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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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는 잘 해요 │ 이기호 │ 현대문학 │ 2009.11 


'이기호'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그의 단편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통해서였으나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재치있게 잡아낸 한 뼘 에세이 『독고다이』였다. 통통 튀는 제목처럼 『독고다이(獨 Go Die)』에서 펼쳐지는 그의 재기발랄함에 반한 나는 그의 전작인 단숨에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물론 『최순덕 성령충만기』까지 세트로 장만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정작 내가 처음 읽은 이기호 작가의 소설책은, 그책들이 아니라, 포털사이트 Daum에 연재했던 소설인 『사과는 잘해요』가 됐다. 모든 게 내 게으름 탓임을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이책을 덮으며 그의 단편소설들을 먼저 읽어봤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의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 해요』는 에세이집 『독고다이』를 읽으며 기대했던 것과는 한결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는 시설에서 처음 만났다. 시설에서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을 먹었고, 양말이나 비누를 포장해 시설원생이 다같이 찍은 사진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매일 매를 맞았다. 매를 맞기 전에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해야 했고, 어떤 죄를 고백하느냐에 따라 매의 정도가 달라졌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지 않는 날에는 더욱 많이 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죄를 찾거나 생각해내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뒤엔 반드시 고백했던 죄를 지었다. 사과했던 죄를 짓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설원생의 수가 늘어나자 복지사들은 이번에는 그들에게 시설원생들의 죄를 대신 고백하는 반장의 임무를 맡겼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죄가 없다던 사람들도 계속되는 구타와 집요한 질문에 결국 자신의 죄를 하나둘 고백하기 시작했다. 사과할 죄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들이 대신 찾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 시봉은 복지사들에게 시설원생들의 죄를 대신 사과했고, 그들의 발길질을 받으며 반장으로서의 우쭐함을 느꼈다. 

그렇게 약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살던 중 시설에 새로 도착한 구렛나루 아저씨로 인해 일대 파란이 일어난다. 시설의 관계자는 잡혀갔고, 시설은 폐쇄됐으며, 시설원생들은 시설에서 나왔다. 약도 폭력도 없는 세상으로 나왔지만 나와 시봉은 오히려 어지러움을 느낀다. 시봉의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그들이 밥값을 하고자 생각해 낸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사과해 주는, 일명 사과대행업이다.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은 시설에서부터 쭉 해왔던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뢰인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죄를 대신 사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찾아야 했다. 끊임없이 죄를 찾고 죄를 알려주고 그 죄를 고백하며 사과하기를 집요하게 종용하는 나와 시봉의 행동은 악의는 없었지만 평온하던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에게 사과를 위한 다른 죄를 만드는가 하면 반드시 사과하겠다는 일념에 예상외의 방법으로 사과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과가 계속될수록 일은 꼬여가고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진다.


『사과는 잘해요』는 이기호의 다른 책들처럼 쉽게 술술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다. 정신연령이 멈춰버린 나, 진만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들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접하던 우리 사회의 그늘진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시설에서 나와 시봉의 일상이었던 알약과 폭력은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폭력 전 그들을 괴롭혔던 '죄'와 '사과'의 문제는 시설을 나온 뒤에도 그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사과 대행을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죄를 찾고 묻고 사과를 종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에서 어느새 가해자가 된다.

『사과는 잘해요』에서 '사과'는 지은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지을 죄를 미리 선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사과를 하는 순간, 그들이 시설의 복지사에게 했던 것처럼, 그 죄는 지어야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육점 주인과 뿔테 남자를 그렇게 만들었고, 진만 자신 또한 그렇게 했다. 작가는 진만과 시봉은 물론 시설의 원장과 복지사, 시연과 뿔테 안경 남자, 정육점 주인과 과일가게 주인, 사과대행 의뢰인과 김밥집 여자라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들의 죄에 대해, 죄의 의미에 대해 반문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지, 그 죄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샴쌍둥이처럼 모든 걸 함께 하던 나와 시봉 사이에 균열이 감지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향한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깜짝 반전도 등장한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상태라 조금 놀랐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나와 시봉의 이야기는 끝까지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자체가 아이러니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볍게 읽히는 글과 달리 책을 덮을 때 마음은 묵직하고 공허해진다.


책 뒷면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되었던 『사과는 잘해요』는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골격만 그대로 가져왔을 뿐 완전히 새로 씌여졌다고 한다. 소설 분량도 반으로 줄었단다. 인터넷 연재글은 읽어보질 않아 이 책과 얼마만큼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미 발표된 글을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재작업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박범신 작가의 그 '한마디'가 뭔지 참으로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장을 덮으며 작가에게 이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카프카의 『심판』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부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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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 - 7차 개정판
폴라 비가운 지음, 최지현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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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마라! (7차 개정판) │ 폴라 비가운 │ 중앙북스 │ 2008.06  


오랜 세월 뾰루지를 구비한 저질피부와 함께 하다보니 피부 건강에 대해 관심이 많다. 화장품 또한 색조보다는 피부와 보다 직접적 관련이 있는 기초 화장품에 민감한 편이다. 물론 게으름 덕분에 그 정보들을 제대로 활용하진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다 얼마전 천연 화장품 DIY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눈에 보이는 피부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피부 속의 구조나 시스템, 구성성분을 알게 됐고, 그와 함께 피부에 작용하는 화장품 성분에 대해 주목하게 됐다.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화장품 비평가 폴라 비가운의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를 만나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말라니? 직설적이고도 발칙한 제목 덕분에 이책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번역하면서 출판사에서 변형한 제목인가 했더니 원서 제목도 'Don't go to the cosmetics counter without me'다. 너무나도 자신만만한 제목에 슬쩍 웃음이 새어나올 뻔 했는데, 막상 실제로 책을 보니 제목에서 뿜어나오는 자신감이 괜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1200쪽을 훌쩍 넘기는 두툼한 두께가 주는 묵직함이 그랬고, 그중 1000쪽을 넘는 지면이 현재 판매중인 71개 브랜드의 기초와 색조 화장품에 대한 리뷰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또한 그러했다.

 


내가 만난 책은 가장 최근에 출간된 7차 개정판(2008년 6월)이다. 아무래도 해마다 수많은 신제품이 쏟아져 나오는 화장품 업계를 다루다 보니 그에 대해 리뷰한 이책 또한 여러 번 업데이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7차 개정판이 다른 개정판들보다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화장품의 숨겨진 비밀을 폭로한 뒤 그동안 여러 비판에 시달리던 저자 폴라 비가운이 2004년 6차 개정판 이후 더이상의 개정판은 없을 거라던 스스로의 약속을 깨고 4년 만에 출간한 책이기 때문이다. 

역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번 7차 개정판은 기존책의 단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기 보다는 거의 대부분이 새롭게 씌여진 책이란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인정하고 새로운 지식을 과감히 수용함은 물론 한결 엄격해진 평가 기준으로 제품을 리뷰하고 있다고. 또한 지면의 부족으로 우리나라에 정식 수입되던 일부 제품 리뷰만 발췌했던 6차 개정판과 달리 이번 7차 개정판에서는 정식 수입 여부와 상관없이 71개의 인기 브랜드의 리뷰가 모두 번역되었고, 더불어 6차 개정판에서는 통째로 생략되었던 '폴라스 픽'과 '화장품 성분사전'까지 그대로 수록되어 원서와 같은 내용의 완벽한 모습으로 독자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은 크게 7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아름다운 지식 : 꼭 알아야 할 화장품의 진실'에서는 화장품 비평가가 된 저자의 이야기와 거대 화장품 회사의 화려한 마케팅과 그뒤에 감춰진 진실, 비싼 명품 화장품들의 허와 실에 대해 논한다. 2장 '건강한 피부 : 꼭 지켜야 할 피부 법칙'에서는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화장품의 상식을 뒤엎고, 피부와 화장품 종류에 따른 기본적인 지식은 물론 피부타입별 건강관리법을 실어놓았다.

예를 들어 아이크림의 경우, 민감한 눈가의 주름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아이크림을 꾸준히 발라주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상식처럼 굳어있다. 하지만 저자는 아이크림과 로션의 성분은 똑같으며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크림은 소량에 고가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얼마전 서점에 갔다가 잠깐 들춰본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이란 책에서도 아이크림에 대한 비슷한 내용을 볼 수 있었다. 얼마전에 배웠던 천연화장품 DIY 과정에서도 사실 로션과 크림의 성분은 같으며, 다른 점이라고는 크림은 로션에 비해 더 많은 기름과 그것을 유화시키기 위한 더 많은 유화제가 들어가는 것 뿐이라는 사실에 꽤 놀랐었다.

또한 우리가 화장품을 살 때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이는 노화 방지의 경우에는 솔직히 화장품만으로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미리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 해답은 자외선 차단에 있다. 천연화장품 DIY 과정에서도 배웠었는데, 피부 노화의 가장 기본은 자외선 차단에서 시작된다. 자외선만 잘 차단해 주어도 자외선 손상에 따른 피부 노화를 훨씬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외선 차단은 피부 관리에 있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항목이다. 이미 생긴 주름을 화장품으로 다림질할 수는 없지만 꼼꼼한 자외선 차단으로 미래의 주름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말은 즉, 고가의 노화 방지 크림의 효과는 그다지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이다. 실제로 주름 개선 화장품에 각광받고 있는 콜라겐의 경우 입자가 커서 피부 표면에 바른다고 할지라도 진피로의 흡수가 쉽지 않다.

 


화장품에 대해 알고있던 우리의 상식 아닌 상식은 물론, 아이크림을 비롯해 우리가 쓰는 수많은 화장품은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에 넘어가 필요 이상의 것을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란 이야기다. 사실 피부를 위해 꼭 써야 할 화장품의 종류는 몇 가지면 충분하다. 화장품 경찰관을 자처하는 폴라 비가운의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의 책소개 페이지에?리가 그동안 화장품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더불어 고가의 명품 화장품이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앞으로 똑똑하게 화장품을 살 것을 권유한다.

보다 똑똑하게 화장품을 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폴라 비가운은 4장의 제품 리뷰에 앞서 3장 '제품 리뷰 가이드 : 평가의 기준과 원칙'에서는 각 제품들을 어떤 원칙과 기준을 바탕으로 평가했는지, 그리고 화장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 화장품의 성분이 왜 중요한지, 주의사항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미리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양한 화장품들의 종류마다 그에 대한 기준과 평가 원칙을 상세히 적어둔 덕분에 제품 평가 기준만 그 내용이 상당하다. 더불어 제품에 대한 리뷰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하되 그 결과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두었다. 개인의 피부 상태에 따라 그 효과도 조금씩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책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한 4장 '화장품 제품리뷰 : 71개 브랜드 기초+메이크업 제품 리뷰'에서는 소제목 그대로 71개의 인기 화장품 브랜드의 제품들을 상세히 리뷰해 두었다. 브랜드마다 하나의 꼭지를 이루고 있는데, 가장 먼저 그 브랜드의 전반적인 장점과 단점을 기술해 놓았다. 제품 리뷰는 기초 제품은 해당 브랜드의 라인별 제품들을 모아두었고, 색조 제품은 각 기능별로 분류해 그에 해당되는 제품들을 한 번에 볼 수 있게 정리해 놓았다. 

또한 제품의 등급은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제품 왼쪽에 아이콘으로 표시했다. 제품 등급 아이콘은 크게 3가지로 웃는 얼굴, 무표정한 얼굴, 화난 얼굴로 구분된다. 웃는 얼굴(very good!:추천)은 뛰어난 효과와 훌륭한 성분구성으로 한 번쯤 구입을 고려해봐도 좋은 것들로 합리적인 가격이 빛나는 제품들이다. 무표정한 얼굴(average:보통)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으나 특별히 인상적이지 않거나 평범한 품질에 터무니없는 비싼 가격을 붙여놓은 제품들에게 주어졌고, 화난 얼굴(don't buy:비추)은 달리 말이 필요없이 모든 면에서 최악인 제품을 뜻한다.

 


그리고 웃는 얼굴 앞에 체크 표시를 더해 최고의 단계임을 나타내는 폴라스 픽(excellent!:강추)이 있다. 베스트 중의 베스트 제품을 뜻하는 이 등급은 기대 이상의 품질과 해당 품목의 기준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자극도 거의 없는 최고의 제품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뒷장에 나오는 '폴라스 픽(Palua's Pick)'에서는 이 등급에 해당하는 제품들만 '베스트 제품' 리스트에 포함해 독자들을 위한 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화장품 추천 리스트를 완성시켰다.

더불어 같은 등급이라도 제품의 가격 정도에 따라 '$$$' 표시와 함께 '비싼(but overpriced)'이라는 수식어로 따로 알아볼 수 있게 구분하고, 옆에는 가격을 달러로 표시해 두었다. 비슷한 등급의 제품이라도 가격은 천차만별이고, 제품의 가치가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기에 가격 대비 비교가 필요하다. 결정적으로 어느 품목이든 간에 비싼 제품을 능가하는 품질의 싼 제품들은 꼭 있기 때문이다. 가격에 대비해 제품의 가치를 따져볼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분류가 마음에 든다.

 


말이 71개 브랜드지 각 브랜드에서 나오는 수많은 라인별 기능별 제품들을 모조리 리뷰하다 보니 책에 실린 제품 리뷰의 분량은 실로 엄청나다. 앞서 말했듯 1300쪽 조금 안 되는 책에서 제품 리뷰만 1000쪽을 넘길 정도로 책의 8할 이상을 제품별 상세 리뷰에 할애하고 있다. 화장품 리뷰 사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리뷰가 방대해지고 책이 두꺼워지면서 정작 원하는 정보를 빨리 제대로 찾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리뷰한 브랜드 이름을 알파벳 순서로 나열하고, 책면에 A에서 Z까지 알파벳 섹션별로 따로 표시를 해둠으로써 독자들이 원하는 브랜드의 리뷰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배려해 두었다.

 


5장 '폴라스 픽 : 품목별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는 4장의 제품 리뷰 중 모든 면에서 기준을 뛰어넘는 최고의 제품들, '폴라스 픽(excellent!) 등급을 받은 제품들만 따로 모았다. 저자 폴라 비가운은 화장품을 고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피부에 좋은 제품인지, 어떠한 성분이 들어있는지를 꼼꼼하게 따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깐깐한 기준을 통과한 제품들을 5장 폴라스 픽에서 추천해 놓았다. 인상적인 것은 베스트 제품 추천 목록을 피부타입별은 물론 가격별로 분류해 놓았다는 점이다. 품질 못지 않게 가격을 무시할 수 없는 제품이, 그리고 효능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이 잘 붙는 제품이 바로 화장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번역상 아쉬운 점은 '폴라스 픽'을 그대로 번역해야 했냐는 점이다. 폴라스 픽,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이 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다. 뒷장에 이르러서야 Palua's Pick을 그대로 옮겼다는 걸 알고 얼마나 허탈하던지. 차라리 원어를 그대로 표기하거나 아니면 폴라의 선택, 정도로 옮겼어도 괜찮지 않을까. 원서에 충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최소한 독자들에게 그것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는 것 또한 중요하지 않나 싶다. 워낙 외래어가 남발되는 곳이 화장품 업계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6장 '동물 실험 : 고민하는 자들을 위한 화장품'에서는 꾸준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동물 실험에 대한 견해와 동물 실험을 하거나 하지 않는, 또는 견해를 밝히지 않은 화장품 브랜드들을 각각 정리해 놓았다. 폴라 비가운은 동물 실험에 대해 중립적 입장을 고수하고, 자신이 런칭한 화장품 브랜드인 폴라 초이스의 경우 어느 단계에서도 동물 실험을 하지 않음을 자랑스럽게 밝히지만, 현실적으로 윤리적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화장품의 여러 기능을 알기 위해서는 동물 실험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7장 '화장품 성분사전 : 좋은 화장품을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은 예전 5장의 '폴라스 픽'과 함께 6차 개정판에서는 빠졌던 부분으로 이번 7차 개정판에서 처음 만나는 반가운 꼭지다. 또한 저자가 앞선 제품 리뷰에서 그 평가 기준으로 여러 번 강조했던 화장품 성분들에 대해 자세히 거론된 부분이기도 하다. 솔직히 화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보기에 화장품 성분표시에 적혀 있는 표기들은 그 이름부터 낯설어 긴 화학식 이름의 뜻은 물론 효능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화장품 성분이 중요하다는 걸 알아도 이제껏 마땅히 비교해 볼 수가 없었는데, 7장의 화장품 성분사전 덕분에 한결 수월해질 것 같다.

 


이책의 저자 폴라 비가운은 오랜 기간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일하다가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직원으로 취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화장품 매장에서는 제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없이 판매를 해야 했고 고객의 피부 상태보다는 제품 판매에 치중하라고 질책을 들어야 했단다. 그무렵 토니 스태빌의 『미국의 위대한 스킨게임』이란 책을 읽었고, 그책을 통해 화장품의 마케팅의 위력과 화장품 산업을 둘러싼 숨겨진 진실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일을 계기로 폴라 비가운은 화장품 경찰관을 자처하는 화장품 업계의 소비자 운동가이자 화장품 비평가가 되었고, 여러 매체에 출연하고 칼럼을 쓰고 책을 펴냈다. 그리고 이책에 대한 내용은 물론 신제품에 대한 리뷰가 빠르게 올라오는 화장품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있는 웹사이트 '뷰티피디아닷컴'을 개설해 운영중이며, 직접 자신의 이름을 딴 화장품 회사인 '폴라 초이스(Palau Choice)'를 창립해 독자적인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보다 많은 화장품을 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기 위해 화장품 회사는 감성적인 카피와 아름다운 톱스타를 내세운 광고로 소비자를 현혹한다. 그리고 거기에 낚인 소비자들은 소위 명품 화장품이라는 이유로 기꺼이 지갑을 연다. 폴라 비가운은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를 통해 인기 브랜드들이 내놓는 화장품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다. 책의 앞부분에 밝혔듯이 그녀 또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된 제품을 제값에 사기를 강조한다. 과대 광고에 속아 그저그런 제품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소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이야기다. 나 또한 화장품에 대한 그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고해서 이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지금도 시중에는 수많은 화장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각종 기능을 첨가한 기능성 화장품들이 점점 더 세분화되어 그 종류가 두 손으로 꼽아도 모자랄 지경이다. 가격 또한 천차만별이다. 천연화장품 DIY를 배우면서 사용감이나 촉감 같은 소비자들이 선호하는 감성적인 부분을 좋도록 하려면 좋지 않은 성분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화장품을 선택할 때 단순히 광고나 사용감 만으로 결정하면 안 되며, 그 화장품을 구성하는 성분들을 살펴햐 한다는 폴라 비가운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 피부에 직접 바르는 화장품을 고를 때 그것을 파는 데 혈안이 된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 정보에만 의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이제라도 많은 소비자들이 깨달아야 한다. 

 


이책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는 현재 판매중인 제품에 대한 방대한 리뷰를 담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나름의 의미를 가진 책이다. 다만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다면, 외국 저자가 쓴 책이다 보니 이책에 리뷰된 제품들은 모두 소위 명품 화장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를 포함한 다양한 해외 브랜드라는 점이다. 너무나도 당여한 이 사실은 반대로, 나처럼 해외 브랜드 화장품에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즐겨쓰지 않는 소비자에게는, 아쉽게도, 이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품 리뷰가 큰 쓸모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가 제 2의 폴라 비가운이 되어 우리나라 화장품을 리뷰한 책을 내놓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문제이기에, 아쉽지만 소비자인 독자가 잘 골라서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의 여러 유명 화장품 브랜드들이 정식 수입되고 판매되고 있고 그외 다양한 브랜드들이 입점되고 있으며, 그것들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만큼 그런 소비자들에게는 방대한 이책의 제품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가끔 화장품 관련 카페 같은 곳을 가보면 해외 브랜드에 목 메는 사람들을 예상외로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런 이들에게, 특히 해외 명품 화장품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올인하는 이들에게 꼭 폴라 비가운과 함께 화장품을 사러 갈 것을 권하고 싶다. 그분들에게 이책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는 맞춤형 추천도서라 할 수 있다. 제 나라에서는 평범한 화장품들이 물 건너 수출되면서 고가의 명품 화장품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 특히 다른 나??우 폴라 비가운이 들려주는 제품 리뷰와 정보를 바탕으로 똑똑한 쇼핑을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폴라 비가운의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는 화장품 성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과 대하는 태도를 바꾸어 주었다는 점과 성분에 대해 보다 폭넓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책이었다. 이책 덕분에 앞으로 화장품을 구입할 때 아름다운 모델과 화려한 용기, 사용감 등에 의존하기 보다는 화장품이 내세우는 효능과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성분을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됐다. 이책의 내용은 너무 방대해서 한꺼번에 읽을 수도,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기본적인 내용은 읽어보되 제품 리뷰나 성분분석표는 궁금하거나 필요할 때 찾아보는 걸로도 충분하다.

모든 소비자가 이책의 저자 폴라 비가운처럼 화장품 경찰관이 될 수는 없지만 그녀가 알려주는 정보들을 바탕으로 화장품에 대한 진실들을 알아간다면, 최소한 거대 화장품 기업의 화려한 상술에 농락당하는 실수는 조금씩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얇아지는 내 지갑을 위해서, 무엇보다 건강한 내 피부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임을 기억하자. 소비자가 똑똑해지고 깐깐해지면 제품을 만들어 파는 회사들도 변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폴라 비가운의 『나 없이 화장품 사러 가지 마라!』는 좋은 제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해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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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게임 헝거 게임 시리즈 1
수잔 콜린스 지음, 이원열 옮김 / 북폴리오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 헝거 게임(The Hunger Game) │ 수잔 콜린스 │ 이원열(옮김) │ 북폴리오 │ 2009.10 



각 구역에서 뽑혀 온 스물네 명의 소년 소녀 들이 단 한 명의 우승자가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이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라는 『헝거 게임(북폴리오,2009)』의 설정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게임을 한다는 설정이 끔찍했고, 무엇보다 극한의 상황에 몰려 살인을 저지르는 잔인한 과정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테메레르』나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판타지 소설의 맛을 본 터라 연이은 강추 소문에 그만 얇은 귀가 또 팔랑였고, 책을 펼치자마자 완전 몰입해 한 호흡으로 끝까지 내달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어디서도 책을 덮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때는 가상의 미래 사회다. 오랜 전쟁과 자연 재해로 인해 잿더미로 변한 북미 대륙 위에 다시 세워진 나라 판엠은 한가운데 있는 캐피톨과 그들의 지배를 받는 13개 구역의 나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 13개 구역의 나라들이 다함께 판엠에 맞섰다. 그러나 12개의 구역은 캐피톨에게 제압당했고 13번째 구역은 아예 폐허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걸로 반역은 실패했다. 그뒤 판엠은 지난날의 반역을 되새기고 실패의 두려움을 각인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헝거 게임(hunger game)'을 만들어냈다. 

매년 헝거 게임이 열리는 시기가 되면 각 구역에서는 공포의 추첨을 통해 '조공인'으로 불리는 게임 참가자를 뽑는다. 12개 구역에서 십대 남녀 각 한 명씩, 총 24명의 아이들이 조공인이 되어 캐피톨로 보내진다. 약간의 준비과정을 거친 뒤 아이들은 인공으로 만든 야외경기장으로 보내지고, 게임 시작과 함께 그곳에 갇힌 채 몇 주 간에 걸쳐 살아남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최후의 마지막 한 명의 우승자 만이 남을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다. 이게 바로 '헝거 게임'의 규칙이다.


헝거 게임은 기본적으로 최후까지 살아남기 위해 '내'가 아닌 모든 참가자를 죽여야 하는 잔인한 살인 게임이다. 그리고 그 게임을 치를 참가자들은 모두 어린 십대다. 게임 방법은 물론 게임 대상에서도 판엠의 극도의 잔인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게임이 시작되는 순간 참가자들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은 TV쇼처럼 판엠 전역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되고, 동시에 12개 구역의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그것을 봐야 한다. 자신의 자식이나 이웃의 아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또는 누군가에게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본다. 그것 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판엠은 12개 구역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각인시키고 캐피톨에 대한 공포감을 극대화시켜 다시는 판엠에 대항할 수 없다고 세뇌시킨다. 이것이 그들이 매년 '헝거 게임'을 진행하는 진짜 이유다.

또한 캐피톨은 아이들의 진짜 목숨이 걸린 것임에도 헝거 게임을 국가적인 스포츠 경기마냥 이벤트화 한다. 대대적인 식전 행사를 열고 화려하게 치장한 조공인들과 인터뷰를 하는 TV쇼 등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오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캐피톨은 헝거 게임을 통해 식민지 나라들에 자신들의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또한 그것을 오락거리로 만들어 그들을 비웃는다. 인터뷰에 함께 울고 웃다가도 게임 시작과 동시에 서로를 죽이는 조공인들의 격투에 흥분하고 환호하는 캐피톨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매년 사랑하는 아이들을 극악무도한 곳으로 빼앗길 필요가 없는 캐피톨의 사람들에게 TV화면 속의 헝거 게임과 조공인들은 컴퓨터 게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셈이다. '지배자'인 그들에게 헝거 게임은 그저 해마다 즐기는 오락일 뿐이다.


판엠의 가장 가난한 나라인 12번째 구역의 경계에 살며 밀렵으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캣니스는 열여섯 살의 소녀다. 숲에서 아빠에게 배웠던 활쏘기와 사냥 기술은 탄광 사고로 아빠를 잃은 후 그녀로 하여금 가족의 생계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그러나 몇 천 분의 일이라는 믿을 수 없는 확률로 동생 프림이 헝거 게임의 여자 조공인으로 호명되고, 캣니스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인 어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대신 자원한다. 환상의 사냥 짝꿍은 게일에게 프림과 가족을 부탁하며, 캣니스는 남자 조공인으로 지목된 피타와 함께 헝거 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캐피톨로 향한다.

생존 기술을 배우는 얼마간의 훈련과정과 스폰서의 눈을 사로잡기 위한 여러 쇼를 거친 후 24명의 조공인들은 드디어 거대한 야외 경기장으로 보내진다. 결전의 순간, 게임이 시작되자 아이들은 인정사정 없는 살인 게임에 몸을 던지며 피를 뿌린다. 헝거 게임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부를 갖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어진, 일명 '프로' 조공인들은 자기들끼리 일시적인 동맹을 맺어 다른 조공인들을 제거해간다. 반면 혼자 숲으로 숨어들었던 캣니스는 그동안 아빠와 숲을 통해 배웠던 것들을 생존의 기술로 활용하며 숲에 빠르게 적응해간다. 그러나 시청자들을 위해 보다 흥미진진한 게임을 진행할 의무가 있는 게임 진행자들은 자연 재해를 일으켜 조공인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곧 캣니스는 프로들의 일행과 마주하는 위기에 처한다.



단지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를 증오하고 죽이면서 점점 미쳐가는 과정이 그려질까 걱정했던 우려와 달리 『헝거 게임』은 생각보다는 잔인한 장면이나 묘사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게임이 진행될수록 조공인의 죽음은 늘어간다. 살인을 경쟁자 제거를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며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지만, 극도의 정신적 피폐로 빠져 광적으로 무자비한 살인 행각을 이어가지는 않는다. 그것을 극도로 자세하게 묘사해 불쾌감을 전하지도 않는다. 나처럼 비위가 약한 독자에게는 여러모로 참 다행이었다. 

목숨이 걸린 게임 아닌 게임이다 보니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그 긴장감은 바로 서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나 이외의 모든 이들이 '적'인 상황에서는 누군가를 온전히 믿기가 힘들다. 늘 배신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의심의 눈길을 남겨두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나누는 우정과 사랑은 그 진실 여부를 의심받게 되고 동지는 동시에 적의 가능성을 남기게 된다. 피타를 바라보는 캣니스의 복잡한 마음 또한 그런 불신에서 비롯되고, 그것은 관객들까지 헛갈리게 만든다. 피타보다는 약하지만 루의 경우도 비슷하다. 이렇게 적과 동지의 모호한 경계와 심리적 혼란은 이책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더불어 극한의 상황에서 피어오르는 핑크빛 로맨스(또는 로맨스 연기) 또한 독자들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역자의 글을 보니 『헝거 게임』이 예전에 개봉했던 영화 『배틀 로얄』과 비슷한 설정이란다. 그 영화를 안 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제서야 마지막 한 명이 남기까지 서로를 죽인다는 파격적인 설정으로 개봉 당시 화제와 염려를 동시에 불러 일으켰던 그 영화가 생각났다. 과연 비슷하다. 그 영화를 안 봤던 나는 처음 이책의 제목만 보고는 예전에 EBS에서 우연히 봤던 영화 『파리대왕』이 떠올랐다. 한정된 공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미쳐가며 서로를 죽여대던 아이들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목에 'hunger(굶주림)'이란 단어의 연관성 때문일 수도 있고.

책을 읽으면서는 짐 캐리가 주연했던 영화 『트르먼 쇼』가 생각났다. 트루먼의 모든 생활이 세상 사람들에게 그대로 생중계 되는 것처럼 '헝거 게임'에서도 참가한 조공인들의 모든 것을 생중계한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 속의 트루먼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고(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헝거 게임』의 모든 상황이 연출되고 있고 TV로 생중계된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다르지만 말이다. 적과 목숨 걸고 싸우고 숨어드는 극박한 상황에서도 생중계를 의식해 카메라에 잡힐 자신의 표정 하나까지 계산하며 연기하는 캣니스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안쓰러워보였다.  

누군가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데 관중들은 그걸 보고 즐긴다는 점에서 로마시대의 검투사와 스페인의 투우를 비롯한 소싸움, 닭싸움 같은 각종 동물 싸움대회들이 생각났다. 굶주린 사자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검투사를 향해 로마 시민들은 환호하고, 창에 찔려 피를 내뿜으며 죽어가는 투우장의 소나 서로 목을 물어뜯어 피를 철철 흘리는 닭싸움 판의 수탉들을 보며 관중들은 흥분한다.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서로를 죽이는 헝거 게임을 보며 신나서 소리치는 캐피톨 사람들과 우리는, 알고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참, 부끄럽다.


소설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극한 상황에 놓인 열여섯살 소녀 캣니스의 눈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12번째 구역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사는 경계 지역에서 밀렵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캣니스는 사회의 소외 계층이다. 늘 부족한 식량을 위해 캣니스와 게일은 자신의 목숨이 걸린 조공인 추첨표를 식량과 바꾸는 위험을 감수한다. 들어가는 추첨표가 늘어갈수록 조공인으로 뽑힐 확률 또한 높아진다. 그러나 부유한 시장의 딸인 매지는 그런 위험을 감행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풍족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캐피톨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캣니스는 자신의 가난을 통해 빈부차가 생존으로까지 이어짐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또한 헝거 게임을 향한 캐피톨 사람들의 태도에서 판엠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를 깨닫게 된다. 가진 자들은 넘치게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들은 죽어가는 부의 불균형은 물론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가야하는 통제된 사회, 그리고 그것에 반기를 들었을 경우 가해지는 시스템의 잔인함 등을 경험하면서 판엠이라는 거대한 사회를 보는 캣니스의 눈은 한층 성숙해진다. 판엠이라는 가상의 세계를 통해 보여지는 미래 사회나 사람들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씁쓸했다.  


『헝거 게임』의 매력은 가상의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벌어지는 극한의 상황을 설정하고 곳곳의 작은 반전을 통해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많이 잔인하지도 않고, 상황마다 약간의 반전이 숨겨져 있어 지루하지 않다. 무엇보다 극악의 상황에서도 주인공들이 끝까지 인간의 존엄성을 놓지 않는다. 살육의 현장에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민하며 인간으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려고 하는 캣니스와 피타의 태도는 나를 안도하게 했다. 생존의 위험 속에서 피어오르는, 그러나 진심과 연기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그들의 로맨스 또한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이책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함께 컴퓨터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설정들이다. 약간의 변형을 가하긴 했지만 게임의 진행 방향이 비슷해 진짜 컴퓨터 게임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게임에서 아이템을 획득하는 것을 조공인들이 스폰서로부터 받는 선물로의 변형은 무척 신선했다(게임을 안 해서 책을 다 읽은 후에야 뒤늦게 떠올렸다;). 게임 장소가 날씨나 기온을 조절할 수 있고, 자연 재해까지 일으킬 수 있는 거대한 인공 세트라는 점은 영화 『트루먼 쇼』를 떠올리게도 했다. 요것조것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캣니스와 피타가 참여한 '헝거 게임'은 우승자를 발표하며 끝이 났다. 그러나 책의 끝에는 『계속』이라는 두 글자가 박혀 있다. 헉! 한 권짜리인 줄 알았는데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알고보니 『헝거 게임』이 3부작이라는 소문이 솔솔 들려온다. 우승자 발표와 시상 등의 행사들을 마무리하면서 작가는 조만간 시작될 또다른 이야기를 슬쩍 내비친다. 2권에 대한 입질인 셈이다. 게일이 본격적으로 합류해 삼각관계가 형성될 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일 듯하고, 판엠에 대한 캣니스의 불만과 비판은 점점 더 거세질 듯하다. 판엠의 위협 또한 만만치 않겠지. 과연 작가는 2권에서 또 어떤 이야기를 펼쳐보일까. 책을 덮는 순간부터 2권의 내용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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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비오틱 밥상 - 자연을 통째로 먹는
이와사키 유카 지음 / 비타북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평소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건강이나 요리 관련 책들은 기회가 닿는대로 비교적 다양하게 찾아보는 편이다. 특히 건강한 먹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은데 이책을 읽게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크로비오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앞의 '자연을 통째로 먹는'이라는 카피가 눈길을 붙잡았다. 우리 땅의 제철음식들을 먹는 건 그렇다치더라도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먹는 요리법이라니,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책이 추구하는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은 일본의 건강장수법에서 유래된 웰빙, 슬로우푸드, 로하스, 오가닉 등을 이은 세계적인 건강 트렌드로 'macro(큰, 위대한)'+'bio(생명)' 그리고 tic(방법, 기술)'의 합성어란다. 이책의 저자 이와사키 유카는 미국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마크로비오틱 요리 강사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현재 국내에서 활동중이란다. 그간 여러 프로그램에서 마크로비오틱에 대해 소개해왔고, 동명의 원작소설이 있는 드라마 <스타일>의 주인공 서우진 역을 맡은 류시원의 요리자문을 맡았단다. 드라마에서 서우진은 마크로비오틱 요리사로 등장한다. 국내에 최근 마크로비오틱이 유명세를 띠게 된 건, 드라마를 안 봐서 난 모르겠지만, 드라마 <스타일> 영향이 크단다.

마크로비오틱은 앞서 말한 것처럼 식품을 뿌리부터 껍질까지 통째로 먹는 요리법인데, 그래야만 식물이 가진 고유의 '에너지(Energy)=기(氣)'를 그대로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무엇을 먹느냐는 자신의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반영되기 때문에 가급적 인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을 먹을 것을 권한다.

요리법에 앞서 우선 마크로비오틱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마크로비오틱에는 음양조화, 신토불이, 일물전체, 자연생활 같은 4대 원칙이 있다. 음식을 할 때 음양의 조화에 힘쓰고(음양조화), 제 땅에서 자라난 제철 식물을 재료로 삼아 먹고(신토불이), 하나의 식품은 통째로 섭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며(일물전체), 인공적이고 화학적인 것은 피하고 자연의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자연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이 4대 원칙만 보더라도 마크로비오틱이 추구하는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마크로비오틱 4대 원리 각각에 대한 간략한 설명 다음에는 조리기구나 조미료 소개, 눈대중이나 손대중 계량법, 그리고 마크로비오틱의 가장 기본인 현미밥 짓는 방법 등의 마크로비오틱 쿠킹 노하우가 이어진다. 마크로비오틱이 식물을 통째로 먹는 요리법인 만큼 마크로비오틱 재료 손질법이 가장 눈길을 끌었다. 음양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요리법인지라 재료 손질이 중요한데, 평소 먹지 않는 파뿌리나 양파 꼭지 등까지 어떻게 손질하는지 자세하게 소개한다. 재료를 써는 방향 하나에도 음양의 이치가 있다는 게 참 재밌기도 하고 일일이 그런 걸 생각하고 재료를 다듬어야 한다니 조금 머리가 아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몰랐던 지식을 알게 된 앎의 즐거움이 더 크긴 했지만 말이다.

마크로비오틱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요리에 들어간다. 저자는 이책에서 주식, 국, 일품요리, 반찬, 디저트, 치유식로 크게 6개의 꼭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책을 펼쳐보면 다른 요리책과 마찬가지로 왼쪽에는 요리 사진이, 오른쪽에는 레시피와 요리과정, 요리팁 등이 첨부되어 있다. 왼쪽 상단에는 그 요리에 사용되는 주재료의 성질(음양)과 효과나 작용, 일반적인 조리팁 등이 간략히 담겨 있다.

그러나 보통의 다른 요리책과 달리 이책은 요리 레시피나 요리과정, 요리사진 들보다 이 요리에 대한 저자의 글이 지면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요리나 거기에 사용된 식재료에 대한 사연이나 한일 식문화의 차이, 그외 소소한 이야기나 지식 등이 소개된다. 요리책 각 메뉴마다 이렇게 짧은 에세이 같은 글들이 담겨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인지라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글들을 읽으며 재미있어 하기도 했다. 저자와 조금은 친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 요리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몇 장의 작은 사진과 몇 줄의 설명으로 끝나는 레시피를 보자니 설명 부분이 너무 간략하게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은 들었다. 해당 메뉴에 대한 저자의 에세이 글의 공간을 조금만 더 줄이고 요리 과정의 사진들을 조금 더 크고 자세하게 실어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벌써 주부 몇 년차가 된 언니의 말로는 레시피 몇 줄만 있으면 요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나같은 초보는 설명이 자세하면 자세할수록 더 좋다. 사진은 물론이고. 요리책으로서는 나름 파격적인 구성에 장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책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저자가 이책을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책에는 책표지에 등장한 너무 예쁜 두부소보로덮밥을 비롯해 다양한 메뉴들이 등장한다. 평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채소들을 재료로 삼아 만든 음식인 만큼 등장하는 요리들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요리의 재료 선정과 손질 방법이 마크로비오틱의 4대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 분명 다르다. 칼질 방향 하나, 같이 넣는 양념 하나에도 음양의 조화가 숨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늘 보던 밥상의 음식들이 새삼 심오하게 다가왔다. 

몸이 찬 편이라 내장 기능저하로 고생을 좀 한 까닭에 나는 음식의 음양 여부나 그것을 조화시키는 방법 등에도 관심이 많다. 음양조화가 마크로비오틱의 기본 원리인 만큼 이책에는 각 재료가 음성 식품인지 양성 식품인지는 물론 그것들을 음과 양이 완벽하게 조화된 상태인 '중용'으로 만들기 위해서 함께 하면 좋은 식품들을 소개해준다. 각각의 식재료에 대한 이런 음양의 조화에 대한 설명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나오는데, 덕분에 평소 궁금했던 여러 지식들까지 함께 섭취할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다른 요리책과 별다른 게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마크로비오틱 밥상>은 '마크로비오틱'이라는 새로운 건강 요리법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이었다. 예전에는 당연히 버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식물의 뿌리와 껍질에 자연의 기와 음양조화의 원리가 담겨 있다는 것은 신선한 발상이었다. 더불어 전통 한의학에서 자주 거론하는 음식의 음양 조화를 하나하나 따져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인공적인 것을 덜어내고 자연의 맛을 살리려고 노력한 건강 요리법이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책을 덮었으면 이제 마크로비오틱을 조금씩이나마 생활 속에 실천할 차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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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랑 치타가 달려간다 - 2009 제3회 블루픽션상 수상작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0
박선희 지음 / 비룡소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 파랑치타가 달려간다 │ 박선희 │ 비룡소 │ 2009.11 


열입곱 강호의 집에 세 번째 엄마가 왔다. 그리고 강호는 네 번째 가출을 했다. 가출이라고는 하지만, 그저 집이 아닌 아르바이트하는 주유소에서 숙식을 해결할 뿐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수업은 지루하고 가끔 결석은 하지만 그래도 학교에는 간다. 대부분을 술에 취해 사는 아빠와 몇 번째 바뀌는 새엄마가 함께 사는 집에서 자신을 걱정해주는 유일한 존재인 동생 강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겠다는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녁에는 주유소에서 알바를 한다. 힘은 들지만 용돈은 물론 학교 수업료까지 직접 벌어야 하는 '미성년자' 강호에게는 적지 않은 시급과 잠자리까지 제공해주는 주유소 알바는 그리 나쁘지 않다.

세 번째 엄마가 오고 학교에 결석을 하고 주유소로 가출을 한 다음날 등교한 날 외고에서 전학생이 온다. 담임을 따라 교실에 들어선 도윤은 순간 맨 뒤에 앉아있는 강호와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놀랐고, 당황했으나, 교실에서 딱 하나 남은 빈자리가 강호의 옆자리였기에 당연한 듯 짝이 되었다. 그렇게 두 친구는 4년 만에 우연히 같은 교실 옆자리에서 재회했다. 한때 더없이 친한 단짝이었으나 어느 순간 적이 되어 서로에게 상처를 입혔던 그 시간들을 마음 속에 묻어둔 채로. 4년이 지난 지금도 도윤은 강호가 갑자기 자신에게 왜 그랬는지 아직도 궁금해 하고, 강호는 도윤에게 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과 아들의 성적에 눈이 멀어 자신에게 상처입힌 도윤의 엄마를 떠올린다.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는 이렇게 서로에게 아픈 추억이 있는 강호와 도윤의 재회로 시작된다. 소설은 강호와 도윤의 시점에서 교대로 이야기를 진해하며 각자의 상황과 마음을 풀어놓는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빠와 집 나간 엄마, 그리고 번번이 바뀌는 새엄마라는 복잡다단한 가정 덕분에 강호는 일찌감치 자신을 바라보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다. 공부에는 관심없고 담배를 피우거나 교사들의 명령에 반항해 어른들에게는 불량아로 낙인 찍혔지만, 그와 상관없이 강호는 세상의 풍파에서 삶의 중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

반면 부유한 집과 일류대에 다니는 형,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된 부모님, 외고생이라는 그럴듯한 배경을 갖고 있지만, 도윤은 삶의 모든 가치를 성적에만 두는 부모와 학교의 태도에 질식할 것만 같다. 성적이 전부인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몸부림치던 도윤은 강호와 재회하고 그를 따라간 클럽 몽에서 살아있음을 느끼고 밴드 '달리는 파랑 치타'에서 열정을 경험하면서 점점 삶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되찾아간다. <파랑치타가 달려간다>에서는 이렇게 다른 듯 비슷한 일상과 고민을 안고 있는 십대들의 이야기를 슬며시 끄집어낸다. 

날나리와 범생인 강호와 도윤 외에도 이책에는 다양한 모습의 십대들이 등장한다. 자퇴했거나 가출한 비주류 청춘들인 강호의 주유소 알바 친구들이 대표적이다. 어른들의 눈에는 날나리 비행청소년으로만 보이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들의 생각과 고민, 변화를 통해 작가는 사회가 정해놓은 길이 아닌 다른 삶의 길을 정해진 방식과 속도로 가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실패자로 치부할 수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건우형. 남들이 볼 땐 자퇴생일 뿐인 형이 그런 말을 하니 어이없게도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102쪽)'라는 강호의 중얼거림은 바로 그런 이야기들이다. 

강호에게 주유소 친구들이 있다면 도윤의 주변에는 성적지상주의에 묵묵히 순응하는 학원 친구 수연이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늘 교과서와 문제집과 공책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아이. 도윤은 수연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조금씩 발견하는 삶의 에너지를 수연에게도 나눠주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자 하나 보내는 것조차 엄마의 눈치를 봐야하는 수연에게 변화는 쉽지 않다. 또 강호와 도윤 사이에는 학교 선배인 이경이 있다. 개방적인 부모님을 둔 이경은 학생에 대한 강요와 억압이 팽배한 학교의 부당한 처사에 반박하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과감한 결정도 내릴 줄 아는 용기있는 아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이책을 읽는 순간이라도 독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강호와 도윤의 만남, 잊지 못할 지난날의 상처, 도윤의 학교 성적에 대한 엄마의 집착 등으로 얽히던 이야기는 강호의 기타, 도윤의 피아노, 이경의 드럼에 이어 교내 밴드부 결성이라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으면서 변화를 시도한다. 밴드부 결성이라는 쉽지 않은 산을 넘으면서 강호와 도윤은 그간의 마음 속 앙금들을 조금씩 털어내기 시작하고, 일방적으로 엄마에게 이끌려 살던 도윤은 삶의 주체자가 되고자 노력한다. 강호 또한 가출과 방황을 접고 주유소를 나와 동생 강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강호의 주유소의 친구들도 밤거리를 미친듯이 달리던 폭주천사들도 잠깐 비켜섰던 일탈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의 궤도에 진입한다. 물론 이경처럼 또다른 길을 선택한 용감한 아이도 있다. 그러나 각자 방식만 다를 뿐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세는 그들 모두 같다.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는 십대의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솔직담백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펼쳐놓은 성장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이 범생이와는 거리가 먼 소위 '날나리' 또는 '문제아'들이 대부분이지만 조금만 따듯한 마음으로 보면 그들 또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십대들이다. 때론 거칠고 때론 안쓰러운 그들의 모습은 곧 우리 아이들의 모습인 셈이다. 모 예고에서 소설창작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십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책날개의 저자 소개처럼 작가는 이책에서 좌충우돌하는 아이들을 향해 따듯한 시선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권위적인 교사들 가운데 아이들을 이해하며 보듬어주는 김세욱 쌤의 존재는 그래도 우리의 학교의 또다른 희망이었다.

박선희의 <파랑 치타가 달려간다>는 <하이킹 걸즈>, <꼴찌들이 간다>에 이어 블루픽션상의 세 번째 수상작이다.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좌충우돌 하는 가운데 성장해가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흥미로운 잘 씌여진 성장소설이었다. 물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큰 상처를 냈던 강호에 대한 도윤의 마음이 너무 너그럽다는 점과(조금 맹목적인 느낌도 들고) 도윤의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강호는 꼭 그렇게 되갚아야했나 하는 점(물론 그땐 너무 어리긴 했지만), 그리고 성적을 향한 도윤 엄마의 초강력울트라급 집착이 너무 급격히 누그러진 점 등이 조금 아쉽긴 했다. 그러나 단점보다는 살아숨쉬는 아이들의 활기가 느껴지는 장점이 훨씬 더 큰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과 부딪치고 깨지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면서 그렇게 아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질주하는 파랑 치타처럼 그렇게 말이다.




- 드럼과 베이스도 끼어들어 연주에 합세했다. 제대로 연습한 적이 없어 코드가 틀리기도 했지만 신경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 순간 모두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어른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십대를 살아가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지금, 이 시간을 즐길 권리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었다. 수없이 부딪치고 저항하며 열정을 쏟아 만들어 낸 시간을 우리는 즐겨야 했다. (238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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