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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 사과는 잘 해요 │ 이기호 │ 현대문학 │ 2009.11
'이기호'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그의 단편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통해서였으나 가장 먼저 읽은 책은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재치있게 잡아낸 한 뼘 에세이 『독고다이』였다. 통통 튀는 제목처럼 『독고다이(獨 Go Die)』에서 펼쳐지는 그의 재기발랄함에 반한 나는 그의 전작인 단숨에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물론 『최순덕 성령충만기』까지 세트로 장만했다.
그러나 웃기게도 정작 내가 처음 읽은 이기호 작가의 소설책은, 그책들이 아니라, 포털사이트 Daum에 연재했던 소설인 『사과는 잘해요』가 됐다. 모든 게 내 게으름 탓임을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이책을 덮으며 그의 단편소설들을 먼저 읽어봤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의 첫 장편소설 『사과는 잘 해요』는 에세이집 『독고다이』를 읽으며 기대했던 것과는 한결 다른 분위기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시봉과 '나'는 시설에서 처음 만났다. 시설에서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을 먹었고, 양말이나 비누를 포장해 시설원생이 다같이 찍은 사진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유도 모른 채 매일 매를 맞았다. 매를 맞기 전에 그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해야 했고, 어떤 죄를 고백하느냐에 따라 매의 정도가 달라졌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지 않는 날에는 더욱 많이 맞았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죄를 찾거나 생각해내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뒤엔 반드시 고백했던 죄를 지었다. 사과했던 죄를 짓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설원생의 수가 늘어나자 복지사들은 이번에는 그들에게 시설원생들의 죄를 대신 고백하는 반장의 임무를 맡겼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죄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죄가 없다던 사람들도 계속되는 구타와 집요한 질문에 결국 자신의 죄를 하나둘 고백하기 시작했다. 사과할 죄가 생각나지 않으면 그들이 대신 찾아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 시봉은 복지사들에게 시설원생들의 죄를 대신 사과했고, 그들의 발길질을 받으며 반장으로서의 우쭐함을 느꼈다.
그렇게 약과 폭력에 길들여진 채 살던 중 시설에 새로 도착한 구렛나루 아저씨로 인해 일대 파란이 일어난다. 시설의 관계자는 잡혀갔고, 시설은 폐쇄됐으며, 시설원생들은 시설에서 나왔다. 약도 폭력도 없는 세상으로 나왔지만 나와 시봉은 오히려 어지러움을 느낀다. 시봉의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그들이 밥값을 하고자 생각해 낸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사과해 주는, 일명 사과대행업이다. 죄를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은 시설에서부터 쭉 해왔던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뢰인이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의 죄를 대신 사과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죄를 찾아야 했다. 끊임없이 죄를 찾고 죄를 알려주고 그 죄를 고백하며 사과하기를 집요하게 종용하는 나와 시봉의 행동은 악의는 없었지만 평온하던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사람에게 사과를 위한 다른 죄를 만드는가 하면 반드시 사과하겠다는 일념에 예상외의 방법으로 사과를 표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과가 계속될수록 일은 꼬여가고 사람들은 점점 불행해진다.
『사과는 잘해요』는 이기호의 다른 책들처럼 쉽게 술술 읽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리 가볍지 않다. 정신연령이 멈춰버린 나, 진만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들은 신문의 사회면에서 접하던 우리 사회의 그늘진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다. 시설에서 나와 시봉의 일상이었던 알약과 폭력은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무기력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폭력 전 그들을 괴롭혔던 '죄'와 '사과'의 문제는 시설을 나온 뒤에도 그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사과 대행을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의 죄를 찾고 묻고 사과를 종용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사회적 폭력의 피해자에서 어느새 가해자가 된다.
『사과는 잘해요』에서 '사과'는 지은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앞으로 지을 죄를 미리 선언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사과를 하는 순간, 그들이 시설의 복지사에게 했던 것처럼, 그 죄는 지어야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정육점 주인과 뿔테 남자를 그렇게 만들었고, 진만 자신 또한 그렇게 했다. 작가는 진만과 시봉은 물론 시설의 원장과 복지사, 시연과 뿔테 안경 남자, 정육점 주인과 과일가게 주인, 사과대행 의뢰인과 김밥집 여자라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우리들의 죄에 대해, 죄의 의미에 대해 반문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지, 그 죄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샴쌍둥이처럼 모든 걸 함께 하던 나와 시봉 사이에 균열이 감지되면서 이야기는 끝을 향한다.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깜짝 반전도 등장한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상태라 조금 놀랐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조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나와 시봉의 이야기는 끝까지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그들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자체가 아이러니한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볍게 읽히는 글과 달리 책을 덮을 때 마음은 묵직하고 공허해진다.
책 뒷면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읽어보니,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되었던 『사과는 잘해요』는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골격만 그대로 가져왔을 뿐 완전히 새로 씌여졌다고 한다. 소설 분량도 반으로 줄었단다. 인터넷 연재글은 읽어보질 않아 이 책과 얼마만큼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미 발표된 글을 완전히 새로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재작업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는 박범신 작가의 그 '한마디'가 뭔지 참으로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장을 덮으며 작가에게 이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했다는 카프카의 『심판』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부디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세상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