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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쓸 만한 인생
윤혜연 지음 / 달먹는토끼 / 2026년 8월
평점 :
🔻이 게시물은 황소미디어그룹 (@hwangsomediagroup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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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비포장도로였지만, 드라이브는 즐거웠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묘하게 마음이 오래 머물렀다.
인생을 돌아볼 때 너무 쉽게 길의 상태부터 따지는 것 같다. 얼마나 순탄했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남들보다 얼마나 앞서갔는지. 곧고 매끄러운 길을 걸어온 사람의 삶은 잘 살아온 인생처럼 보이고, 굴곡이 많았던 삶은 어딘가 부족했던 인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윤혜연 작가의 《제법 쓸 만한 인생》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길이 꼭 평탄할 필요는 없다고. 때로는 넘어지고 돌아가고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멈춰 서기도 하지만, 그 길을 지나온 시간 자체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든다고.
무엇보다 이 책이 흥미로운 것은 ‘대단한 사람의 대단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주 평범한 일상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가족 이야기, 자식 이야기, 부모 이야기, 남편 이야기, 친척과 친구 이야기, 여행과 음식에 얽힌 기억들까지. 얼핏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소재들인데, 작가의 시선이 닿는 순간 그 안에서 오래된 시간과 사람의 마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순셋에 글쓰기를 시작하고 예순여섯에 첫 책을 펴냈다는 이력만 보면 늦은 나이에 시작한 신인 작가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소개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오히려 ‘글쓰기에는 늦은 나이가 있을지 몰라도, 살아온 이야기에 늦은 나이란 없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젊은 작가에게는 아직 쌓이지 않은 시간이 있지만,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는 다른 누구도 대신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는 가족과 사랑, 후회와 미안함, 웃음과 눈물, 관계에서 얻은 상처와 뜻밖의 위로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66세에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66년을 살아낸 사람이 이제야 꺼내놓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점인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인 《제법 쓸 만한 인생》도 그래서 참 좋다.
🔖“뭐 꼭 이 나이에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야 맛인가요?”
이 문장은 나이 든 사람의 여유로운 농담처럼 보이면서도, 그 안에는 꽤 중요한 삶의 태도가 들어 있다고 느꼈다.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젊을 때는 꿈을 가져야 하고, 중년에는 성취를 만들어야 하며, 나이가 들어서는 멋진 인생의 결실까지 보여줘야 한다는 식이다.
어느 시점까지 반드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제대로 살아온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꽃처럼 화려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꿈을 미뤘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평생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몫을 해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인생이 실패한 인생일까.
이 책은 그 평범한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대단한 업적이 없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고, 가족을 위해 애쓰고, 힘든 날을 견디고,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면서 여기까지 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조금은 소박하고, 조금은 능청스럽다.
자신의 삶을 지나치게 치켜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그저 돌아보며 말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괜찮았다고.'
책 속에서 기억에 오래 머문 부분은 ‘자식 울타리’에 대한 이야기다.
🔖“다들 부모가 자식의 울타리라지만 내겐 평생 두 자식이 나의 울타리였다.”
이 문장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아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게 한다.
부모는 자식을 지켜주는 울타리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위험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올바른 길을 걷도록 가르치며, 힘들 때 기댈 곳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가는 자신이 오히려 자식들에게 삶의 방향을 배우고, 자식 때문에 자신을 다잡으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자식이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자식이 보고 있으니 더 바르게 살려고 했으며,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일도 끝까지 해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부모라는 존재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부모가 언제나 자식보다 강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부모도 흔들리고 두렵고 지칠 수 있다. 다만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다시 일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자식이 자라고 나면 그때의 부모 마음을 자식이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잔소리처럼 들렸던 말들이 나이가 들어서야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지나치게 엄격해 보였던 행동이 사실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제법 쓸 만한 인생》은 바로 그런 ‘뒤늦은 이해’의 순간들을 많이 품고 있는 책처럼 느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세월이 늘어나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 일일 수도 있다.
어릴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을 중년이 되어 이해하고, 젊었을 때는 답답하게만 느껴졌던 어른들의 선택을 어느 순간 조금씩 헤아리게 된다.
<큰외삼촌의 약속>에 나오는 대목도 그런 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도 자식이었구나.”
이 짧은 깨달음에는 시간이 만들어낸 시선의 변화가 담겨 있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받은 사랑보다 자신이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들이 더 크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자신도 누군가를 걱정하고 책임지는 위치에 서게 되면, 과거의 행동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 ‘왜 그때는 몰랐을까.’
아마 책을 읽으며 독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특별한 가족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을 법한 오해와 후회, 미처 전하지 못한 마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은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애틋하다.
그래서 어떤 문장은 책장을 덮은 뒤에도 계속 남는다.
이 책의 다른 매력은 웃음과 눈물이 같은 자리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인생에는 분명 아픈 일이 많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비장한 것은 아니다.
아주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밥을 먹고, 웃고, 농담을 하고, 가족과 티격태격한다. 울다가도 어이없는 일에 웃게 되고, 웃다가도 갑자기 오래된 기억 하나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실제 삶이 그렇다.
그래서 삶을 진짜로 닮은 이야기는 웃음과 눈물이 명확하게 나뉘지 않는다.
《제법 쓸 만한 인생》이라는 제목 역시 그런 삶의 결을 품고 있다.
‘쓸 만하다’는 말에는 자부심보다는 유머가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는 듯한 여유가 있다. 그리고 그 여유가 삶을 오래 살아온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 더 깊게 다가온다.
젊을 때는 실패 하나에도 인생 전체가 무너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그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던 일도 결국에는 지나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간을 견디고 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 ‘그때도 참 열심히 살았구나.’
🔖“세상살이 아무리 힘들어도 넘어졌을 때 손 잡아주고 일으켜주는 좋은 사람 몇 명만 곁에 있으면 그럭저럭 다 살아지더라.”
사람은 혼자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문장이다. 인생에서 반드시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정말 힘든 순간에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몇 명만 있어도 버틸 힘이 생긴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밥은 먹었어?”
이런 평범한 말 한마디가 어떤 날에는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는 아주 작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조금 조심스럽게 읽고 싶은 문장도 있었다.
<가사 실습>에 나오는
🔖“처음에 되도록 세게 대응해야 무서워 다시는 그런 짓 못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책 전체의 따뜻한 분위기와 별개로, 오늘날의 독자가 읽을 때에는 문자 그대로의 행동 지침이라기보다 당시의 경험과 작가가 가진 생존 감각에서 나온 강한 표현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대목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과거의 여성들이 관계와 가정 안에서 자신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해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처럼 책 속의 모든 문장을 아름답게만 받아들이기보다,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한 권의 에세이를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오래 살아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조금 다른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밥 한 끼, 가족이 웃었던 순간, 여행지에서 본 풍경, 부모가 해주었던 음식, 자식의 어린 시절 모습, 오래된 사람과 나누었던 대화 같은 것들이다. 삶의 대부분은 그런 사소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별것 아닌 하루’라고 생각했던 날들이 사실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 역시 충분히 중요한 일이 아닐까.
이 책을 읽고 난 뒤 '엄마' 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오래 머물렀다.
젊을 때는 부모도 나와 똑같이 늙고 지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는 언제나 부모이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부모에게도 지나온 청춘이 있었고, 이루지 못한 꿈이 있었으며, 말하지 못한 서러움이 있었고, 자식에게 보여주지 않은 눈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아이 하나를 다 키워내니 이런 감정을 모두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부모는 ‘부모’라는 역할에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제법 쓸 만한 인생》에는 바로 그 시선의 변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나 자신에게도 향한다.
나 역시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라고 후회할까.
아니면 ‘그래도 그때 참 애썼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은 완성품이 아니라 지나온 흔적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알아주는 인생이 아니어도 된다.
실수하고 돌아서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늦게나마 누군가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한다.
그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쓸 만함’은 세상의 평가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잘나서 쓸 만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굴곡을 지나오면서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를 걱정하고, 다시 웃을 수 있었기 때문에 쓸 만한 인생이라는 것.
그렇기에 제목이 참 따뜻하게 마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책을 덮은 뒤에는 나 자신의 지난 시간도 한번 돌아보게 된다.
나도 참 별일을 다 겪으며 여기까지 왔구나.
잘한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후회되는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때의 나는 그때 할 수 있는 만큼 살아냈구나.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끝내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끝에는 이런 생각이 남는다.
인생이 꼭 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누군가의 곁에서 그늘이 되어주고, 비 오는 날을 함께 견디고,
때로는 웃음을 나누며 살아온 시간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그러니 지금까지의 나에게도 한번 말해주고 싶다.
이만하면 됐다.
참 많이 애썼다.
돌아보니, 내 인생도 제법 쓸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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