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삶에 있어 가장 거대한 도전은 '타자성의 극복'이다.
 
'나'는 나를 넘어선 어떤 것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오해는 시작된다. '나'는 '너'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너의 '느낌'은 상상할 수도 없다. 나에게 너는 오로지 '나의 너'일뿐이다. 나는 절대 '너'가 누구인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세계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감각하는 세계는 오로지 '나의 세계'일뿐이며,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세계' 그 자체는 나에게 완전한 남이다. 그것은 나의 완전한 '이해'를 허용하지 않는다. 세계는 진실과 거짓의 양면을 가진 뫼비우스의 띠이다. 진실의 끄나풀을 따라 나아가면 거짓에 서 있고, 거짓을 추적하다보면 진실이 나를 기다린다. 나는 세계를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나는 오로지 '나의 세계'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모든 단절은 내 감각의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며, 내 감각의 한계는 '나'라는 존재의 단절성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리하여 유일한 희망은 사랑이다. 사랑은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나'와 '너'의 단절을 넘어서기 위한 인류사적 기획이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가 '남남'임을 거부하고 타자성을 넘어설 수 있는 관계맺음을 추구한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의 운명을 엮으려 하며, 종종 상대를 위해 자신의 삶까지 희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사랑은 가장 큰 절망이기도 하다. 그 처절한 몸부림 속에서도 도저히 좁힐 수 없는 타자성의 간극을 목도할 때, 아무리 엮으려 해도 서로의 운명은 각자의 것임을 확인할 때,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죽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라는 그 단절의 끝에서 나는 나와 너/세계를 갈라놓는 거대한 분리장벽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래도 사랑의 길이다. 사랑마저도 타자성을 절대 극복할 수 없고, 그리하여 사랑이 날 가장 외롭게 한다 하더라도,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꿈이기 때문이다. 나는 꿈을 먹고 사는 존재다. 사랑이 한낱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세계와 함께 시간의 종말을 맞는 꿈을 꾸겠다. 그 꿈의 길이 아닌 막다른 골목에는 오직 자살만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 길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어떤 길을 걷건 죽음이라는 똑같은 종착역을 향해 나아간다면 나는 기왕지사 환각을 즐기겠다. 행복을 누리겠다.
 

눈부신 5월의 하늘 아래, 대한, 사랑하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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