끼, 가족이 웃었던 순간, 여행지에서 본 풍경, 부모가 해주었던 음식, 자식의 어린 시절 모습, 오래된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 같은 것들이다. 삶의 대부분은 그런 사소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별것 아닌 하루’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사실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역시 충분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뒤 '엄마' 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오래 머물렀다.
젊을 때는 부모도 나와 똑같이 늙고 지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는 언제나 부모이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모에게도 지나온 청춘이 있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으며, 말하지 못한 서러움이 있었고,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은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아이 하나를 다 키워내니 이런 감정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부모는 ‘부모’라는 역할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제법 쓸 만한 인생》에는 바로 그 시선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나 자신에게도 향한다.

나 역시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라고 후회할까.
아니면 ‘그래도 그때 참 애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완성품이 아니라 지나온 흔적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알아주는 인생이 아니어도 된다.

실수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늦게나마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쓸 만함’은 세상의 평가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잘나서 쓸 만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굴곡을 지나오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다시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만한 인생이라는 것.

그렇기에 제목이 참 따뜻하게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나 자신의 지난 시간도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도 참 별일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구나.
잘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후회되는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살아냈구나.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끝내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에는 이런 생각이 남는다.

인생이 꼭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의 곁에서 그늘이 되어주고, 비 오는 날을 함께 견디고,
때로는 웃음을 나누며 살아온 시간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그러니 지금까지의 나에게도 한번 말해주고 싶다.

이만하면 됐다.
참 많이 애썼다.
돌아보니, 내 인생도 제법 쓸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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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피 -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장편소설
베로니카 곤살레스 라포르테 지음, 최혜정 옮김 / 슬로우리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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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슬로우리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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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박피》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먼저 떠오른 생각은 ‘껍질을 벗겨낸다’는 이미지였다. 피부는 우리 몸을 가장 먼저 감싸고 있는 표면이지만, 피부 아래에는 근육과 혈관, 장기처럼 훨씬 복잡하고 연약한 것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박피’라는 단어는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과 그 아래 감춰진 욕망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이 소설은 성형외과 의사 지호와 그가 자신의 욕망을 투영해 만들어낸 AI 리얼돌 ‘성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성미는 지호가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고, 그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준다.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절과 갈등, 실망과 오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점에서 성미는 리얼돌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처럼 다가왔다. 지호가 만든 것은 어쩌면 ‘완벽한 연인’이 아니라 자신이 상처받지 않아도 되는 관계였던 것은 아닐까.

현실의 사랑은 상대방을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없다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나와 다른 생각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때로는 나를 거절하기도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함과 예측할 수 없음이 인간관계를 인간관계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호가 성미에게 점점 빠져드는 모습을 보면서 편안함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나를 거절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한다는 것은 처음에는 얼마나 달콤할까. 하지만 그 편안함이 현실의 관계를 견디는 힘을 오히려 빼앗아간다면 어떨까.

책 속에서 성미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모든 영혼을 걸고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자기 왜 그래?”
“당신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아니, 애초에 감정을 느낄 수가 없는 거였지.”

이 장면은 《박피》가 독자에게 하고자 하는 질문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처럼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사랑을 느끼는 것은 같은 것일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며,
내가 외롭지 않도록 언제나 곁에 있어준다고 해도 그 존재에게
자신의 의지와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부분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맞춰 완벽하게 만들어진 존재를 원할 수 있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성형외과라는 공간과 성미의 존재가 연결되는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성형은 외모를 내가 원하는 모습에 가깝게 바꾸는 행위이고, 지호는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연인의 모습과 반응까지 만들어낸다.
몸의 표면을 다듬는 것에서 시작해 관계의 상대방까지 ‘맞춤형’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확장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함일까.

책을 읽으며 알고리즘도 떠올랐다. 오늘날 검색하고, 영상을 보고,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자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끊임없이 추천받는다.
불편한 것은 조금씩 멀어지고 익숙하고 편안한 것들이 내 화면을 채운다.

성미가 어쩌면 이런 세계의 극단적인 형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하고, 나를 거절하지 않는 존재.

하지만 인간관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상대방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때로는 내 기대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사랑은 피곤하고 어렵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지점에서 관계는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다른 사람들도 다 실수하며 살아. 이 세상에 완벽한 관계가 어디 있어.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타인을 완전히 알 수는 없는 거야. 가끔은 스스로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를 때가 있잖아.”

완벽한 관계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꾸 완벽한 관계를 꿈꾸게 된다.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는 사람,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나를 안아주는 사람을 바란다.
하지만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사랑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지호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사랑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하면서 발생하는 고통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미는 지호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인 동시에 그의 외로움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것은 최첨단 기술과 무속신앙이 한 작품 안에서 충돌한다는 점이었다. 지호는 AI라는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과 욕망을 통제하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무당의 말 앞에서는 흔들린다.

🔖“자연에 반하는 행동이라뇨?"

이 문장은 작품의 분위기를 조금 더 넓은 영역으로 끌어가는 듯했다.
인간은 기술을 발전시키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삶과 죽음, 사랑과 상실처럼 여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박피》 속 지호의 불안은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뿐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하는 순간의 불안처럼 느껴졌다.

팬데믹이라는 배경도 이러한 이야기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봉쇄, 사람 사이의 단절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립감을 경험하게 했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지호가 현실의 관계 대신 자신에게 맞춰진 존재를 선택한다는 설정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람과 만날 수 없고,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워지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던 시대에 ‘나를 절대 거절하지 않는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것을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이 작품의 공포는 미래의 어느 날 갑자기 AI가 인간을 지배한다는 식의 공포와는 조금 다르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인간이 인간과 관계 맺는 일을 점점 어려워하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를 사랑하게 될까.

🔖“말씀하시던 여자친구가 이게 맞나요?”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것’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이것. 너트와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생명이 없는 기계.”

‘사람’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부르는 순간, 성미의 존재가 낯설게 느껴졌다. 지호에게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물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질문은 성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에서 타인을 얼마나 쉽게 역할이나 기능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사람,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처럼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내가 필요로 하는 기능으로만 바라보는 순간은 없었을까.

그런 점에서 ‘AI 리얼돌’이라는 낯선 소재는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장치가 된다.

《박피》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기술 그 자체를 악으로만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욕망에 있다. 기술은 외로움을 덜어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나에게 맞춰진 존재’를 만드는 것이라면, 점점 타인의 다름을 견디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랑에는 상대방의 자유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할 수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을 자유. 나와 다른 생각을 할 자유.
때로는 나를 떠날 자유.
그 불편한 자유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라면, 성미와의 관계는 사랑의 가장 편안한 부분만 남겨놓고 가장 어려운 부분을 제거한 관계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을 읽으며 불완전한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게 됐다.
실수하고, 오해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다시 대화하는 관계.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곁에 남아 있는 관계.
그런 관계는 분명 피곤하고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의 본질은 내가 원하는 사람을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한 사람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박피》라는 제목이 마지막까지 의미심장하게 남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표면을 만든다. 아름다운 얼굴, 성공한 모습, 괜찮은 척하는 표정, 행복해 보이는 관계. 하지만 그 표면을 한 겹씩 벗겨내면 그 아래에는 외로움과 불안, 욕망과 상처가 자리하고 있다.

지호 역시 그랬다. 겉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아래에는 관계에서 받은 상처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결핍이 있었다.

그래서 책을 읽은 뒤 마음에 남은 건 것은
오히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의 의미였다.

나를 언제나 이해해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원하는 말을 항상 해주는 사람도 없다. 때로는 실망시키고, 상처를 주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된다.
그런데 어쩌면 사랑은 바로 그 불완전함을 견디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외롭지 않고 싶다는 마음.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욕망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너무 완벽하게 충족시켜주는 순간,
오히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릴 수도 있다.

‘나는 타인의 불완전함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 소설이 벗겨낸 가장 깊은 피부 아래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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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스
박지선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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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물은 #단맘 (@gbb_mom ) , #르온서평단 을 통해 황금가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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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는 데 있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하는 인공지능,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반려 로봇, 신체의 상당 부분을 기계로 바꾸는 기술. 《루미너스》는 그런 미래를 아주 멀리 있는 상상처럼 펼쳐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낯선 미래보다 지금 살아가는 현실이 더 선명하게 떠올랐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통일 이후의 한국이라는 배경이었다. 전쟁의 상처와 사회적 갈등, 계층과 지역의 격차, 북한 출신 사람들에 대한 차별,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둘러싼 반목까지 남아 있는 사회를 보여준다.

그래서 《루미너스》의 미래는 한쪽에는 고도로 발달한 로봇 기술과 부유한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버려진 로봇을 해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 오히려 새로운 빈곤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보인다.

미래의 기술은 달라졌지만 인간이 가진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미래에는 무엇이 가능할까?'보다 '미래에도 인간은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루미너스》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로봇이 인간의 삶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청소하고, 일을 돕고, 가족의 빈자리를 채우고, 반려동물이 되어주고, 심지어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외모를 가진 로봇까지 등장한다. 그런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를 우리는 어디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특히 책 속의 문장,
🔖“우리는 너희가 사랑하는 걸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졌어.”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아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로봇이 인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편리한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하는 존재를 로봇이 대신하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로봇을 제공하고,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가족을 닮은 로봇을 만들어주고, 늙어가는 몸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상실을 극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를 돈으로 구매하는 것일까.

책 속 준의 시선에서 바라본 이 부분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로봇처럼, 슬픔에도 당혹스러운 매뉴얼이 따라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디를 가든 자본주의가 슬픔의 언어가 됐다.”라는 문장 역시 오래 남았다.

이 부분은 사랑하는 존재를 잃었을 때 그 빈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슬픔을 견디는 대신 새로운 무언가로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정말 치유일까.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슬픔마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슬픔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루미너스》를 읽으며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것은 로봇의 존재보다 시간이었다.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 늙는다. 얼굴이 달라지고 몸이 약해지고 기억도 조금씩 변한다. 사랑하는 사람 역시 변한다. 그런데 바로 그 변화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온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

어제와 오늘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함께 보낸 계절이 쌓이고, 어느 순간 사진 속의 어린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오래 함께했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런데 시간이 멈춰버린 존재가 있다면 어떨까.
모두가 나이를 먹고 변해가는데 한 사람만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삶이라기보다 오히려 영원한 이별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요라는 존재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그는 기계이지만 작품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누군가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며, 누군가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과거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테세우스의 '배'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도 떠올랐다.

🤔 부품을 하나씩 모두 교체한 배가 여전히 같은 배일까.

그 질문을 인간에게 가져온다면 더 복잡해진다.
우리의 세포는 계속 변하고, 몸은 늙고, 기억도 조금씩 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나'이게 만드는 것은 몸일까, 기억일까,
아니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관계일까.

나는 그 답이 관계와 시간에 조금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책의 첫 장면은 이상하게 잊혀지지 않는다.
🔖“청소부가 로봇의 잔해를 빗자루로 쓸어서 치웠다. 미소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통만 보도 위에 남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늘 더위가 심상치 않다고 재잘재잘 경고하였다.”

미소를 짓고 있는 로봇의 머리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치워버리는 사람.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책이 보여주는 미래가 얼마나 기묘한지 느껴졌다.
인간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말을 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존재가 길바닥에 버려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쓰레기처럼 치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머리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날씨를 알려준다.
나는 이 장면에서 로봇의 비극보다 오히려 인간의 익숙함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로봇이 일상에 들어오면 인간은 그들에게 익숙해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익숙함은 때때로 존중을 지워버린다.
'매일 보는 존재라는 이유로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것.'
사람에게도 충분히 일어나는 일이다.


《루미너스》에는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려는 욕망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자신이 만든 로봇에게 사랑, 가족, 희생, 기억 같은 것을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은 그 감정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사랑받고 싶으면 맞춤형 로봇을 구매하고, 외로우면 반려 로봇을 들이고, 잃어버린 존재를 잊기 싫다면 기억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이 로봇에게 인간성을 가르치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잃어버린 인간성을 로봇에게서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일까.


특히 작품 속에서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준과 로봇을 만드는 모건, 자신의 몸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로봇의 육체를 갈망하는 뤼지예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같은 질문으로 한데 모인다.

몸이 인간을 결정하는가? 몸의 일부가 기계가 되면 인간이 아닌가.
반대로 인간의 몸을 가진 존재가 기억과 감정을 잃어버린다면 여전히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간의 몸이 아닌 로봇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끝까지 '기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특히 섬뜩했던 것은 전쟁 기계에 관한 부분이었다.
기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될 거야, 로봇들이 우리보다 일을 더 잘해서, 실수로 우리를 멸종시키고 나중에 미안하다며 이런 형편없는 전시나 열지 않았으면 좋겠어.”

처음에는 과장된 미래의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을 바라보며 인간의 역할이 어디까지 남게 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루미너스》가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간이 필요에 따라 로봇에게 점점 더 많은 역할을 맡기고,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포기했는지 깨닫지 못할 가능성 때문이다.

가족의 역할도 대신하고, 돌봄도 대신하고, 노동도 대신하고, 감정적인 위로까지 대신한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기술이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것과 인간의 삶 자체를 대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 책은 그 경계선을 아주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서 언급된 토끼 이야기가 무척 오래 남을 것 같다.
인류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 과정에는 언제나 기준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기준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누구를 더 가치 있는 존재라고 판단하는가. 누구를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누구의 생명과 고통에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누구의 고통은 쉽게 외면하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존재의 가치를 구분한다.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안전한 사람과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우리 편과 남의 편.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를 '우리'라고 부르는 것인가.


통제받는 미래만이 위험한 것이 아니다.
너무 편리해서 스스로 선택을 포기하게 되는 미래도 위험할 수 있다.

외로움을 견디지 않아도 되고, 상실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늙어가는 몸을 바꿀 수 있고, 가족의 빈자리를 로봇으로 채울 수 있다면 정말 더 행복해질까.

인간다운 삶에는 불편함과 결핍, 상실과 슬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루미너스》를 읽고 난 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까지 기술에게 맡겨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책을 덮은 뒤,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또한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마음 속에 자리잡는 듯 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한다.

같은 집에서 밥을 먹고, 같은 계절을 지나고, 같은 장소를 걷고, 서로의 얼굴에 생긴 작은 변화를 알아차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시간이 멈춘다.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혼자 남는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 등장해도 함께 살아온 시간을 완전히 되돌릴 수는 없다.
기억을 복원할 수 있고, 얼굴을 재현할 수 있고,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오히려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모습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함께 먹는 한 끼.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같은 계절을 지나가는 것. 서로의 모습이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 어떤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미너스》는 로봇과 인공지능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가족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이고, 통일 한국이라는 미래를 통해 현재의 한국 사회를 비추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래가 완전히 새롭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인간의 욕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차별도 존재하고, 계층도 존재하고, 전쟁의 상처도 존재하며, 누군가를 배제하려는 마음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래를 바꾸는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선택이 결국에는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루미너스》를 읽으며 미래의 로봇이 인간처럼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보다, 지금의 인간이 과연 얼마나 인간다운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를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시대가 오더라도,
함께 살아온 시간까지 복제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다.

작가는 책을 통해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가장 가까운 현재를 바라보게 한다. 로봇이 인간을 닮아가는 미래를 읽었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오히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이 떠올랐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SF가 이렇게 오래 현재의 마음에 머무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루미너스》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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