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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1명 신청합니다. 1강 들었는데 유익한 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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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강 신청합니다. 안그래도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던 분야인데 마침 강의가 개설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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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사이버 팀의 마쉬와 동료들 앞에 새로운 사건이 나타난다.

살인 장면을 실시간으로 넷에 올리고 접속자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더 빨리 희생자를 죽이는 살인자.

추적은 쉽지 않고,

넷에 접속하여 낄낄대며 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간다.

 

메세지가 명확하다.

살인자보다도 사이트에 접속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이 살인을 지속시키는 공범들이다.

넷의 익명성을 뒤집어 쓰고 사람들의 잔혹한 면이 비어져 나오는 모습.

 

기술에 대해 맹목적으로 예찬할 필요도, 두려워만 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는 넷의 안좋은 면은 이미 현실아닌가?

현실을 기반으로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기에

영화가 별 다른 잔기술 필요없이 스릴을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1984 등의 디스토피아 소설에서 완벽한 통제에 의한 억압/고통을 볼 수 있었다.

반면 영화를 보고 넷+디스토피아를 머릿 속에서 돌려보니

통제불능으로부터 오는 공포/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조직이나 개인에 의한 테러로 입을 수 있는 피해가 점점 심각해지는 오늘날

익명성/통제불능의 세계야말로 우리에게 닥칠 가능성이 더 큰 것 아닐까?

 

성선설이나 성악설, 이 상황에는 무의미하다.

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인들 아닌가.

이미 타고난 성품과는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넷은 시작된다.

사람들의 도덕성에 기대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 넘어가고.

그렇다고 통제를 강화한다면 파시즘의 디스토피아가 되기 위한 계단을

착실히 오르는 것일테고.

 

와, 딜레마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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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삼국지 용의 부활은,

역사적 고증이나 복식이나 스토리나 캐릭터나 영 별로지만

세 가지 키워드로 만족할 수 있다면 보아도 좋다.

삼국지, 대규모 전쟁씬, 유덕화.

이 키워드만으로도 좋다면 즐길 수 있다.

 

연의 황후는 좀 더 힘들다.

예전에 읽었던 스타워즈 1의 리뷰 중에

아나킨과 아미달라 공주가 꽃밭에서 뒹구는 장면이 너무 구식인 느낌이 난다는 리뷰가 있었는데,

연의 황후의 로맨스 부분에서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더구나 이 로맨스가 국가/전쟁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면서

영화 자체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견자단이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무술씬이 많지도 않고,

전쟁씬도 용의 부활에 못 미쳐 결국 끌리는 부분이 별로 없는 영화가 되었다.

(옆에 앉았던 아가씨는 정말 재밌다며 일어섰지만, 솔직히 난 좀 힘들었다.

 누군가에게 같이 보자고 했으면 미안할 뻔 했다;;)

 

국가 간의 대립과 대규모 전쟁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도 어떻게든 로맨스를 끼워넣으려고들 한다.

물론 로맨스없이 풀타임을 가면 오히려 정신적 피로가 발생하긴 하겠지만서도,

이건 정말 무의미하다고 생각되는 말 그대로 그냥 끼워넣은 로맨스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

글쎄, 로맨스가 나오는 비중은 적더라도 조금만 섬세하게 다루면

충분히 마음을 흔들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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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초기작을 지나서 그의 장/단편 전편과 몇몇 에세이를 완독하게 되었다.

원래 책들을 모두 옆에 두고 조금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는데,

책들을 어딘가로 보내게 된 상황인지라 간단히 정리해야겠다.

 

가장 처음에 읽었던 것은 '상실의 시대'였다.

한국판 제목을 따로 붙이는 것에 대하여 회의적이지만,

이 제목은 정말 잘 붙여진 것 같다.

상실감이라는 키워드가 배어나오는 제목이다.  

 

상실감은 하루키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무엇에 대한 상실감인지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무엇을 잃는다.

자신이 잃은 것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상실감이 변화하지 않는 키워드라면,

하루키 작품 속에는 변화하는 키워드가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저 너머의 세계, 또 다른 세계이다.

 

최초 '댄스댄스댄스'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이 이공간은 여러 작품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에게 사건전개의 힌트를 주는 공간이기도 하고,

죽어버린 사람들의 잔재가 남아있는 공간이기도 하고,

내 자신이 구현화한 닫힌 세계이기도 하고.

 

처음에는 이 공간의 의미를 잘 알수 없어서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하여 동원한 도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읽어나가면서 각 측면을 조합해보니,

세계의 의미가 드러났다.

 

그것은 내가 상실한 것들이 모여 있는 세계이다.

그래서 내가 잊혀진 기억이 나에게 힌트를 주기도 하고,

나의 삶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잔재가 남아있기도 하고,

내가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모아 세계가 구성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와 이를 대하는 주인공들의 반응이

하루키 후기로 갈수록 삶에 긍정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내가 상실한 것은 그 세계 속에서 살아 있으면서

내가 현실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현실세계에서 끊임없이 스텝을 밟아나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상실한 가능성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선택한 길을 꽃피워야 하겠고,

내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온전한 하나의 인간으로써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모로 보면 우리가 상실한 모든 것들은 어딘가에서 우리의 삶을 응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실한 것들에 대해 후회할 줄만 알았을 뿐,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옛 광영의 기억을 가진 기사는 아무리 쇠락해도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상실의 바람이 가슴 속 상처를 헤집으며 불어오더라도,

그로인해 눈물흘릴지언정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기리기 위해 우린 쓰러질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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