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함께 걸었다 - 나다운 삶을 위한 가장 지적이고 대담한 여정
마사 벡 지음, 박여진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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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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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분명 열심히 살아왔는데도 문득 내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살아가는 것 같은데, 정작 내 마음은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 해야 할 일을 해내고,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맞추느라 바쁘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문득 지금의 삶이 정말 내가 원했던 모습인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동안 잘해왔다고 믿었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지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지는 순간. 그런 혼란이 반드시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뤄둔 채 살아왔기에,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내면의 신호가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마사 벡의 《어두운 숲길을 단테와 함께 걸었다》는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어두운 숲과 지옥, 연옥, 천국의 여정을 따라가며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시 발견할 수 있는지 질문한다. 고전 속 인물의 여정을 현대인의 심리와 삶에 연결했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무엇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데도 왜 마음은 좀처럼 편안해지지 않는지 돌아보게 한다.

정말 행복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행복해 보이는 삶을 향해 달리고 있는 걸까.


책 속에서 단테가 발견한 ‘기쁨의 산’은 내게 인상적인 상징으로 다가왔다.
어두운 숲에서 벗어나려는 단테에게 산은 분명 올바른 출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산을 오르려 할수록 진정한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은 현실과도 닮아 있다.

누군가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달리고, 다른 사람의 삶과 비교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찾아내고,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비로소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정상에 도착하더라도 곧 더 높은 산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책은 이러한 마음을 ‘기쁨의 산’이라는 은유로 보여준다. (50~53쪽)
이 부분을 읽으며 행복을 미래의 어느 시점에 도착해야 얻을 수 있는 보상처럼 생각해왔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보다 나아져야만 괜찮아질 수 있고, 더 많이 이루어야만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현재의 나는 언제나 부족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사람마다 원하는 삶의 모양은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큰 성취가 행복의 이유가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용한 일상과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이 더 큰 기쁨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높은 곳에 올라갔느냐가 아니라, 내가 오르고 있는 그 산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산인지 묻는 일일 것이다.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 혼란과 절망감은 우리의 내적 체계가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불안하거나 혼란스러울 때 그런 감정을 빨리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내가 약해진 것 같고, 삶에 만족하지 못하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느끼기도 한다. 이미 가진 것이 있는데도 허전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탓할 때도 있다.

그러나 책은 지금의 삶과 내면의 욕구 사이에 간격이 생겼음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관점은 감정을 대하는 태도를 바꾼다.
혼란을 느끼는 나를 고쳐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내 마음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들어볼 기회로 삼게 하기 때문이다.

삶의 전환점은 더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할 수도 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책의 지옥편에서 눈길이 머문 주제는 자기 배신이었다.

하기 싫은 일도 책임감 때문에 해야 하고,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삼키기도 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데는 타협과 인내가 필요하며, 모든 순간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울 수는 없다. 그러나 타협이 반복되면서 자신의 진심을 부정하는 일이 습관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싫으면서도 좋다고 말하고, 힘들면서도 괜찮다고 대답하고,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선명하게 알기 어려워진다.

책 속 문장은 이러한 문제를 날카롭게 짚는다.

🔖“진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진실처럼 씩씩하게 말하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행위다.”

이 문장을 읽으며 긍정적인 태도와 자기기만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어려움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반면 자기기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현실을 외면한 채 괜찮다는 말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일에 가깝다.

힘든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 언제나 잘못은 아니다. 때로는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벌어주기도 하고,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견디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면 긍정은 위로가 아니라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다.

진정한 자기 이해가 언제나 자신을 좋아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감정과 부끄러운 욕심,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두려움까지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단테는 어두운 숲을 벗어나기 위해 곧바로 천국으로 향하지 않는다.
스승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지옥으로 들어간다.

이 여정의 구조는
'왜 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도 때로는 그 고통을 들여다봐야 할까?'
묻고 있다.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은 늘 편안하지만은 않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다 보면 오랫동안 외면했던 기억과 마주할 수 있다. 내가 선택한 줄 알았던 길이 사실은 타인의 기대에 맞춘 길이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했던 행동 속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런 깨달음은 처음에는 불편하다.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하고, 앞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할지 막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자신을 이해하려면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함부로 지워버릴 수 없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억지로 잊으려 하거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겁을 죽이려면 희망과 공포만이 존재하는, 오직 거기에만 골몰하게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 현재에만 집중해야 한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은 필요하다. 위험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태도는 우리를 보호한다.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붙잡혀 사는 것은 다를 것이다.

좋은 결과를 상상하며 현재를 견디다가도 실패할 가능성에 불안해지고,
최악의 상황을 피하려다 정작 지금 할 수 있는 일마저 놓칠 수 있다.

이럴 때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모든 마음을 빼앗기기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행동으로 시선을 돌리는 일에 가깝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걱정하는 대신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씩 해내는 것.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지 고민하기보다 내가 전하고 싶은 말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것. 모든 것이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부터 시작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현재는 미래를 위해 잠시 견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된다.


책의 후반부에서 만나는 문장은 이 책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진정으로 아는 것을 알고, 진정으로 느끼는 것을 느끼고, 진정으로 의도한 것을 말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라. 그것이 나로 온전해지는 길이다.”

이 문장이 좋았다. 나답게 살기 위해 반드시 대단한 결심을 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알고도 외면하지 않는 것, 감정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하고 싶은 말을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원하는 삶을 향해 작더라도 실제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쌓이면 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격도 조금씩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나다운 삶은 누군가가 대신 정해줄 수 없다.
책이 길을 안내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어떤 길을 걸을지는 자신의 몫이다.


책의 후반부 여정에서 내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사랑에 관한 시선이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물면서/사랑의 빛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거란다.”

그리고 책의 이 문장도 마음에 남는다.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I'amor che move il sole e l'altre stelle'이라는 사실을.”

두 문장을 함께 떠올리면 사랑은 누군가를 향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에게 정직해지는 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 삶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사랑의 범위 안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받기 위해 자신을 바꾸려 한다. 상대방이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고, 관계를 잃을까 봐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도 한다. 때로는 타인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한계를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부정하면서 누군가에게 온전히 마음을 내어주는 일은 쉽지 않다. 나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무조건 참거나 자신의 존재를 축소하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나의 경계를 지킬 수 있고, 상대방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더라도 나 자신의 가치를 전부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온전함은 나 자신과 타인을 모두 인간다운 존재로 바라보는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책이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내면의 진실과 삶의 행동을 조화시키는 과정은 다른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방식까지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어두운 숲이라는 이미지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숲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불안과 후회, 말하지 못한 마음과 오래된 두려움이 뒤엉켜 있는 숲 말이다.

그러나 그 숲에 들어섰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천천히 살펴볼 수 있다. 남들이 먼저 도착한 곳을 따라가기보다 나에게 맞는 길을 찾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묻혀 있던 내면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마지막에 만나는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장소가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내가 하는 행동이 조금씩 일치하고, 타인의 시선보다 나의 진심을 더 믿을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순간.

그곳이야말로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곳일 수 있다.

길을 잃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의 삶을 실패라고 부르지 않기를.
남들이 가는 길에서 잠시 벗어났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맞는 길을 찾는 시작일 수 있음을 기억하기를.


지금 나는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이제야 나의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일까.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서 앞으로의 모든 길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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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 - 권오중의 삶의 긍정
권오중 지음 / 수오서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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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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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바라는 삶의 모습이 있다.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별일 없이 밥을 먹고 웃는 것, 하루의 피곤함을 투덜거리면서도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 너무나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다. 그런데 그 당연함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온 소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아갔던 걸까.

배우 권오중의 첫 에세이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은 언제나 유쾌하고 거침없는 모습으로 기억했던 배우의 얼굴 뒤에 아들을 향한 절박한 마음과 남편으로서의 미숙함, 아버지로서 감당해야 했던 두려움, 그리고 자기 자신을 마주하며 조금씩 변화해 온 시간이 담겨 있다.

이 책이 더욱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아픔을 극복한 사람의 성공담으로 삶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노력하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희망도,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저절로 아문다는 위로도 쉽게 건네지 않는다. 어떤 문제는 아무리 애써도 답을 찾을 수 없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곁에 머무는 것뿐인 순간도 있다. 그 막막함을 외면하지 않은 채, 그럼에도 삶을 이어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살다 보면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다.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실패할 수 있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힘을 다해도 그 사람의 고통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 사람은 문제 자체보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더 깊이 흔들리기도 한다.

권오중은 아들을 위해 수많은 병원과 치료 센터를 찾아다녔지만, 끝내 쉽게 답을 얻을 수 없는 현실과 마주한다. 부모라면 아이가 아플 때 무엇이든 해주고 싶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해줄 방법이 있다면 자신의 시간과 돈, 마음을 모두 쏟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간절함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지켜보는 이에게 또 다른 고통이 된다.


책을 읽으며 남은 것은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한 감탄만이 아니었다. 사랑이 깊다고 해서 언제나 상대를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조차 누군가에게는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 힘들어하면 해결책부터 찾으려 한다. 어떻게 하면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모든 아픔에 해결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더라도 상대의 곁을 지키는 것, 섣부른 위로 대신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관계는 조금씩 단단해질 수 있다.

책 속에서 오래 시선이 머물게 된 문장은 이것이다.
🔖“아픔이 나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나를 더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가장 정직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읽으며 아픔을 무조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은 그 자체로 고통이다. 누군가에게 찾아온 불행에 반드시 의미가 있다고 말하거나, 아픔 덕분에 성장했으니 다행이라고 정리하는 것은 때로 당사자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위로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아픔을 겪은 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는 있다.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게 되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소중히 여기게 되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아픔이 찾아온 이유를 끝내 알지 못하더라도, 그 아픔을 통과한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조금씩 선택할 수 있다. 내게 이 문장은 고통이 내 삶의 전부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말라는 당부처럼 다가왔다.


책에서 가장 묵직하게 다가온 주제는 평범한 하루에 관한 이야기였다.

하루를 살아내면서도 불평할 이유를 쉽게 찾아낸다.
충분히 쉬지 못했다고 투덜거리고,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내일이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때로는 답답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아픈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는 그 평범한 하루가 간절한 바람이 될 수 있다.

책 속에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는 아이들의 부모가 바라는 일상이 담겨 있다. 아이가 직장 생활을 하며 힘들다고 투덜거리고, 직장 상사 때문에 속상해하고, 실패한 일 때문에 좌절하는 하루를 살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그런 하루를 살아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대목은 평범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평범하다고 부르는 삶은 사실 수많은 조건이 무사히 맞물려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침에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고, 사람을 만나고, 해야 할 일을 하며,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는 것. 때로는 귀찮고 지겨운 반복이지만, 그 반복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바람일 수 있다.

별다른 대화 없이 지나친 가족과의 저녁 식사, 아무렇지 않게 나눈 안부,
집에 돌아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

이 책은 그런 순간들을 행복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너무 익숙해져서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게 한다.

평범한 하루를 기적이라고 부르는 일은 지금 내 삶에 이미 존재하는 소중함을 알아차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의미에 가깝다. 행복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순간을 다시 바라볼 때 발견되기도 하니까.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권오중이 아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아들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이 가장 절박한 목표였을 것이다. 부모에게 아이의 고통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며, 무엇이든 해보려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오랜 시간 답을 찾지 못하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아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 속에서 혁준은 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이유를 묻자, 아프면 빨리 병원에 데려다주고 싶고 위급하면 구급차라도 불러주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는 까닭은 아픔이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단정적으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아픔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혁준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알아보고,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빨리 도움받기를 바란다.

누구보다 자신의 고통을 잘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지나치지 못하는 모습.
그 안에는 억지로 배운 교훈보다 훨씬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이 장면을 통해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의 의미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나누고, 한쪽이 베풀고 다른 쪽은 그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위로받기도 하고, 내가 가르쳐 준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우기도 한다.

권오중이 봉사를 통해 자신의 시선을 바꾸어가는 과정 역시 그런 의미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그 안에서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삶의 무게를 만나고, 자신이 가진 생각과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도움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해는 누군가를 내 기준에 맞추려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 묘하다.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장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상대의 마음을 쉽게 짐작해 버린다. 고맙다는 말을 나중으로 미루고, 미안하다는 말을 삼키며, 가족이니까 이해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책에는 남편으로서 미숙했던 자신의 모습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었던 시간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 상대가 내게 해준 것을 뒤늦게라도 알아보는 일, 내가 옳다고 믿었던 태도를 다시 돌아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완벽한 배우자나 부모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일일 것이다. 잘못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잘못을 알아차렸을 때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한다는 말에 머물지 않고 일상 속 행동으로 그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은 함께 걷는 속도를 맞추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은 공간에서 편안하게 머무는 것. 상대가 자신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도 사랑의 중요한 방식일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서로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태도다.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다 보면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삶을 실패나 부족함으로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속도로 걷는 것은 아니다.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각자가 짊어진 조건과 현실은 다르며,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권오중의 가족이 지나온 시간은 그런 기준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책 속에서 아들은 자신만의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고, 아버지는 그 속도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간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랐을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같은 모습에 도달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히 아들과 함께 걷는 장면에서 전해지는 마음이 인상적이다.

🔖“먼 훗날 혁준이가 자기 삶을 돌아볼 때, 이 아빠의 팔꿈치가 기억되기를.”

이 문장을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좋은 환경이나 많은 기회,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오래 남는 것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다는 기억일지도 모른다.

힘들 때 손을 잡아준 사람, 자신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았던 사람,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외면하지 않았던 사람. 그런 존재가 있었다는 기억은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책 속에는 자신의 질투와 부족함을 숨기지 않고 바라보는 태도도 담겨 있다.

🔖“성장이란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못난 괴물과 매일 민망하게 인사를 나누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장은 인간적인 성장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을 조금 바꾸어 놓는다. 성장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전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모습을 떠올린다. 감정을 잘 다스리고, 타인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사람은 그렇게 깔끔하게 변하지 않는다. 어제는 이해했다고 생각한 일을 오늘 다시 질투할 수도 있고, 반성했던 행동을 또 반복할 수도 있다.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작은 일에 흔들리며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한다.

그렇다면 성장은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모른 척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며 치유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체로 치유를 아픔이 사라지는 상태로 이해한다. 병이 낫고, 상처가 아물고, 슬픔을 더 이상 느끼지 않으며, 마침내 이전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 그런 결말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어떤 아픔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남기도 하고, 여전히 걱정되는 현실이 있으며, 과거의 상처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아픔이 남아 있는 삶은 아직 치유되지 못한 삶일까.

책을 읽으며 떠올린 치유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아픔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더라도 그 아픔만 바라보며 살아가지는 않는 것.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 현실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순간을 발견하는 것. 삶의 모든 문제가 풀린 다음에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권오중의 가족에게도 평범한 하루는 긴 시간의 고민과 기다림을 거쳐 조금씩 의미를 달리하게 된 순간일 것이다. 모든 문제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 하루를 이전과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책을 통해 돌아보게 되는 것은 행복을 미래의 어느 지점에만 두고 살아가는 습관이다.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기면, 일이 해결되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걱정거리가 사라지면 그때 비로소 편안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어려움이 있는데 무조건 현재에 만족하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한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완벽해지는 날만 기다리다 보면, 그날이 오기 전까지의 삶을 온통 준비 기간으로만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어려움 속에서도 잠깐 웃을 수 있고, 걱정이 남아 있어도 누군가와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으며, 완벽하지 않은 하루에도 작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이 말하는 기적은 그런 순간을 알아보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한 가지를 마음에 남기고 싶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삶이 의미 있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픔이 남아 있어도 사랑할 수 있고,
불안이 사라지지 않아도 누군가와 웃을 수 있으며,
완벽하지 않은 하루에도 감사할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기다려온 하루가,
내게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하루일 수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질지 모른다.

《아픔이 아픔으로 끝나지 않도록》은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잠시 걸음을 늦추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지금 조금 긴 어둠을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도, 아무 일 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있는 사람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느라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못했던 사람에게도 건네주고 싶은 이야기다.

오늘의 아픔이 내일의 기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의 아픔 때문에 내일의 가능성까지 미리 포기할 필요도 없다.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과 함께 살아가더라도,
오늘 내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시간을 돌아보았을 때,
힘겨운 순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기를.

_

#아픔이아픔으로끝나지않도록 #권오중 #수오서재
#권오중에세이 #에세이추천 #에세이 #신간 #책소개
#도서리뷰 #책추천 #독서기록 #책스타그램 #하얀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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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서교책방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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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단맘 (@gbb_mom ) 님의 #르온서평단 을 통해
서교책방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하였습니다.
_

완벽해 보이는 삶을 향한 질투, 그 우아한 얼굴 아래 숨겨진 위험한 욕망.

누군가의 삶이 유난히 눈부셔 보이는 순간이 있다. 좋은 집과 넉넉한 재산, 다정한 배우자, 사랑스러운 가족, 그리고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일상.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 사람의 삶을 잠시 동경하는 것과 그 삶을 통째로 차지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 다른 문제지만, 그 경계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무너지는 걸까?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어떻게 집착으로 변하고, 그 집착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위험한 계획으로 발전하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악의가 반드시 거칠고 위협적인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때로 악의는 상냥한 미소와 세심한 배려, 상대를 이해하는 듯한 말투를 빌려 가장 자연스럽게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내게는 허락된 적 없는 모든 것이”

주인공 앰버 패터슨에게 대프니 패리시는 아름다운 외모와 부유한 환경,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 풍요로운 가정까지. 앰버의 눈에 비친 대프니는 자신이 평생 가져보지 못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존재다. 앰버는 그 세계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연을 가장해 대프니에게 접근하고, 그녀의 마음을 얻으며, 마침내 그 삶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다.

그녀의 목표가 무서운 이유는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삶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데 있다.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보며 자신에게도 그런 삶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과, 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 사이에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앰버는 그 선을 조금씩 지워간다.


책 속에서 앰버는 대프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도 그녀가 착용한 귀걸이와 팔찌,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격을 계산한다. 대프니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이야기하는 순간조차 앰버에게는 상대의 감정을 이해할 기회가 아니라, 자신과 상대의 처지를 비교할 기회일 뿐이다.

🔖“마른 55 사이즈 몸에 적어도 십만 달러를 걸치고 다니면서 어린 시절이 슬펐다고 징징거리기나 하다니.”

이 문장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이유는 앰버의 질투가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는 대프니가 가진 물질적인 풍요를 보면서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처까지 무시한다. 부유한 사람에게도 슬픔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보다 많이 가진 사람은 고통마저 사치처럼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장면을 읽으며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이 얼마나 쉽게 왜곡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보면서 자신의 평범한 하루와 비교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의 삶은 겉으로 드러난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과 감정, 관계의 복잡함까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눈앞에 보이는 몇 가지 조건만으로 상대의 삶 전체를 판단한다.

앰버의 문제는 대프니를 부러워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부러움을 자신의 결핍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대신, 상대를 향한 적대감으로 바꾸고 있다는 데 있다.

질투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감정이지만, 집착은 상대가 가진 것마저 내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 순간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대프니의 삶을 향한 앰버의 욕망이 점점 커질수록 그녀의 행동은 더욱 정교해진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고, 관심을 끌 만한 선물을 준비하고, 신뢰를 쌓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조절한다. 잭슨에게 고서인 [라스코 동굴벽화]를 선물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앰버는 상대의 취향을 파악하고 그것을 관계를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이처럼 평범한 인간관계에서 출발하는 신뢰가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보여준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일과 누군가의 마음을 이용하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전혀 다르다.

이 작품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부분은 대프니의 삶을 바라보는 앰버의 시선이다.

🔖“앰버는 아기 때부터 삶의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는 이런 세계에서 자라면 느낌이 어떨지 궁금했다.”

이 문장에는 앰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담겨 있다. 그녀가 부러워하는 것은 지금 눈앞에 놓인 저택이나 보석만이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과는 다른 기회를 누리고,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며,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삶 자체를 탐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사실은 때로 깊은 박탈감을 낳고,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 자신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고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앰버의 질투에는 이러한 결핍의 감각이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핍이 타인을 해치는 행동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이해하는 것과 용납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앰버가 왜 그런 욕망을 품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녀의 행동을 변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면이 어떤 감정에서 출발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다.

누군가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의의 형태로 시작되지 않을 수도 있다. 불공평하다는 생각, 억울함, 부러움, 자신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감각이 반복되면서 상대의 행복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질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상대가 가진 것을 얻는 일이 자신의 삶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진다면, 욕망은 위험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앰버는 자신의 결핍을 타인의 삶을 통해 해결하려는 인물이며,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욕망을 정당화한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삶을 빼앗으려는 욕망은 타인을 한 사람의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연결된다.

반면 대프니의 이야기를 읽을 때는 또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우리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삶은 정말 완벽할까?'

앰버가 바라보는 대프니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과 그 삶의 안쪽에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풍요로움만으로는 그 사람의 감정이나 관계의 실체를 모두 알 수 없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비밀과 수상한 단서들은 독자로 하여금 인물에 대한 판단을 끊임없이 다시 하게 만든다.


특히 앰버가 대프니의 집에서 발견하는 진주 손잡이의 작은 권총과 총열에 새겨진 'YMB'라는 머리글자는 평온해 보이는 공간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름답게 정돈된 방과 오래된 물건들 사이에 놓인 총은 그 자체로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왜 그곳에 총이 있는지, 그 이니셜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지금까지 보아온 인물들의 모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런 단서가 흥미로운 까닭은 사건의 정체를 알고 싶게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공간과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익숙했던 풍경에 작은 의문 하나가 놓이는 순간, 그 풍경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리 스릴러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관찰하며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하고, 몇몇 단서를 연결해 이야기를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면 앞서 내렸던 판단을 수정해야 한다. 확신했던 해석이 흔들리고, 사소하다고 여겼던 장면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앰버와 대프니의 시점을 통해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누구의 이야기를 먼저 듣느냐에 따라 인물에 대한 인상도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독자는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인물을 믿고 판단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책을 읽으며 생각하게 된 또 하나의 주제는 '완벽한 삶'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다. 앰버는 대프니가 가진 것을 차례로 바라보며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녀가 원하는 삶을 손에 넣는다고 해서 자신의 결핍까지 사라질 수 있을까?

욕망은 대상을 얻는 순간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비교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비교 대상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더라도 그것을 잃을까 봐 불안해질 수 있다. 타인의 삶을 기준으로 자신의 행복을 측정하는 동안에는 자신이 가진 것조차 온전히 바라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대프니의 삶이 앰버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 앰버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동시에, 설령 성공한다 해도 그것이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이러한 심리적 질문을 긴장감 있는 사건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 인물들의 욕망과 비밀이 얽히면서 이야기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고, 독자가 예상했던 결론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앞서 등장한 장면과 대사를 기억하며 읽을수록 인물의 행동을 다시 해석하게 되고, 누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인물을 쉽게 믿거나 단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질문이 놓여 있다.

누군가가 가진 것을 부러워할 때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갖고 싶은 일부만을 보고 있는가?

책을 읽으며 마음에 남는 것은 완벽해 보이는 삶을 향한 동경이 얼마나 쉽게 왜곡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집착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삶이 눈부셔 보일 때, 그 삶을 부러워할 수 있다. 더 나은 조건을 원할 수도 있고, 지금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꿈꿀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반드시 누군가의 것을 빼앗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필요는 없다. 타인의 행복이 나의 불행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삶이 빛난다고 해서 나의 삶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타인의 삶을 훔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행복을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되묻게 하는 이야기다.

그토록 갖고 싶어 하는 삶은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더욱 빛나 보이는 삶일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보며 자신의 결핍만 확인하다 보면, 어느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일보다 타인의 삶을 차지하는 일에 더 많은 마음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삶의 이면에 숨겨진 비밀, 선망과 질투가 뒤엉킨 심리, 믿음과 의심 사이를 오가는 긴장감. 이 모든 요소가 맞물리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

화려한 저택과 아름다운 장신구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고 믿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확인하는 순간, 독자는 마지막 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 이야기를 쉽게 놓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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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 제16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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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99퍼센트가 사라진 세계. 문명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간다. 그 황량한 세상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소녀 서브와 그녀를 돌보는 남자 노먼은 자전거를 타고 먼 길을 떠난다. 두 사람이 향하는 곳은 인류 재건의 희망이 기다린다는 도시 지텍이다.

오수완 작가의 《에케 호모》는 재난 이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만,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살아남는 방법보다 무엇을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을까.
생존이 최우선인 세상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은 사치가 되는 것일까.
그리고 세상을 다시 세운다는 명분 아래 가장 먼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은 폐허를 가로지르는 두 사람의 여정을 따라가며 이러한 질문들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낯선 세계의 비밀을 알아가는 SF의 재미와 두 인물이 서로에게 가족이 되어 가는 과정이 맞물리면서,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까지 들여다보는 여정이 된다.


재난이 일어나고 문명이 붕괴하면 사람들은 무엇부터 복구하려 할까.
무너진 건물을 세우고, 먹을 것을 구하고, 안전한 거처를 마련하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서 예술과 문학, 교육 같은 것들은 뒤로 밀려나기 쉽다.

하지만 생존에 필요한 것만 남긴 세상은 과연 인간이 살아갈 만한 세상일까.

책 속에서 노먼은 서브에게 책 읽는 법을 가르친다. 서브가 글자를 알아보고, 모르는 글자를 익히고, 마침내 혼자 책을 읽어 나가는 과정은 무척 인상적이다.

🔖“아무 책이나 집어 그림을 보고 글자들을 읽는다. 아는 글자도 모르는 글자도 있다. 읽을수록 아는 글자들이 많아진다. 나는 쌓아둔 책들을 차례로 읽는다.”

이 문장에서 배움이란 누군가가 정답을 알려주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글자가 조금씩 의미를 갖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한 겹씩 넓어진다. 서브에게 책은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고, 타인의 생각을 만나고, 언젠가 홀로 남겨지더라도 자기만의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 주는 도구다.

특히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에서 책을 가르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스스로 상상하도록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먼과 서브의 관계를 생각하다 보면 사랑과 책임이라는 단어 앞에 오래 머물게 된다.

노먼은 서브를 보호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 낸다. 그는 서브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타인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도 알려 주려 한다. 하지만 무너진 세상에서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고, 다른 사람을 돕는 선택이 때로는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를 위해 이 기록을 남겨둔다. 네게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 나에 대해, 내가 한 일들에 대해. 선택과 이유에 대해.”

이 기록에는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고 싶은 마음과 언젠가 그 선택을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내린 결정은 당사자에게 언제나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고, 불가피했다고 생각했던 선택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이 문장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

🔖“어쩌면 나의 행동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했는지 알려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노먼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꼈다. 누군가를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언제나 정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믿더라도 자신의 판단이 옳았는지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책임이란 자신의 선택이 남긴 결과를 끝까지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에게 무엇이 좋은지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선택권을 대신 행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보호는 언젠가 스스로 판단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가까울 것이다.

노먼이 서브에게 책을 읽게 하고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는 서브가 지금 당장 안전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신이 곁에 없을 미래에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사랑의 가장 따뜻한 모습이면서도 가장 아픈 모습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자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일이기도 하니까.


작품 속 프라임을 둘러싼 믿음 역시 흥미로웠다. 어떤 이들은 강림을 파괴와 죽음의 재난으로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것을 새로운 시대를 위한 시련이라고 해석한다. 같은 사건을 경험하고도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믿음이 인간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또 그 믿음이 어떻게 위험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믿음은 절망 속에서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확신하는 순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만이 아니라, 그 믿음이 실제로 어떤 행동을 만들어 내느냐는 점일 것이다. 누군가를 살리고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믿음과 타인을 배제하고 희생시키는 믿음은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은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까.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말에서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 앞에서 실제로 보여 주는 행동에서일까.

나는 《에케 호모》가 인간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설명하기보다, 구체적인 선택의 순간에 세워 놓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느꼈다. 인간은 자신을 선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선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선택했고, 그 선택으로 누가 살아남았으며, 누구의 고통을 외면했는지 돌아볼 때 비로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엑스포를 선전하는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만들어가는 미래. 살아 있는 역사.”

미래를 만든다는 말은 희망적으로 들린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세울 수 있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나 미래를 만든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그 미래에 포함되는 사람과 배제되는 사람은 누구일까.


재난 이후의 사회에서도 기존의 차별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되풀이된다. 노먼은 서브에게 책을 사 주려 하지만, 한 가게의 여자는 인류를 재건하는 데 책은 필요하지 않다는 취지로 말한다. 남성과 여성에게 서로 다른 역할을 부여하고, 개인의 배움보다 인류의 재생산을 앞세우는 사고방식이다.

세계가 무너졌다고 해서 오래된 편견까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는 기존의 권력관계가 더 강하게 되살아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불안할수록 익숙한 규칙에 의지하고, 누군가에게 정해진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문명을 복구한다는 말이 반드시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우고 인구를 늘린다고 해서 사회가 저절로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차별과 억압을 그대로 되살린다면,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는 이름만 다를 뿐 과거의 문제를 반복할 수 있다.

진정한 재건은 무엇을 복원할 것인지 선택하는 데서 시작된다. 과거의 모든 것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가치는 이어 가고 버려야 할 잘못은 반복하지 않는 것. 이것이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유산일 것이다.



책 속에서 노먼은 강림 이전의 영화를 복원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 서브에게도 그 영화를 보여 주고 싶어 한다. 영화는 자신이 기억하는 세계를 서브와 나누고, 그녀에게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시대의 문화를 전해 주는 매개가 된다.

이 설정이 특히 좋았다. 인류의 대부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영화 한 편을 함께 본다는 계획은 얼핏 사소해 보인다. 먹을 것과 안전이 먼저인 상황에서 영화는 반드시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생존을 보장해 주는 기술도 아니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지닌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누군가와 나누고, 같은 장면을 보며 웃고,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이야말로 삶을 생존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 준다.


특히 서브와 노먼에게 영화 관람은 두 사람만의 기억이 될 수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함께 경험한 순간은 두 사람의 관계 안에 남는다. 문명의 역사가 사라지더라도 개인의 기억과 감정은 또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만들어 간다.

책을 읽으며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생각했다. 좋아하는 책을 권하고, 인상 깊은 문장을 보여 주고, 어떤 장면이 마음에 남았는지 이야기하는 일. 그런 평범한 행동들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세계를 내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에케 호모》라는 제목을 다시 떠올려 본다. 이 사람을 보라.

그 말은 누군가를 손가락질하며 평가하라는 뜻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요청처럼 다가온다. 그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를 지키려 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천천히 들여다보라는 뜻으로 말이다.

세상이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하지만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 삶의 의미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관계를 맺고, 기억을 전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며,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계를 준비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은 과거의 문명을 똑같이 복원하는 능력만이 아닐 것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판단하는 지혜,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 그리고 정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순간에도 자신의 선택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서브가 책을 읽으며 세계를 알아 가듯, 우리 역시 타인의 이야기와 경험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상을 배운다. 책 한 권이 당장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한 사람의 시야를 넓히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런 변화가 쌓인다면 새로운 세계는 훨씬 작은 곳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무너진 도시를 다시 세우는 일보다 어려운 것은 무너진 마음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구한다는 말보다 어려운 것은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끝난 뒤에도 우리가 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이 인간을 인간답게 대하려는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우고, 기억하고, 자신의 선택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마음 말이다.

폐허가 된 세계를 달리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되돌려 주는 질문은 그래서 더욱 묵직하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겠다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언젠가 다시 이 책을 펼친다면,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마음으로 '이 사람을 보라'라는 제목을 읽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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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책읽는쥬리 (@happiness_jury ) 님 서평단 모집을 통해 #다산북스 (@dasanbooks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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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호모 #오수완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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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씨리얼 세계문학 4
알베르 카뮈 지음, 이하영 옮김 / 씨리얼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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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요조앤님 ( @yozo_anne )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씨리얼 출판사 ( @seereal_7 ) 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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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는 사람,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확신을 담아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 삶을 바꾸고 싶으냐는 물음에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뫼르소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감정의 언어와 사회가 정해 놓은 삶의 방식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그래서인지 《이방인》을 읽으면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만으로도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첫 문장부터 낯선 분위기의 세계로 데려간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문장인데도 그 안에는 독자가 기대하는 슬픔이나 충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사건보다 전보에 적힌 날짜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 첫 문장은 뫼르소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인 동시에, 독자 자신의 감정에 대한 기준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처럼 다가왔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슬퍼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며,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배워 왔다. 물론 그러한 감정과 태도는 자연스럽고 소중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하는 감정,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칙이 된다는 데 있다.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 냉정한 사람이 되며, 남들이 기대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받곤 한다.

뫼르소는 바로 그 규칙에 맞춰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인물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장례 다음 날에는 마리와 수영을 하고 영화를 보며, 다시 평범한 일상을 이어 간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의 행동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슬퍼해야 하고, 슬펐다면 그 슬픔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슬픔의 깊이까지 단정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슬픔을 실감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다.

물론 뫼르소의 태도를 모든 사람의 감정 표현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그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 감정을 꾸며 내지 않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다른 사람만큼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리가 사랑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약속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이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일 수 있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 말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뫼르소의 솔직함을 무조건 자유롭고 올바른 태도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거짓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솔직하지만, 그 솔직함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지 깊이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방인》은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지 않는 자유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뫼르소는 그 간격을 드러내는 인물이며, 독자는 그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솔직함과 배려의 경계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직장 생활과 미래에 관한 대화에서도 뫼르소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사장이 삶을 바꾸고 싶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삶을 바꿀 수 없고, 어떤 삶이든 다 비슷하며, 지금 여기서 사는 것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문장은 처음에는 무기력한 체념처럼 읽힌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대신,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대답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성공의 공식에 대한 질문도 숨어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면 발전할 의지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은 반드시 실패한 삶일까?

이 장면은 내가 원하는 삶과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남들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야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미래의 계획을 늘어놓지도 않고,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골라 말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설명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일상의 일부다.

그런데 사회는 설명하지 않는 사람을 불편해한다. 사람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선택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며, 감정에는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거부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쉽게 오해받는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이 반드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방인》을 읽으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지점은 뫼르소가 저지른 행위이다.

작품은 이 사건을 둘러싼 강렬한 햇빛과 열기, 신체적인 불편함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뫼르소의 시선은 추상적인 도덕적 판단보다 눈앞의 빛과 열기, 몸이 느끼는 자극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냈다. 내가 한낮의 균형을, 행복했던 해변의 특별한 침묵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태양과 열기가 그에게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의 감정이 사회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무조건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사회의 기대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뫼르소는 자신이 한 행동을 도덕적 언어로 길게 해석하거나, 자신의 내면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감각과 행동이 전면에 놓인다. 독자는 그 건조한 서술 때문에 사건의 무게를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이처럼 뫼르소가 감정을 꾸며 내지 않는 태도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행동 앞에서는 그 공감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이 던지고자 하는 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일과 그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일은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누군가의 내면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잘못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하나의 낙인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는 일도,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도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으로 누가 상처받았는지, 무엇에 책임져야 하는지를 함께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오늘의 시선으로 읽을 때는 또 하나의 질문을 놓칠 수 없다.
피해자는 끝내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작품 속에서 주로 ‘아랍인’으로 불린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다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 인물이 충분한 목소리와 개별성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뫼르소의 감정과 재판에 독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동안, 피해자의 삶은 얼마나 보이는가. 주인공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정작 사건의 피해자를 이야기 바깥으로 밀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이방인》을 읽는 경험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한 인간의 낯선 태도를 이해하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해의 과정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중심에 놓이고 누구의 존재가 희미해지는지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재판은 작품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확장한다. 그의 잘못된 행동이 부른 결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점과 장례 다음 날 마리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문제 삼는다.

재판에서 피고인의 행동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 자체가 반드시 부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뫼르소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애도와 후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만큼이나, 사람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 있을까? 장례 다음 날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슬픔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재판은 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인지 판단하는 자리가 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을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과장해 선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결국 사회가 기대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더욱 낯선 존재가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저지른 행동뿐 아니라, 타인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비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태도는 관계에서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마음을 헤아리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만을 근거로 사람의 내면을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해보다 판단을 먼저 하게 된다.


《이방인》은 사회적 규범이 개인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다, 그 규범이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고, 같은 말로 사랑을 표현하며, 같은 표정으로 후회해야만 인간다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사회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은 ‘부조리’다. 인간은 삶에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세상에 질서가 있으며, 자신의 고통과 선택이 어떤 의미로든 설명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계가 언제나 원하는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까뮈가 탐구한 부조리는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와 그 욕구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충돌에 가깝다.


뫼르소는 처음부터 이러한 간극을 특별히 고민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둘러싼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를 악에서 씻어 내고 희망을 비워 버린 것처럼, 징조와 별로 가득한 이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온화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상의 온화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만하다. 무관심은 보통 차갑고 외로운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내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뫼르소는 세계의 무관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역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세계가 나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자유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세계가 자신에게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되는 자유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끊임없이 답을 요구하게 된다. 모든 삶에는 정해진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 그 목적을 찾지 못한 자신을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가 언제나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뫼르소가 마지막에 느끼는 자유를 죽음이나 책임으로부터의 해방으로만 읽고 싶지는 않다. 그의 깨달음은 과거의 행동을 없애거나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한 인간의 내적 변화로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것과,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뫼르소. 그는 솔직한 사람인가, 무심한 사람인가. 사회의 위선에 저항하는 인물인가, 타인의 마음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그 모든 해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인물인가.

이처럼 이 작품의 힘은 바로 이런 모호함에 있을 것이다. 뫼르소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의 행동 앞에서는 다시 멈춰 서게 되니까.

그래서 《이방인》은 어떤 사실을 중심에 두고 판단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는 작품에 가깝다.

나는 타인의 다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다름과 잘못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뫼르소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1942년에 발표된 《이방인》이 오늘날에도 읽히는 이유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다루는 감정과 사회의 규범,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질문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감정을 판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며,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한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해를 풀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단순하게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감정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씨리얼 판 《이방인》은 이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뫼르소의 낯선 태도와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며 부조리라는 문제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읽었던 독자라면 세월이 흐른 뒤 달라진 자신의 시선으로 작품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문장도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무심함으로만 보였던 태도가 이제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질문으로 읽힐 수 있고, 자유로워 보였던 인물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고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내는 책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모든 행동이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일, 이해와 판단을 구분하는 일,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일.

이방인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낯선 존재로 만들어 왔는지 깨닫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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