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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몇가지 키워드를 뽑아내면서 이 책을 읽는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책을 읽고 발끈할 사람이 적지 않겠구나,하는 것이었다. 쉽게 재단하자면 이 책은 '반동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두 저자는, 자본주의와 세계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며 인간의 본성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므로, 전복이나 저항보다는 제도 내에서의 점진적인 개혁이 해법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결론을 위해 그들이 취한 과정은 혁명이나 히피문화 등으로 대변되는 소위 '반문화counter culture'의 허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반문화의 코드는 저항과 각성, 개인주의, 자유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나치즘의 악몽이 전체주의에 대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서구 사회에서 반문화는 이데올로기의 세뇌를 피하는 가장 쿨한 방법으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는, 반문화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기는 커녕 합리적인 해결책들마저 깡그리 부정함으로써 혼란만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들이 반문화를 분석하고 비판하기 위해 제시하는 풍부한 증거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흥미롭다. 반문화와 그에 대한 비판의 옳고 그름을 떠나, 반문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일종의 허브로 쓰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제목은 <혁명을 팝니다>이다. 원제는 The rebel sell이다. 그런데 이 제목들은 다소 애매하다. 거기에 혼란을 더하는 것은 바로 책표지이다. 스타벅스 커피컵에 찍힌 체 게바라의 얼굴, 그리고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부제는 아마도 원서에는 없지 싶다(표지 디자인을 누가 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만). 시선을 끌고 흥미를 유발하는데엔 성공했을지 모르나, 나는 이런 홍보작업이 책을 제대로 읽는데에 방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제목만 해도 그렇다. 체 게바라의 얼굴과 혁명, 누가 뭐래도 환상적인 조합이다. 거기다가 스타벅스까지. 체 게바라 커피컵은 바로 체 게바라 티셔츠와 같다. 혁명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 총을 든 그리스도가 아니라 총을 든 제임스 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 "체 게바라? 정말 섹시하잖아!"라는 호들갑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체 게바라, 자본주의의 광고판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 말이다. 그러나 책에서 주장하는 바는, 체 게바라를 팔아넘긴 것은 거대 자본주의 이전에 반문화를 향유했던 바로 그 일탈자들, 혁명을 숭배하고 저항을 깃발처럼 사용했던 반란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혁명을 팝니다"라는 제목은 수정되어야 한다. '팔다'라는 동사는 말 그대로 금전적 거래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배신하다'로 그 의미가 확장되기도 한다.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겼듯, 본의든 아니든 반문화 신봉자들은 그들의 우상인 혁명과 체 게바라를 자본주의에 팔아넘겨버렸다는 것이 히스와 포터의 주장이다. '혁명'이라는 말도 여기에서는 적절치 않다. rebel은 혁명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거부, 반란, 저항을 의미한다. 즉, 반문화의 기본적인 몸짓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의 제목이 의미하는 것은 이렇게 풀이될 수 있다 : (제도와 규칙에 무조건적으로 저항하는) 반문화는 역설적으로 (고귀하거나 가치있기도 한) 반항까지도 팔아넘겼다,고. 체 게바라가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간 까닭은 결국, 반문화 반란자들이 그를 자본주의에 팔아치우는 우를 범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반문화는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이기까지 하다는 주장을 접할 수 있다. 이 책, 무척이나 위험해 보이지 않는가.

체 게바라의 변질을 바라보는 반문화 지지자들의 논변은 이러하다고 한다 : 이 시점에서 반문화의 개념은 뛰어난 천재 - 포섭(co - optation)이론 - 가 아니었다면 심각한 곤란에 처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체제가 강요한 '억압'은 마녀사냥처럼 노골적이지 않았다. 우선, 체제는 그 상징들을 전유專有하고 그들의 '혁명적' 내용들을 비운 후에 상품으로 만들어 대중들에게 다시 판매함으로써 단지 저항을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49쪽)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체 게바라 컵에 커피를 마시면서 월드컵과 구직에 열중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 아주 적확해보이는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반문화의 시각은 정말 예리하고 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히스와 포터는 곧바로 여기에 반격을 시도한다 : 이런 포섭 이론으로 반문화 그 자체가 '총체적 이데올로기', 즉 모든 명백한 예외가 규칙을 확인시켜주는 증거가 되고 반증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완전히 닫힌 사상 체계가 된다.(...) 불온의 기온이 넘쳐나도 체제는 아주 너그럽게 받아주는 듯 보인다. 이는 체제가 결국 그렇게 억압적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인가? 반문화 반란자들은 '그 반대'라고 외친다. '그것은 체제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억압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불온성마저 얼마나 능숙하게 포섭하는지를 보라!'(50쪽)  - 허버트 마르쿠제가 만들어낸 '억압적 관용'이론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히스와 포터가 보기에, 반문화는 일종의 억지다. 증거도 증거고 반증도 증거가 된다는 아전인수격 생떼에 다름 아닌 것이다. 어느 쪽이 옳아보이는가? 결론을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이와 약간 비틀어진 곳에 있다. 즉, 자본주의에 대해서 너그럽다 혹은 억압적이다,라고 말하기 전에, 반문화의 경제적 이데올로기를 물어야 한다는 것, 즉 반문화는 얼마나 脫자본주의적이냐를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문화를 영어로 옮기면 anti-culture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원래 용어는 그렇지 않다. 위에 언급한 대로 반문화는 counter culture다. 안티와 카운터의 의미를 명확히 설명할 능력은 없지만, 반문화의 원래 의미가 저항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뉘앙스 정도는 짚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반문화는 기존의 규칙과 체제를 거부하고 파괴하는 데에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거울상의 문화, 즉 '뒤집기'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뒤집기의 역사는 의외로 길고 우리 삶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인터넷 상에 난무하는 패러디도 뒤집기다. 그렇다면 그 뒤집는 행위의 목적은 무엇인가. 체제의 전복인가, 혹은 단순한 쾌감과 해방감을 위해선가. 네티즌들의 심심풀이 패러디는 단연 후자에 가깝다. 그러나 반문화 전체로 시선을 옮기면 그에 대해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패러디든 무엇이든 뒤집기는 원래 대상을 충실히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을 뒤집었는지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실패한 뒤집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와 포터의 관점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반문화는 문화를 뒤집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과 전복을 패러디와 혼동하고 있다. 나이키 대신에 컨버스를 신고, 포드왜건 대신에 폭스바겐 비틀을 타는 행위, 즉 패러디적 대체에 지나지 않는 것을 혁명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이고 체제내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느긋하게 그들을 삶아먹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 전복적인 행위가 결국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 놀음이라면, 모든 종류의 저항, 거부, 혁명적 사고는 무의미한가. 체 게바라의 죽음, 1968년 혁명, 반세계화와 반소비주의 운동 등은 다 쓰잘데기없는 짓인가. 재미를 위한 패러디로 소일하는 우리는 자본주의의 가련한 희생물들인가.
히스와 포터를 위해 변명하자면 그들은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결론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온건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결론으로 가기 전에 나는 거부와 전복의 의미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히스와 포터가 주장하는 바 중의 하나는, 반문화 지지자들이 일탈불찬성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탈이란 쉽게 말해 무조건적인 거부를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가해지는 제재와 처벌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불찬성은 그른 것에 대해 저항하되 억울한 형벌도 감수할 의지를 지닌 것이다. 그 부당함을 본 대중들이 제도의 문제점을 깨닫고 수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마틴 루터 킹이 감옥에 기꺼이 수감되고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면서 독배를 마신 것을 떠올리면 된다. 히스와 포터는 당연히 불찬성 쪽에 기울어 있고, 그들의 시선에서 반문화는 거의 전적으로 일탈의 문화로 매도(?)된다.
그렇다면 다시 떠오르는 의문 하나 : 반문화는 정말 일탈의 문화인가.
반문화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과 지구 반바퀴 정도의 심적, 물리적 거리를 두고 앉은 나로서는 반문화의 정체에 대해 그다지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신호를 잘 지키고 줄도 반듯이 서며 난잡한 스타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는 어느 모로 보나 반문화적이지 않다는 것쯤은 자신해도 될 터이다. 하지만 행위의 문제에서 사고의 문제로 넘어가면 사태는 약간 달라진다. 반문화의 확장,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일탈 뿐만 아니라 불찬성 역시 자유와 공공의 행복을 위협하는 억압에 대한 저항에 그 본질을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나 역시 적지않이 반문화적이다. 행위와 사고를 분리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적인 일탈로 사회를 바꿔보겠다는 무모함과 비교할 때 그것은 현명해보이기는 한다. 중요한 것은 각성하고 있겠다는 의지이다. 반문화가 주장하는 개인주의 역시 전체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LSD만 각성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환각을 일으킨다. 좀더 건설적인 각성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통하는 면이 있다. 머나먼 우주를 묵묵히 바라볼 때 느낄 수 있는 숭고한 아름다움은 일상의 미와 추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생명과 인간의 존엄함에 대한 경외와도 맞닿는다. 낯익으면서도 어려운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숭고미를 추구한다고 한다. 그것을 위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이 택한 방식은 반문화와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 전복, 해체, 거부, 경계넘기 등등. 그 과정에서 변질과 오도는 불가피하며 그것마저도 반문화와 많은 부분 겹친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반문화가 근본적으로 추구하려 했던 것, 즉 숭고미와 인간 존엄의 문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해 진정한 반문화는 전복의 행위 자체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얻고자 한 지엄한 목표를 잊지 않음으로써 의미있게 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문화가 아니라 오도되고 변질된 가짜 반문화에 길들여져 있는지도 모른다. 포터와 히스가 비판하려 했던 것은 뒤집기의 정신이 아니라 진정한 반문화를 좀먹은 어처구니없는 일탈들, 그리고 반문화의 전체주의적 성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굳이 이 책을 '반동적'이라 매도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결론에 불쾌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 책의 허물이라면,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우리의 눈높이와 어긋나는 점이 적지않다는 것, 그래서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오해의 여지가 많은 발언을 조심성없이 내뱉는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반문화 비판'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저자들의 솔직하고 경쾌한 필치를 대하다보면 주제에서 엇나간 것같은 부분에 대해서까지 열을 내며 반박하고 싶은 기분이 별로 들지 않는다(괜히 꽉 막힌 원칙주의자나 심지어는 전체주의자가 될 것만 같다). 책의 분량에 비해 그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의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은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반문화 전반에 대해서는 보다 심도있는 고찰과 비판이 필요하다. 오늘날 반문화는 그 자체로 거대한 담론이며 세력이기까지 하니까 말이다(혹은, 우리는 반문화의 세례를 받고 거기에 동조하여야 한다는 '진보 강박증'같은 데 걸려 있을지도 모른다!). 히스와 포터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분명히 위험하다. 하지만 가슴에 앞발을 얹고 생각해보라. 반문화의 기치 아래 모여든 어중이떠중이들은 가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좌파니 우파니 하고 편을 가르기 전에 사회정의와 공익이라는 가치엔 모두 공감하지 않는가. 사소하게는, 우리는 반문화적 일탈을 얼마나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만 생각해보아도 마음은 절로 가라앉는다. 혁명만이 해법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혁명 뒤에도 제도와 규칙은 존재한다. 모든 사람의 균일한 선의에 입각한 사회란 유토피아일 뿐이다. 홉스가 말하듯, 인간은 신뢰에 기반한 삶 속에서 안전을 얻을 수 있다. 최소한의 규칙을 준수하면 적어도 피해는 보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우리를 지켜준다. 타인은 무서운 존재다. 내가 아니기에 그 행동을 예측할 수도 없고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에 내 욕망을 언제든 겁탈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증에 걸리지 않고 살아갈 최소한의 안전망이 바로 규칙이다. 제도와 규칙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들이 거대한 괴물로 탈바꿈하여 되려 인간을 억압하는 때가 바로 인류역사의 비극적 시점이다. 반문화가 경계해마지 않는 것은 이러한 변질일 것이다. 문화란 바로 이데올로기다, 혹은 인간의 삶은 매트릭스 속의 순응에 불과하다,등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계속 고찰할 필요가 있지만, 원론적인 부분은 이렇듯 단순하지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 포터와 히스의 결론을 한번 읽어보자. 그들은 반동적인가, 아니면 순진하기 짝이 없는가.

반문화 신화가 지난 반세기 동안 정치의식에 미친 영향은 궁극적으로 나치 독일이 서양문명에 가한 광범위한 심리적 외상의 증거이다. 이전이라면 예술가와 낭만주의자들에게서나 보통 볼 수 있는, 순응에 대한 온건한 경멸감이었을 것이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규칙성이나 집단성의 기미가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과도한 혐오감으로 부풀려졌다.(...) 순응에 대한 과장된 두려움은 많은 진보단체들로 하여금 포섭 혹은 은밀한 파시즘에 대한 불안감을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사회조직의 기본요소들을 도구로서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좌파는 극복하기 어려운 집단 행동 문제의 수렁에 빠졌고 모든 인간들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기본적인 조직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했다.(...)이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 소비주의에 대한 반문화 '비판' - 소비의식을 날조된 순응의 형태로 분석하고 따라서 지위재화와 구별에 대한 추구가 소비자 자본주의의 추동력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한다 - 이다. 그래서 그들이 내놓은 해결책 - 개인의 복장 및 스타일을 통한 반란 - 은 새로운 '반란 소비자들'의 경쟁 목표가 될, 완전히 새로운 일련의 지위 재화를 창출함으로써 오히려 상황을 더 부추긴다.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이 쿨에 대한 추구로 대체되었지만 경쟁의 기본 구조만큼은 그대로다.(...) 이것이 바로 반란을 파는 행위이다. 일상의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신화를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행위이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사회질서가 결국 강압적으로 시행되는 규칙 체계를 통해 달성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규칙은 정당성이 전제되어야 하고, 전체로서의 체제는 상당한 자발적 순응이 없다면 유지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협력 체제가 일탈의 동기를 유발하며 따라서 규칙을 위반하는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에 본질적으로 억압적인 것은 없다. (...)

세계자본주의를 최대로 이용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시장 실패를 샅샅이 살펴보고 그런 뒤에 해결방법을 창조적으로 생각해낸다는 의미이다.(...)이상적인 시장의 모습은 경제학 입문서를 훑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모든 산업에서 독점이나 진입장벽이 없어야 한다. 광고가 없어야 하고 경쟁은 오로지 제공하는 제품의 가격과 품질을 토대로 해야 한다. 정보 비대칭이 없어야, 즉 소비자들이 사는 물건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기업들은 고객이나 협력업체에게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되며 불로소득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모든 외부효과를 내면화해야 하고 기업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부과되는 사회비용을 빠짐없이 모든 의사결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각각의 통제 조치가 본질적으로 반사회적인 경쟁에 제동을 걸어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를 좀더 제한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할 것이라는 보장에 대한 대가로 개인들이 자유를 포기할 의향이 있다면 여기에 잘못된 것은 전혀 없다. 결국, 문명은 규칙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와 이해를 존중해서 개인의 이해 추구를 축소하기로 한 우리의 의지를 토대로 세워졌다. 정치좌파들이 잘못된 반문화의 이상에 헌신함으로써 문명의 근본원리에 대한 신념을,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런 신념이 필요한 시기에, 버렸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403-422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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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록인 > 反소비주의의 진실
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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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이키를 신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는 캔버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미 특정한 상표의 브랜드를 구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상품의 품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브랜드가 가지는 이미지를 구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이키와 캔버스 운동화가 가지는 이미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이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만들어놓은 체제에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반대로 캔버스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나이키가 대표하는 이미지를 거부하고 무언가 소비주의에 반대하고 '쿨'한 느낌을 갖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이키와 캔버스 운동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가 소비하는 문화의 모든 면에 이러한 생각들이 스며들어 있다.

<혁명을 팝니다>는 소비주의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의 상품을 소비하는 또 다른 소비주의에 강도 높은 비판을 시도한다. 먼저 소비주의 비판의 토대가 되는 反문화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역사를 살피면서 反문화가 탄생한 경로를 파악한다. 바로 뒤에는 반문화의 토대가 되는 이론들의 탐구한다. 모든 자본주의 비판의 선두에 서는 마르크시즘과 자본주의 시대의 대중들이 억압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러한 억압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한 프로이트의 이론, 게다가 최근의 이론에 해당하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反문화에 영향을 미친 이론들을 두루 살펴본다.

이러한 이론적 탐구는 결코 따분한 철학적 논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메리칸 뷰티>, <파이트 클럽>같이 저자가 反문화 영화라고 규정지은 영화를 분석하는 것에서부터 음악과 소설 등 우리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을 反문화라는 틀에서 해석한다. 결국 이러한 특징은 저자의 주장을 한층 더 와 닿을 수 있게 만든다. 우리가 보았던 영화, 우리가 듣는 음악이 바로 그들이 사유하는 철학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까닭이다.

反문화는 당연히 소비주의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사회가 받아들이는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反문화는 우리사회를 규정짓는 가장 중요한 체계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反문화와 反소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종의 제도와 규칙은 억압적이고, 인간의 '진정성'에 도달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주장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반소비주의자들은 언제나 제도자체를 없애는 것이 목표가 된다. 따라서 제도의 틀 안에서 개혁을 한다는 것은 '파상적'이라는 공격을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비판한다. 사실 반소비주의자들이라는 히피들은 그러한 비판을 한다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세우며, 사실 또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 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히피가 여피족이 되는 '배반'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들은 50년대 소비주의의 상징인 뷰익 승용차를 모는 대신에 SUV를 구입함으로써 자신들은 소비주의에 희생되지 않고 자본주의에 '순응'하지 않는 개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은 내세운다는 것이다.

저자는 반소비주의자들이 가지는 체제에 대한 전복을 비판하며 제도와 억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사실 그들이 비판하는 제도의 대부분은 인간들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반소비주의자들이 하는 행동을 모든 사람들이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함축된다. 반소비주의자들은 그들이 문화적으로 소수이고 튀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며 만약 모두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이 또 다른 규칙이 되고 억압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억압과 규칙을 없애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사회에는 더 많은 규칙과 억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자본을 거부하고 억압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이상적으로 바라보았던 우리시대의 비판가들에게 확실히 이 책은 그 어느 책보다 심한 모욕감을 안겨준다. 우리의 그런 행동과 사고가 사실은 위선이며 또 다른 소비주의의 원동력이라고 과감히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저자의 주장대로 비판가들의 감추어진 뒷면을 살펴보고 우리사회의 긍정적인 기능을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상을 지지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이 책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 뿐만 아니라 동양을 바라보는 관점, 유니폼의 기능 등도 더불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참으로 흥겨운 관념 뒤집기를 시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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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aphael >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냉소와 증오만으로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지나친 자기반성으로 이루어진 글은 보는 이에게 부담을 주듯, 세상에 대한 냉소와 증오가 가득한 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 "샐린저"는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나가고 있다. 진정한 냉소란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고 변명하듯이 저자는 속내를 솔직하고 경쾌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인 콜필드는 아웃사이더이다. 그는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회의하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이는 당사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는 한 자신을 계속 괴롭힐 것이다. 조직사회를 거부하고 때로는 자기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콜필드는 상처에 익숙하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예민하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은 그를 상처받게 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남들과 다른 기준으로 사는 그를 세상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 또한 세상과 타협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세상은 아웃사이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 이상자들일 뿐이다. 세상은 사람이 왜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하지만 콜필드는 왜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않는 한 어떻게 살지를 결정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이다.


결국 주인공이 하고자 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호밀밭의 파수꾼 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이유는 “등대지기”란 노래의 가사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위해서라기 보단 홀로 있는다는 것, 또 그것이 혼자 있어도 존재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 같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보면서 "위노라 라이더"가 나오는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가 생각났다. 위노라는 여자 콜필드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그녀가 정신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푸코의 말처럼 광인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세상의 기준은 그들을 수용할 정신병원을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리라. 마치 콜필드의 여정처럼.


이후 콜필드가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아갈지 아니면 성장기의 통과의례쯤으로 간주하고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나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 사회가 콜필드와 같은 아웃사이더들을 좀더 따뜻하게 감싸안을 수 있는 곳으로 변해야 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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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jedai2000 >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친다면 바보!
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팔묘촌이란 이름 그대로 여덟 개의 무덤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기묘한 마을 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전국시대 패주한 8명의 무사들이 주군의 황금을 가지고 마을로 들어와 권토중래를 노리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 했던가요. 마을 사람들은 8명의 무사들을 전부 몰살시키고, 황금을 찾지만 무사들은 이미 황금을 꽁꽁 숨겨둔 뒤였죠. 기대했던 황금은 허탕치고, 오히려 죽어가던 무사 대장의 저주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마을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무사들을 달래기 위해 8개의 무덤을 만들어주고, 해서 마을 이름이 ‘팔묘촌’이 된 거랍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무사들의 저주 때문일까요. 전쟁 전 팔묘촌의 최고 갑부인 다지미 가의 당주 요조가 광기를 일으켜 총과 칼로 32명의 마을 사람들을 살해하고 사라집니다. 무심한 세월은 흐르고 흘러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요조의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나, 타츠야는 다지미 가를 상속받기 위해 팔묘촌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저주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타츠야가 돌아오자마자 마을에서는 연쇄독살 사건이 벌어집니다. 마침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사건에 참여하지만 진상은 오리무중이고, 타츠야는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마치 옛날 할머니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나는 책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요코미조 세이시가 1947년 발표한 이 작품은 약간은 고색창연하고 빛바랜 느낌이라 마치 셜록 홈스나 애거서 크리스티, 모리스 르블랑의 뤼팽 시리즈를 보는 듯한 고풍스러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 좋아하던 밥도 마다하고, 졸린 눈을 억지로 뜨고 보게 만들던 책이 주는 즐거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팔묘촌>에는 보물과 보물지도, 비밀통로, 동굴탐험, 연쇄살인, 오싹한 공포 등 고전 모험소설, 추리소설, 공포소설의 요소가 모두 들어가 있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종래의 명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와는 달리 1인칭으로 집필되어 독자들의 몰입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더구나 주인공 타츠야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 어디 하나 특출난 구석이 없어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자신의 과거도 모르는 인물이라 이 끔찍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당황하기만 하죠. 이것은 우리 독자의 처지와 비슷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공과 역시 앞일을 예측할 수 없는 독자와의 심정적 동화가 일어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보물지도를 가지고 종유동굴을 탐험하는 모험소설로도 그지없이 재미있지만, 오싹한 공포감도 제법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특기인 봉건적 인습이 주는 공포감이 그것이죠. 패전 이후 경제적 악화에도 불구하고 점차 시민들의 인식이 깨어나고 개화되는 대명천지에, 전국시대부터 내려온 저주에 매몰된 사람들이라니요. 패쇄된 공간에 사는 시골 사람 특유의 무지와 편협함, 전해 내려오는 저주에 대한 맹신, 사리를 분별하지 않는 가공할 행동력으로 팔묘촌 사람들은 폭도로 변해 저주의 현신이라 생각하는 타츠야를 공격하게 됩니다. 왜 사리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앞뒤가리지 않는 공격성을 보면서 우리는 무서워하잖아요. 팔묘촌의 마을 사람들이 꼭 그렇거든요. 이 분위기를 잘 살려낸 건 요코미조 세이시의 탁월함이라 하겠습니다.

 더구나 추리소설로도 꽤 뛰어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비록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타나 사건을 수사합니다. 마침내 그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밝혀진 연쇄독살사건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최종장에서 모든 용의자들을 한자리에 몰아놓고 진범을 폭로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모습은 뛰어난 고전 추리소설의 절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짜릿함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잘 안배된 단서들을 가지고 직접 추리할 수 있는 재미를 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팔묘촌>은 일본 추리소설 사상 가장 인기 있었던 작품 중 한 편답게 재미와 스릴, 흥분과 몰입으로 가득찬 굉장히 뛰어난 작품입니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는 총 77편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남겼고, 현재는 후배 만화가들이 코스케의 손자, 긴다이치 하지메(김전일) 시리즈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민 추리소설가와 국민 탐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팔묘촌>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아주 행복한 일입니다. 충분히 즐길 만하고 만족스러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눈뜨고 놓치는 사람이 있다면...흠흠...바보라고 불러주겠습니다.


 

p.s/ 긴다이치 코스케는 명탐정답게 머리 회전이 비상하지만 유독 희생자의 인권(?) 문제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8명이 죽은 후 사건의 비밀을 풀어낸 긴다이치는 말합니다.

“나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다만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지금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범인을 알면 증거가 없어도 함정 수사를 하거나, 몰래 숨어 사건 현장을 덮친다거나 하는 행동은 왜 못 하나요? T.T 페어플레이 정신에 위배된다고 생각했었을까요. 정말 무서운! 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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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크로우 > 추리와 모험이 가져다 주는 즐거움!!!
팔묘촌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옥문도에 힘입어, 기꺼이 다음 독서대상으로 콕! 찝어버렸다.

아아-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 이런 친절한 요코미조 세이시. 감동이다.

일단은 그의 전작에서 충분히 전통적인 요소들을 접해서인지 글의 초입부터 무난히 집중할 수 있었고,

비록 긴다이치가 아닌 사건의 중심 인물이지만 어찌 되었든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해주니 이 아니좋을수가!

팔묘촌. 이 섬뜩한 이름부터 으스스하듯이,  마을 주민들로부터 살해당한 패주무사 8명.

그리고 그 중 대장의 원혼이란 몸서리쳐질 정도의 집념으로 마을 주민들을 괴롭혀왔는데.

이런 사건의 주모자격이었던 다지미가의 후사로 밝혀진 '타츠야'가 대를 잇기위해 팔묘촌으로

돌아가려는 그 순간부터 피로 얼룩진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한다.

출생의 비밀, 집안에 은밀히 마련된 비밀통로, 반쪽짜리 동굴지도, 숨겨진 황금을 찾기위한 종유동굴 탐험,

연쇄살인, 뜻밖의 로맨스, 그리고 거듭 미궁속에 빠지고 마는 용의자의 실체-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최고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다이치는 언제나처럼 머리를 벅벅 긁으며 사건이 모두 종결된 후에야 말하길-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처음부터 범인을 알고 있었어요. ..........." 라니..

이렇게 불친절할 수가! 덕분에 계획 된 모두가 죽어나갔고, 결국은..........................................

 

아무튼, 이러니저러니해도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이면서도 기본적인 추리의 정석이랄까.

아주 매력적이었다. 자 긴다이치! 다음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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