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킹 우드스탁(2009), 이안 감독> 

오는 목, 금 총장잔디에서 '본부스탁'이 열린단다. 본부스탁은 우드스탁을 패러디한 것인데, 사실 본부스탁 얘기를 들을 때까지 우드스탁이 무언지 알지 못했다. 궁금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하던 도중, 우드스탁 탄생 일화를 그린 '테이킹 우드스탁'이라는 영화를 발견하고 감상에 들어갔다. 

영화는 내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운집한 히피들 가운데 화려한 무대에서 지미 핸드릭스 같은 전설들이 열광적인 공연을 펼치는 장면들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공연 장면은 단 한 순간도, 심지어 스쳐지나가지도 않았다. 프레임은 축제 언저리를 맴돌던, 하지만 그 축제를 가능하게 했던 엘리엇이라는 한 청년을 좇았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나는 우드스탁 무대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우드스탁을 보았다. 주인공 엘리엇처럼. 무대를 향하던 그는 한 히피 청년들의 캠핑카에 붙잡힌다. 그리하여 우주의 중심을 본다. 그것은 혼돈 속의 자유였다. 절제되지 않은 무질서함, 그 안에서 그는 우주의 창조를 보았다.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창조되던 우주 탄생 그 자체처럼. 

테이킹 우드스탁을 빠져나오니 나는 질서 안에 있었다. 혼돈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그 덕택에 자유도 찾기가 쉽지 않다. 내 위치가 결정되어 있고 내 선택은 예정돼 있다.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것들이 다 무어란 말인가. 이 질서는 집착이다. 불안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집착. 엘리엇의 엄마가 집이 은행에 넘어갈 상황에 이르기까지 절대 숨기고 내놓지 않았던 옷장의 10만달러처럼. 우리는 각자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가기 위해 집착을 쌓아 질서를 만든다. 

이 질서들은 그 자체가 선인양 행세한다. 마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선이고, 히피들이 몰려오는 우드스탁은 악이다. 그러나 우드스탁은 보여준다. 선함을 넘은 무질서함의 아름다움을. 관점(perspective)은 우리의 인식을 제한한다는 한 등장인물의 말처럼, 모든 관점에 저항하는 반문화의 중심 우드스탁은 인식을 넘은 우주 그 자체의 중심으로 상상되기 충분하다. 

김사과 작가와 인터뷰했던 때가 문득 떠오른다. 그 때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LA의 히피로 살다가 죽는게 꿈이라고. 나는 그 때보다 지금, 그 말의 의미와 느낌을 더 이해하게 됐다. 이 영화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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