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상실의 시대, 댄스댄스댄스.
이 중 상실의 시대를 제외한 4 작품은 동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연작이고,
그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
상실의 시대 또한 이 주제 안에 포함되는데,
'상실의 시대'라는 국내 제목은 썩 마음에 드는 편이 아니지만,
'상실'이라는 키워드를 이끌어 낸 것에는 공감한다.
초기의 다섯 작품은 바로 이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다.
상실의 대상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작품마다 그것은 청춘의 한 순간이기도 하고,
자살한 연인이기도 하고,
권말해설에 의하면 학생운동에 매진했던 학창시절이기도 하다.
아마 그 모두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나'만이 남아 잃은 것들을 추억한다.
그래, 하루키 초기작은 잃은 것에 대한 추억이다.
그것들을 가졌던 순간은 너무나 짧다.
그것들을 잃어가는 과정은 길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잃은 후의 고독은 가슴에 사무친다.
상실의 고통이 차라리 나를 지워버릴 비애라면 좋을텐데,
그게 아니라 고독이라는 점은
남겨진 나, 인식하기 싫은 그 상황을 더욱 뚜렷이 인식시킨다.
추억이 가을바람과도 같이 나를 감싸오면 결국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쓰기 직전의 특정 시기에 하루키를 접해버린 나도
그 고독에 한참 동안이나 공명하고 있었다.
다만 그 바람에 나 자신이 깎여 없어지지 않은건
하루키 초기작이 갖는 또 다른 면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되기에
오히려 나 자신의 완전한 포기로 이어지지 않고
다시금 스스로를 추슬러 걸음을 내딛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하루키 초기작의 주인공 중 그 상실감 때문에 자살하는 주인공은 없다.
고통은 고통대로 부여안고 삶을 향해 절박하게 손을 뻗는다.
상실의 시대와 댄스댄스댄스에서는 그 삶을 향한 첫 반전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이제 하루키의 다음 작품들로 넘어가고 있는 나로써는 상당한 기대를 하게 된다.
이전 시기에 하루키를 접해 그 상실감에 공명해버린 난
무기력과 우울의 동굴을 언제까지고 내려갔었지만,
다행히 그 안에서 백골이 되지 않고 결국 끝을 찍고 돌아서는데 성공했다.
빛을 등 뒤에 두고 점점 멀어지는 걸음이 아니라
빛을 향해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하루키 작품이 어떤 조언을 해줄지 기대되는 것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란 어떤 곳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