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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ㅣ 씨리얼 세계문학 4
알베르 카뮈 지음, 이하영 옮김 / 씨리얼 / 2026년 9월
평점 :
※본 게시물은 요조앤님 ( @yozo_anne ) 이 모집한 서평단에 선정되어 씨리얼 출판사 ( @seereal_7 ) 로부터 해당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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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울지 않는 사람,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확신을 담아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 삶을 바꾸고 싶으냐는 물음에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뫼르소는 익숙하게 알고 있는 감정의 언어와 사회가 정해 놓은 삶의 방식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그래서인지 《이방인》을 읽으면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만으로도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곤 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은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첫 문장부터 낯선 분위기의 세계로 데려간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문장인데도 그 안에는 독자가 기대하는 슬픔이나 충격이 드러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사건보다 전보에 적힌 날짜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태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에게는 무심하고 냉정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반응이다. 하지만 이 첫 문장은 뫼르소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인 동시에, 독자 자신의 감정에 대한 기준을 돌아보게 하는 질문처럼 다가왔다.
가까운 사람을 잃으면 슬퍼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며,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야망을 가져야 한다고 배워 왔다. 물론 그러한 감정과 태도는 자연스럽고 소중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어느 순간부터 반드시 보여 주어야 하는 감정, 반드시 따라야 하는 규칙이 된다는 데 있다. 슬픔을 충분히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은 사람이 되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면 냉정한 사람이 되며, 남들이 기대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받곤 한다.
뫼르소는 바로 그 규칙에 맞춰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인물이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장례 다음 날에는 마리와 수영을 하고 영화를 보며, 다시 평범한 일상을 이어 간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의 행동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된다. 어머니를 사랑했다면 슬퍼해야 하고, 슬펐다면 그 슬픔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슬픔의 깊이까지 단정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울음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으로 자신을 지탱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슬픔을 실감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는 없다.
물론 뫼르소의 태도를 모든 사람의 감정 표현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그는 타인의 기대에 맞춰 감정을 꾸며 내지 않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에게는 세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다른 사람만큼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리가 사랑하느냐고 묻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사랑이라는 말은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가.
누군가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약속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이며,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일 수 있다. 그러나 뫼르소는 그 말에 사람들이 기대하는 확실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 장면을 읽으며 뫼르소의 솔직함을 무조건 자유롭고 올바른 태도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거짓으로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솔직하지만, 그 솔직함이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전달될지 깊이 고민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이방인》은 타인의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지 않는 자유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책임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뫼르소는 그 간격을 드러내는 인물이며, 독자는 그의 태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솔직함과 배려의 경계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직장 생활과 미래에 관한 대화에서도 뫼르소의 태도는 변하지 않는다. 사장이 삶을 바꾸고 싶지 않으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삶을 바꿀 수 없고, 어떤 삶이든 다 비슷하며, 지금 여기서 사는 것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 문장은 처음에는 무기력한 체념처럼 읽힌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거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는 대신, 지금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말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이 대답에는 당연하게 여기던 성공의 공식에 대한 질문도 숨어 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고 말하면 발전할 의지가 부족한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 모든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삶은 반드시 실패한 삶일까?
이 장면은 내가 원하는 삶과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 혹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전에 남들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뫼르소는 자신의 삶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야망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미래의 계획을 늘어놓지도 않고, 남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골라 말하지도 않는다. 그에게는 설명하지 않는 태도 자체가 일상의 일부다.
그런데 사회는 설명하지 않는 사람을 불편해한다. 사람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선택에는 목적이 있어야 하며, 감정에는 이해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명을 거부하거나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쉽게 오해받는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일인 동시에, 그 사람이 반드시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는 일이 아닐까.
그러나 《이방인》을 읽으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지점은 뫼르소가 저지른 행위이다.
작품은 이 사건을 둘러싼 강렬한 햇빛과 열기, 신체적인 불편함을 감각적으로 드러낸다. 뫼르소의 시선은 추상적인 도덕적 판단보다 눈앞의 빛과 열기, 몸이 느끼는 자극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냈다. 내가 한낮의 균형을, 행복했던 해변의 특별한 침묵을 깨뜨렸다는 것을 알았다.”
태양과 열기가 그에게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책임을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의 감정이 사회의 기대와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무조건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그가 사회의 기대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건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뫼르소는 자신이 한 행동을 도덕적 언어로 길게 해석하거나, 자신의 내면을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감각과 행동이 전면에 놓인다. 독자는 그 건조한 서술 때문에 사건의 무게를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이처럼 뫼르소가 감정을 꾸며 내지 않는 태도에는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지만, 그의 행동 앞에서는 그 공감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 작품이 던지고자 하는 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일과 그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일은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까. 누군가의 내면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잘못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존재 전체를 하나의 낙인으로 규정할 수도 없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는 일도,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는 일도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으로 누가 상처받았는지, 무엇에 책임져야 하는지를 함께 바라보는 일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오늘의 시선으로 읽을 때는 또 하나의 질문을 놓칠 수 없다.
피해자는 끝내 이름을 가진 한 사람으로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작품 속에서 주로 ‘아랍인’으로 불린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배경으로 한다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면, 이 인물이 충분한 목소리와 개별성을 부여받지 못했다는 사실도 중요하게 다가온다.
뫼르소의 감정과 재판에 독자의 관심이 집중되는 동안, 피해자의 삶은 얼마나 보이는가. 주인공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정작 사건의 피해자를 이야기 바깥으로 밀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이방인》을 읽는 경험을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한 인간의 낯선 태도를 이해하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해의 과정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중심에 놓이고 누구의 존재가 희미해지는지도 함께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뫼르소의 재판은 작품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확장한다. 그의 잘못된 행동이 부른 결과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점과 장례 다음 날 마리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까지 문제 삼는다.
재판에서 피고인의 행동과 태도를 살펴보는 것 자체가 반드시 부당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뫼르소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애도와 후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가 무엇을 했는지만큼이나, 사람들이 그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지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뫼르소는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확정할 수 있을까? 장례 다음 날 영화를 보았다는 사실만으로 그에게 슬픔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재판은 한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인지 판단하는 자리가 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행동을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이야기로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을 과장해 선보이지도 않는다. 그는 결국 사회가 기대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더욱 낯선 존재가 된다.
이 장면을 읽으며 사람은 때때로 자신이 저지른 행동뿐 아니라, 타인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이유로도 비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표현하는 태도는 관계에서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그 마음을 헤아리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만을 근거로 사람의 내면을 전부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해보다 판단을 먼저 하게 된다.
《이방인》은 사회적 규범이 개인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보다, 그 규범이 사람의 내면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슬퍼하고, 같은 말로 사랑을 표현하며, 같은 표정으로 후회해야만 인간다운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 사회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은 어디에 설 수 있을까.
작품에서 중요한 개념은 ‘부조리’다. 인간은 삶에 이유가 있기를 바라고, 세상에 질서가 있으며, 자신의 고통과 선택이 어떤 의미로든 설명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계가 언제나 원하는 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까뮈가 탐구한 부조리는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욕구와 그 욕구에 확실한 답을 주지 않는 세계 사이의 충돌에 가깝다.
뫼르소는 처음부터 이러한 간극을 특별히 고민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삶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고, 자신의 선택에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둘러싼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를 악에서 씻어 내고 희망을 비워 버린 것처럼, 징조와 별로 가득한 이 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온화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었다.”
‘세상의 온화한 무관심’이라는 표현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만하다. 무관심은 보통 차갑고 외로운 감정으로 받아들여진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때로 내가 중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뫼르소는 세계의 무관심을 받아들이는 순간 오히려 자신이 행복했으며 지금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역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세계가 나에게 아무런 답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자유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세계가 자신에게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는 데서 시작되는 자유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끊임없이 답을 요구하게 된다. 모든 삶에는 정해진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믿으면 그 목적을 찾지 못한 자신을 실패한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세계가 언제나 명확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뫼르소가 마지막에 느끼는 자유를 죽음이나 책임으로부터의 해방으로만 읽고 싶지는 않다. 그의 깨달음은 과거의 행동을 없애거나 피해자의 존재를 지우는 면죄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한 인간의 내적 변화로 읽을 수 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내려놓는 것과,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는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뫼르소. 그는 솔직한 사람인가, 무심한 사람인가. 사회의 위선에 저항하는 인물인가, 타인의 마음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그 모든 해석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인물인가.
이처럼 이 작품의 힘은 바로 이런 모호함에 있을 것이다. 뫼르소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의 행동 앞에서는 다시 멈춰 서게 되니까.
그래서 《이방인》은 어떤 사실을 중심에 두고 판단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는 작품에 가깝다.
나는 타인의 다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으며, 그 다름과 잘못을 어떻게 구분하고 있는가. 뫼르소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이다.
1942년에 발표된 《이방인》이 오늘날에도 읽히는 이유는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다루는 감정과 사회의 규범,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관한 질문이 지금 우리의 삶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인의 감정을 판단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에 자신을 맞추며, 삶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고민한다.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하면 이유를 설명해야 하고, 기대와 다른 반응을 보이면 오해를 풀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만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이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는 단순하게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는 낯선 인물이 아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감정의 규칙을 발견하고, 그 규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게 된다.
씨리얼 판 《이방인》은 이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뫼르소의 낯선 태도와 사건의 전개를 따라가며 부조리라는 문제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이미 읽었던 독자라면 세월이 흐른 뒤 달라진 자신의 시선으로 작품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문장도 읽는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 예전에는 무심함으로만 보였던 태도가 이제는 사회적 규범에 대한 질문으로 읽힐 수 있고, 자유로워 보였던 인물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충분히 바라보지 못하는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고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내는 책인지도 모른다.
세상이 나를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이해받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모든 행동이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의 감정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일, 이해와 판단을 구분하는 일,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선택과 책임을 외면하지 않는 일.
이방인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쉽게 누군가를 낯선 존재로 만들어 왔는지 깨닫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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