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종류의 상처는 결코 아물지 않는다.

한 번 그런 상처를 안게 되면 평생 슬픔이라는 이름의 고름을 계속 짜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1992년 유고 연방은 신유고슬라비아(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연방),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등 다섯 나라로 해체되었다.

이 다섯 나라 간에는 종교와 민족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피와 눈물로 변할 조짐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89년 세르비아의 대통령직에 오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구 유고연방 내에서의 세르비아계에 의한 통치 '大 세르비아 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써 1992년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 계 주민 보호를 구실로 한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 공습과 포위공격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세르비아 계에 의한 인종청소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세르비아 군뿐 아니라 바로 이전까지 같이 생활하던 세르비아 계 주민들도

'주의'의 혼령에 홀려 악마로 변해갔다.

'아뎀의 손은 근육이 딱딱하고, 크고 험한 전형적인 농부의 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손을 잡고  흔들었을 때 그 손에 힘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같은 마을 남자 35명이 이웃 마을 세르비아계 사람들에게 잡혀가 목이 베여 살해된 날 밤, 그의 정신과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서도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이다.  (중략)  마을 사람들은 친구이던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살해됐다. 바로 전 해 가을만 해도 서로 도와가며 추수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사춘기 시절, 모험과 비밀을 서로 나누고, 무더운 여름날 밤에는 드리나 강에서 함께 알몸으로 헤엄도 치고'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피터 마쓰 -

이러한 인종청소와 더불어, 조직적인 강간이 자행되었다.

'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이 저질렀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스니아  여성 2만 명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으며,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던 과거를 (중략) 특히 세르비아군의 강간은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스니아 여성에게 세르비아 혈육을 낳게 만들려는 치밀한 ‘인종 청소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더욱 큰 충격을 던져준다.' - 씨네큐브 상영작정보 -

 

그렇다면 이 영화 그르바비차는 참혹했던 보스니아 내전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아니다.

 

영화는 내전 종식 이후 10여년이 지나 사라예보의 한 마을인 그르바비차에서 살아가는

어느 모녀를 중심으로 상처 입은 채 남겨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머니 에스마는 남편이 전쟁에 참전하여 사망한 후 혼자서 딸 사라를 기르며 살아가고 있다.

친구 같은 모녀이지만, 에스마에게는 어딘지 모를 그림자가 있고,

전쟁 이후 어려운 경기에 돈을 버는 일이 쉽지 않다.

더구나 딸 사라의 학교에서 해외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면서

그 경비 200유로가 절실하게 필요해진다.

다행히 사라는 아버지의 전사증명서가 있으면

그 경비가 무료라는 공지를 듣고 와 에스마에게 전하게 되는데,

왠지 에스마의 반응이 이상하다.

급하지 않다던가, 법원에 가지 못했다던가 하는 핑계를 대며 전사증명서를

떼오지 않던 에스마는 마지막 날 돈을 지불하는 방법으로 사라를 수학여행에 등록시켜준다.

그러한 에스마의 모습에 사라는 의구심을 품게 되고

정말로 아버지는 누구였는지 진실을 말해달라며 악을 쓴다.

결국 에스마는 자신이 조직적인 강간의 희생자이며,

그 결과로 딸인 사라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기에 이른다.

 

영화 내내 에스마가 과거를 떨치지 못하고 - 어떻게 떨칠 수 있겠는가 -

고통 받는 모습이 그려진다.

더구나 그 기억은 딸 사라와 함께 있는 한 계속 떠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스마는 그런 기억을 담아두면서도

사라를 애정을 담아 기르고 있었고, 삶을 유지해나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에스마와 사라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돌아갈 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영화에서 묻어난다.

 

깊고도 깊은 전쟁의 상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의 모습.

영화는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울림을 자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림 앞에 우리는 보스니아 내전을 비롯한 전쟁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밖에 없게 되고,

삶과 인간의 격렬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힘을 느끼게 된다.

 

감독은 제 5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서

“13년 전 보스니아에서 2만 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10만 명을 살해한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가 아직도 유럽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유럽이고 아무도 그들을 잡는데 관심이 없다.

이 작은 영화가 보스니아에 대한 당신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한다.

그리고 이후 믈라비치가 체포되는 등의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모습이 전쟁과 그 이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봄이라면,

수학여행을 보내는 자리에서 어색하게 서로 손을 흔드는 모녀의 모습으로부터 

진실의 고백을 통해 모녀가 더욱 애정과 신뢰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그래서 그녀들의 삶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것은

삶에 대한 희망일 것이다. 

 

'그르바비차'라는 98분의 영화를 통해 이러한 감동을 느껴보기를 추천한다.

 

사족) 영화를 보러 들어가니 굉장히 나이드신 어르신들이 앉아계셨다.

        이분들은 가난한 시절도 겪어보셨고, 자식도 길러보신 분들인지라

        영화에 대한 공감이 나보다 깊은 듯 하였다.

        혹 그분들 중에 6. 25를 겪은 분들도 있었을까?

        그러고보면 '그르바비차'에서 보이는 전쟁의 상처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겪었던 그것과도 이어지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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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인이서 그런 것일까.

반하고 연애하고 이별하는 사랑의 모든 국면 - 즉, 분석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것을

참 분석적으로 써놓았다.

그것도 소설이라는 형태로.

 

자, 어떤 소설에서는 사랑을 받게 되자 오히려 연인에게 못살게 구는 사람의 모습을

그 못된 정도와 몰려오는 죄책감,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마음 속의 무엇으로 묘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사랑을 하면서 보답을 생각지 않았는데 정작 보답을 받게 되자

자신에게 그런 자격이 없다는 느낌에 당황하게 되는 심리상태를 묘사한다.

그러한 심리는 능숙한 누군가는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미숙한 나에게는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전자의 소설에서 표현되는 마음 속의 무엇 정도로만 희미하게 인식되던 것이

이 책을 통해서 그 모습을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

 

굉장히 감탄한 것은 이렇게 사랑의 매 국면에 대해

그 흐름과 심리상태를 써내려면 자기 경험이 없이는 무리일듯 싶은데,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연애에 대하여 진행중일 때이든, 이별 후이든

이 정도로 깊게 사색했다는 것인가.

 

우리는 애정에 빠지고 애정을 즐기고 애정에 괴로워야 하지만,

애정에 대한 사색은 얼마나 하고 있을까.

오늘 무엇을 먹을까도 그렇게 고민하면서

삶에 돌이킬 수 없는 궤적을 남기는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럼 최소한 그에 대해 생각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겠지.

물론 작가가 자신이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알 수 없는 것으로 놔두되,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 설명했다.

 

어느 한편으로는 신기하다.

사랑에 빠진 건 우리 마음인데,

사랑을 빠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우리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지만 굳이 심리학 용어로 정리하지 않아도 정말로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나?

 

이 책은 사랑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라,

사랑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놔두고,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서 들려주는 책이고,

그 이야기 속에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이며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갔던 것들이 담겨있다.

(문득 사랑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깊을 수록 사랑에 대해 성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으로 지금까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1권을 추천할 뿐이었는데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추가했다.

사랑에 관해 조금은 더 알게 해주는 책.

그 알 수 없는 주제를 좀 더 알게 해주는 무엇이 있다면 정말 경이로울텐데,

그 경이 중 하나를 만나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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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였던가..

감기로 누워만 있다가 생필품을 사러 어쩔 수 없이 나가야만 했다.

나간 길에 뼈다귀해장국이 먹고 싶어져서 식당에 들어갔는데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총 3테이블에 각각 중국인, 조선족, 동남아계통의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한으로 추워하면서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면 항상 무리를 지어 다닌다.

환경이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그렇게 해야 좀 덜 외롭고 해를 입을 일도 적을 터이다.

하지만 이른바 조국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충분히 동떨어져 홀로 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더구나 내가 겪은 일처럼 홀로 있다는 것을 역설적이고 강렬하게 인식해버릴수도 있다.

 

5,6년 전쯤에는 혼자 무엇을 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아마 5,6년 전에 나는 남을 신경쓰지 않았나보다.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밖에 없어 고독도 몰랐던 것 같다.

 

이제는 고독이 무언지도 알고 옆에 사람이 있는 기쁨도 아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하다.

오히려 혼자 행동하는 것에 익숙해지려하는 편이고,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해서 완전히 익숙해진다 한들 이미 알아버린 감정을 잊기는 힘들다.

위에서 겪은 일과 유사한 일들을 겪는다면 또 그런 느낌에 휩싸이겠지.

일상으로부터 일격을 당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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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

이 중 상실의 시대를 제외한 4 작품은 동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연작이고,

그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

상실의 시대 또한 이 주제 안에 포함되는데,

'상실의 시대'라는 국내 제목은 썩 마음에 드는 편이 아니지만,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이끌어 낸 것에는 공감한다.

초기의 다섯 작품은 바로 이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다.

 

상실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작품마다 그것은 청춘의 한 순간이기도 하고,

자살한 연인이기도 하고,

권말해설에 의하면 학생운동에 매진했던 학창시절이기도 하다.

아마 그 모두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만이 남아 잃은 것들을 추억한다.

 

그래, 하루키 초기작은 잃은 것에 대한 추억이다.

그것들을 가졌던 순간은 너무나 짧다.

그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은 길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잃은 후의 고독은 가슴에 사무친다.

상실의 고통이 차라리 나를 지워버릴 비애라면 좋을텐데,

그게 아니라 고독이라는 점은

남겨진 나, 인식하기 싫은 그 상황을 더욱 뚜렷이 인식시킨다.

추억이 가을바람과도 같이 나를 감싸오면 결국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기 직전의 특정 시기에 하루키를 접해버린 나도

그 고독에 한참 동안이나 공명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바람에 나 자신이 깎여 없어지지 않은건

하루키 초기작이 갖는 또 다른 면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기에

오히려 나 자신의 완전한 포기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금 스스로를 추슬러 걸음을 내딛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루키 초기작의 주인공 중 그 상실감 때문에 자살하는 주인공은 없다.

고통은 고통대로 부여안고 삶을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는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에서는 그 삶을 향한 첫 반전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하루키의 다음 작품들로 넘어가고 있는 나로써는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된다.

이전 시기에 하루키를 접해 그 상실감에 공명해버린 난

무기력과 우울의 동굴을 언제까지고 내려갔었지만,

다행히 그 안에서 백골이 되지 않고  결국 끝을 찍고 돌아서는데 성공했다.

빛을 등 뒤에 두고 점점 멀어지는 걸음이 아니라

빛을 향해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하루키 작품이 어떤 조언을 해줄지 기대되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어떤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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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ian 2007-10-27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미에 써놓은 것과는 다르게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초기작이라고 봐야할 시기에 출판되었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읽어야겠다.
 

행복.

심란하게 하는구나.

네티즌 평에는 왠지 기대하고 봤다가 실망했다는 평이 많던데,

개인적으로는 공감 100%하면서 본 영화.

 

사랑이 생겨나고 그 사랑이 스러지는 과정이 별 다른 설명없이 보여지고 있다.

황정민이 서울에 다녀와 터미널에서 임수정을 만나는 장면에서

임수정이 황정민의 얼굴을 보며 못 생겨졌다고 말하는데,

나도 이전에 바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어서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이 대사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영화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데

이런 설명없는 장면들에 공감할 수 있다면 영화가 마음에 와닿을 것이고, 아니라면 별로겠지.

일부러 그런 설명들을 생략했는지, 그냥 없는건지는 모르겠다.

 

황정민은 요양소와 시골집으로 보여지는 사회 밖의 삶에도

클럽과 공효진의 집으로 보여지는 사회 속에서의 정처없는 삶에도

그 어느 한 쪽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마음에 연인들-임수정만 아니라 공효진도-은 상처를 입는다.

 

근데 어느 한쪽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마치 우리 모습같기도 하다.

정말로 도시와 사회를 떠나서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한가?

결국 어딘가에서는 돈이나 법을 통해 연결되어 있고,

떠나 있었던 만큼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도시 속에서 혼란스런 삶을 살아가다 보면

결국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피상적인 자극에 불과하고,

나 자신의 마음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는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나도 연인들도 모두 상처입고 흩어져 가버린다.

비슷한 시기에 사랑이라는 영화가 개봉하지 않았나?

행복을 보기 전에는 저 사랑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영화가 사랑뿐만 아니라 정말로 사람의 행복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인카피 -사랑, 그 잔인한 (행복) /변치않겠다는 새빨간 거짓말 - 너무 잘 만들었다.

저 카피만으로도 우울해진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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