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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 - 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7년 10월
평점 :
- 나는 편안한 삶을 포기한 대가와 단신 오지 여행이라는 달콤하지만 혹독한 수업료를 치르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라는 바다를 헤쳐 나가는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은 바로 나라는 것. 누구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 바다가 고요할 때나 폭풍웅가 몰아칠 때나 나는 내 배의 키를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지금과 같은 깊은 행복감을 내내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37쪽, 서문 中)
가장 닮고 싶은 여성인 중의 한 명이자 세계 오지 여행가에서 우리땅과 중국을 거쳐 지금은 월드비전 긴급구호단체 팀장으로 지구 곳곳을 누비는 여전사, 한비야.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위해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배낭을 꾸려 무려 7년이나 세계 곳곳을 누비며 오지여행을 했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 그자체였다. 많은 이들이 막연한 꿈으로만 간직할 뿐 삶에 치여 마음속에만 꼭꼭 담아놓았던 꿈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준 그녀의 여행기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아하, 세상엔 이렇게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한비야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장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간된 그녀의 세계오지여행기는 세간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그녀의 책은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에게서 한결같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비야,하면 '바람의 딸'이란 멋진 별명과 '진짜 여행'이란 단어가 함께 떠오를 정도였다. 그리고 그녀의 씩씩한 무용담과 걸출한 입담이 맛깔스런 이책은 출간된지 십여년 만에 다시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표지와 중간중간 편집이 조금 바뀌었을 뿐 글의 내용은 바뀐 것이 없다. 저자는 개정판의 서문에서, 거칠고 부족하지만 그시절의 모습 그대로 남겨두고 싶어 책의 본문에는 손대지 않았다,라고 밝혀놓았는데 개인적으론 그래서 더 좋았다. 덜 세련되었더라도 그시절의 감흥을 싱싱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홀로 떠나는 여행. 이것은 내 자신과의 여행이다. 여행이란 결국 무엇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니까. (33쪽, 서문 中)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권>은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에서의 그녀의 여행담이 담겨있다. 책의 포문을 여는 이야기는 이란의 테헤란에서 반정부지도자와 나눈 열흘간의 로맨스였다. 오지여행가로 유명한 그녀였기에 이름도 생소한 땅의 원주민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터라 낯선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라니. 다소 의외였지만 사랑이야기만큼 재미있는 것이 또 있으랴. 그녀의 사랑이야기에 함께 빠져들어 그들이 헤어질 땐 내 마음도 알싸해졌다. 그러나 아쉬운 이별로 로맨스가 끝나고 글의 단락이 바뀌자, 어느새 예의 그 씩씩한 그녀로 돌아와 활기차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이란에서는 입을 다물지 못한 유적지보다 그녀의 로맨스가 더 진하게 남았고, 전쟁중이라 살벌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사진 한 장으로 벌어진 긴박한 상황에 가슴이 콩닥거렸다(요즘같은 디카라면 그녀는 바로 변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시절 필카였던 게 천만다행인 셈이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알렉산더도 놀랐다는 도시 사마르칸트는 여행객의 천국이라는 말라위와 함께 정말 궁금한 곳이었다(사진이라도 좀 실어주지!). 케냐의 대낮 강도의 무모함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고,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새삼 산과 삶의 관계를 생각나게 했으며,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의 사회에서 아직도 공공연히 행해지는 여성의 불평등한 지위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외 에티오피아, 나일강,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시리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여행의 묘미는 역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녀가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는 책의 재미를 더욱 북돋아줬다. 길에서 만나는 여행자들과의 만남도 멋졌지만, 그녀를 가족처럼 대해준 현지인들과의 우정은 무척 이상적이었다. 이란에서의 로맨스 주인공은 물론 투르크메니스탄 시장에서 만난 고려인 무채 아줌마들, 눈물의 지우개를 선물했떤 터키의 누리네 가족, 진짜 딸과 친구처럼 대해줬던 케냐의 로즈 엄마와 그녀의 딸 비다, 잔지바르 해변의 조나단, 따뜻함이 넘치던 이집트의 함디네 가족,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룸메이트 조선족 미란씨 등과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준 현지의 한국인들까지.. 계산되지 않은 그들의 순수한 우정이 마음 한 켠을 훈훈하게 해줬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무엇보다 이책이 여행책임에도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각국의 숨겨진 보석같은 유적지에 감탄하는 글이나 따뜻함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사진으로나마 보고 싶은 게 당연지사. 그러나 각 단락의 제목 밑에 실린 사진 외엔 빽빽한 글만 이어지니 조금은 답답하다, 물론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지만. 십년 전 처음 출판될 땐 그렇다고쳐도 개정판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레이아웃이 조금 달라진 것 빼곤 별로 변한 게 없어 아쉬웠다.
또한 책을 읽기 전엔 글이 여행 시간순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조금 혼란스러웠다. 1권의 첫머리에 실린 이란이 첫 여행지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 뒤에 이어지는 나라들도 다녀온 순서대로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나라에 대한 내용도 시간의 차이가 있어 처음에 좀 헷갈렸다. 각 나라별 여행담의 분량도 생각보다 많지 않고 기대보다 깊이 다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하긴, 7년이란 긴 세월 동안 다닌 곳을 시간 순으로, 각 나라별로 세밀하게 풀어놓으려면 4권으론 어림도 없겠지. 그래도 볼거리보단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많아 그건 좋았다.
-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일에 최선을다했다면 나타나는 결과와 상관없이 후회나 미련이 없다는 것을. 내가 이 기간을 통해서 얻은 최선을 다하는 방법이란, 목표는 자신의 능력에 비해 약간 버겁다 싶을 정도로 높게 잡고, 계획은 치밀하게, 실천은 확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후부터 지금까지 나의 인생원칙이 되었다. 이 원칙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 세계여행은 다른 사람이 그러하듯 여전히 꿈으로만 남아 있을지 모른다. (22쪽, 서문 中)
이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사실 그녀가 쓴 서문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이후 오년간 아르바이트로 용돈과 생활비를 벌다가 대학 입학을 결심하고 노력해 좋은 결과를 얻었고, 또 유학을 다녀온 후 입사한 직장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 승승장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멋졌다. 그러나 그런 세상적인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에 담아왔던 자신의 꿈을 향해 과감하게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녀의 결단력은 감동이었다. 또한 장기 오지여행을 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어려움들을 피하기보다 직접 맞서 돌파해내는 용기가 그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삶과 꿈을 향해 매진하는 그녀의 모습은 흐지부지 삶을 낭비하고 있던 내게 아주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책을 쓴지 십여년이 지난 지금은 그녀가 밟았던 장소 중 많은 곳은 그때만큼 낯설지 않기도 하다. 그러나 이책이 아직도 의미가 있는 것은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아닌, 낯선 곳으로 나아가는 호기심과 흥분, 그리고 여행을 하는동안 얻은 성숙함이 가득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여행을 한 그녀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또한 그녀의 글을 통해 한 뼘 더 클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책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