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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일본소설을 꽤 여러 편 읽어왔지만 이제껏 접한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라곤 전혀 다른 분위기의 중편이 함께 담긴 <워터>와 한 인간의 흥망성쇄를 담담하게 보여주던 <나가사키>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워터>는 나중에서야 그의 작품이란 걸 알게 됐으니, 세상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는 내게 있어서는 비주류인 셈이었다. 한때 에쿠니 가오리의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체를 좋아했었지만, 이상하게도 요시다 슈이치는 서정적이긴 하나 그 문체가 너무 건조하게 느껴져 약간은 우울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동경만경>, <퍼레이드>같은 그의 대표작들을 칭찬하고, 역시 요시다 슈이치!를 외쳐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었다. 고작 두 작품으로 그를 단정짓는 나의 편견이 섣부른 짓인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어쩌랴,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을.
그런 연유로 나와는 친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그를 새롭게 보게 한 것이 바로 <악인>이었다. 요시다 슈이치라는 작가의 이름값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악인'이라는 제목도, 2007년 일본 최대 화제작이란 카피보다도 가장 나를 솔깃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작가 스스로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평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대표작이라 평할 만큼 이 작품에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한 마디에 다시 한 번 요시다 슈이치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길 정말 잘 했다, 싶다.
236번 미쓰세 고개에서 한 여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목이 졸린 채 살해된 그녀는 보험설계사인 요시노 이시바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그녀가 남자친구인 마스오를 만나러 갔다는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경찰은 마스오를 강력한 용의자로 지목해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요시노가 친구들에게 남자친구라 속여왔던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 마스오는 그녀의 일방적인 짝사랑 상대였고, 그날 밤 그녀가 만나기로 한 상대는 마스오가 아니라 만남 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남자 유이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다른 양상을 띈다. 그리고 이야기는 독자들의 예상대로,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요시다 슈이치는 사건의 촉발자이자 희생양인 요시노, 경찰에 의해 살인용의자로 지목된 대학생 마스오, 또다른 용의자이자 전체를 관통해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유이치, 평범한 싱글녀지만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미쓰요를 중심으로 요시노의 아버지, 유이치의 할머니, 마스오의 친구 등 지극히 평범하지만 한편으론 평범하지 않은 그들의 주변인물들을 통해 사건을 확대해간다.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만 부각되는 사건 뒤에 감춰진 여러 은밀한 진실들을 끄집어내어 사건 그 자체가 아닌 그 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악인>의 전체를 아우르는 주요 사건은 물론 요시노의 살해사건이다. 보통 이런 경우엔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그 범인을 찾아가는데 주력하지만 요시다 슈이치는 처음부터 독자들에게 범인의 윤곽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야기를 크게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 진행하되 전체를 이어가는 하나의 사건을 각 단락마다 다른 인물을 중심으로 내세워 각각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또한 이야기 중간중간 인물들의 독백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해 그들의 내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악인>에서는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왜 범인이 되었는가,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에 집중한다. 그리고 작가는 독자들을 그런 논의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입장에 처한 인물들의 독백과 각기 다른 시선으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결과보다 과정을 면밀히 보여준다.
책 속의 인물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평범한 사람들이 때론 순간적이고 극적인 계기로 인해 미처 상상도 못하는 악인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작가는 주인공과 그의 주변인물들을 통해 인간의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또한 악인(미처 본인이 악인인도 모르는 그런 악인들까지 포함해서)이 또다른 악인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너무나 담담하게 보여준다.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우리는 대게 결론만을 보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나누어 비난한다. 걔중에는 정말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가끔 억울하거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럴 때면 너무나 명확해 보이던 악의 기준이 순간 모호해지곤 한다. 과연 그들 모두는 진짜 악인들일까. 어쩌면 그들이 악인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 숨겨진 진짜 악인은 따로 있는 건 아닐까.
<악인>을 읽는 동안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진정한 악인은 누구일까. 물리적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가한 사람은 물론 죄가 있다. 그렇다면 그가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 직간접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친 사람들은 물리적인 결과가 없으니 아무런 죄도 없는 걸까. 그들은 과연 그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알 것 같지만 또 모르겠다.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하나의 살인사건과 그에 얽힌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다중적인 내면과 인간심리를 담담한 시선으로 치밀하게 묘사한 수작이다. 이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진정한 그를 만나지 못했던 셈이다. 그래서 책을 덮는 순간 그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올해 나의 책목록에 그의 작품을 몇 권 얹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