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것이 따로 있을까? 그것이 따로 있다면, 이렇게 끝날 조짐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 이어지고 있다. 조짐도 무엇도 없이 이것은 이렇게 이어진다. 박조배는 금방이라도 세계가 망할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d는 의아했다. 망한다고?왜 망해.내내 이어질 것이다. 더는 아름답지 않고 솔직하지도 않은, 삶이. 거기엔 망함조차 없고……그냥 다만 적나라한 채 이어질 뿐. (94쪽)
유사시라는 말은 비상한 일이 벌어지는 때라는 뜻인데 비상한 일은 늘 일상에서 조짐을 보이게 마련이라고 박조배는 말했다. 갑자기……라는 것은 실은 그다지 갑자기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불시에……라는 것은 내 생각에…… 우리가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 일상을 말이다. 일상에 조짐이 다 있잖아. 전쟁을 봐라. 맥락 없는 전쟁이 없고……(91쪽)
아래쪽이 파랗고 위쪽이 흰 그 배를 d는 알아보았다. 오늘이 1주기라고 박조배는 말했다. 그 배가 가라앉은지 1년이 되는 날.(86쪽)
혁명에 관심이 있느냐고 d는 물었다. 박조배는 깍두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혁명가들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고 그 믿음에 따라 바꾸려고 했거나 정말바꿔버렸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짜 감탄스럽지…… 특히 전간기와 2차 대전 이후의 예술가들에게 관심이 많았어. 더는 근본도 없고 존나 바닥도 없던 시대에 혁명적 예술가들이 그것을 음…… 그 존나 없음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되게 궁금했거든……(85쪽)
죽음과는 얇은 금속판 한 겹만을 남겨둔 채 체공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히 환멸의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어요. 그는 그것을 가지게 된 거죠. 탈출의 경험을.내게는 그것이 없어.나는 내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는데요.(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