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연휴를 맞아 도서관에서 야심차게 책을 왕창 빌려왔다. 그 중 첫 번째 책으로 이 책,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집어들었고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다 읽음. 뭐랄까 이게 재미있다면 재미있는데 시시하다면 좀 시시하고...약간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느낌도 나고 그렇다(아 너무 큰 스포인가). 독서 후기를 남기는 김에 그동안 읽었던 찬호께이 소설에 대해서도 좀 기록을 남겨보려고 한다.


(지금부터는 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스포)




1.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제목처럼 '기억을 잃어버린 형사' 이야기의 탈을 쓰고 있다. 즉 형사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억나지 않음'이라는 말이 약간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자신의 '진짜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자신을 '형사'라고 착각하는 인물이 서술자로 등장해 진행되는 얘기다. 즉 서술자가 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인데 그 서술자는 '형사'가 아니라 '자기가 형사인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렇다면 사건의 범인은...? 서술자 그 자신......??????? 이었다면 너무 뻔하고 재미없었겠지만, 다행히도 아니다. 그러면 진짜 너무 심하게 시시했을 듯ㅠㅠㅠㅠ 



2.

주인공의 이름은 옌즈청. 어린 시절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연인이 교통사고로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했던 트라우마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너무 큰 트라우마라서 누구에게 선뜻 털어놓을 수도 없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는 자책감을 잊을 수도, 떨칠 수도 없다.


그런 옌즈청이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대상'이자 '아버지의 그림자를 찾'을 수 있는 대상이 있다. 사고 현장에서 아버지를 구하겠다며 몸부림치던 자신을 붙잡아주었던,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린젠성이라는 남자였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직업도 없으며 거친 사내이지만, 자신에게 계속 관심을 보여주는 그 사람 덕분에 친구 하나 없는 옌즈청은 완전한 나락 속으로 빠지지 않는다. 다행히도.


그런데 렌진성이 한 살인사건('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이라고 소설 속에서는 명시됨)의 범인으로 지목된다. 경찰에게 쫓기던 그는 교통사고를 일으키고 사망한다. 그의 죽음은 혐의를 입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남자, 그 남자의 아내, 아내가 품고 있던 아기 모두를 한꺼번에 몰살시킨 살인자로 확정된다. 사건이 일어난 2003년부터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09년까지.


그리고 2009년 3월 15일, 옌즈청이 자신을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조사했던 형사 쉬유안'이라고 착각한 채 눈을 뜨면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이 영화화되면서 이 사건에 대해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포커스'라는 신문의 기자 루친이가 경찰서로 쉬유안 형사를 찾아오고, 자신을 쉬유안이라고 생각한 옌즈청은 하루 종일 형사 행세를 하며 루친이와 함께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다닌다. 진범을 밝혀내고 렌진성의 혐의를 벗길 때까지...뭐 줄거리는 이 정도로만 쓰고......



3.

(강력 스포) 뤼슈란의 언니인 뤼후이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 좀 싸해서, 뭐여 이사람이 동생 죽였나...싶었다. 동생과 제부가 죽은 장면을 직접 목격했고 그로부터 시간이 6년밖에 안 지났는데 그 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음. 그리고 인터뷰에서 하는 말들도 되게 미심쩍었다. 뭐 이런 말들.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걸요. 내려놓을 건 다 내려놨어요."

"그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죠. 고통은 이미 충분하다고 느꼈어요. 빨리 내려놓지 않으면 악몽이 계속될 뿐이죠."

"그때 전 되도록 사건에서 멀어지고 싶었어요. 하루라도 일찍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죠."


아니 무슨 소리야 피투성이가 된 시신을 본인이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한 때로부터 겨우 6년밖에 안 지났는데, 어떻게 '내려놓을 건 다 내려놨'고 '고통은 이미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어ㅠㅠ '하루라도 일찍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냐ㅠㅠㅠㅠㅠㅠ 싶어서 뤼후이메이의 말들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의심이 커졌다. 그리고 죽은 동생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이사람 이상하네 이상해'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슈란은 어렸을 때부터 질투가 심하고 좀 제멋대로였지요. 저는 슈란과 매부가 여전히 다투고 있을까봐 걱정이 돼서 혼자 내려갔어요."


아무리 '실제로' 동생이 제멋대로였다고 해도, 죽은 동생에게 누가 저런 말을 쉽게 합니까ㅠㅠ 동생이 아닌 남한테도 고인이라면 나쁜 말 하기가 쉽지 않은데...그래서 나는 책을 읽은 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뤼후이메이가 진범일 거라고 생각했고 이야기가 진행되어 나갈 수록 작가가 옌즈청을 범인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어디 속을까보냐????? 하는 심정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가 쉬유안(으로 자신을 착각한 옌즈청)이 옌즈청과 동일 인물인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가기 시작해서 '아니 이게 웬 개소리...'하는 기분이 들었는데...



4.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의미 기억'과 '일화 기억'이 나오는 부분, 그리고 옌즈청이 왜 자신을 쉬유안으로 착각했는지가 설명되는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는 황당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개연성 있는 얘기인 것처럼 써놨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네-_- 싶어서 찬호께이 실망이야-_-_-라는 기분이 들려고 했다. 뤼후이메이가 자신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또다른 살인을 시도하는 장면에서 '사실은 뤼후이메이가 뤼슈란이었고 죽은 뤼슈란이 뤼후이메이임'이라고 옌즈청이 말할 때도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아니 이건 또 뭐야...'라는 기분이었지 멋진 반전이라는 느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린젠성의 혐의를 벗기고 싶었던 옌즈청이 자신을 쉬유안에 동일시했듯이, 뤼슈란을 죽였다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뤼후이메이가 자신을 뤼슈란과 동일시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는 실망스럽지 않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방법'으로써 자신의 문제(=범죄 사실이 밝혀지는 것)를 해결하려고 했던 범죄자의 이야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방법'으로써 범죄자를 찾아내어 자신의 문제(=범죄 사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를 해결해낸 '형사 아닌 형사'의 이야기를 겹쳐서 하나의 플롯을 만들어냈다는 건 매우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옌즈청이 '둥청아파트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를 보러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은 좀 뻔했으나, 맨 마지막 장면을 서장의 장면과 이음으로써 '옌즈청이 그런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조금이나마 설득력을 더 부여한 건 좋았다. 시시할 뻔했던 결말이 그래도 좀 흥미로워졌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게 일어날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정도는 높지 않은 데다가(즉 개연성이 높지 않음) 핍진성은 매우 적기 때문에...너무 재밌어 꼭 읽어봐!!!! 라고 호들갑떨면서 추천할 만한 소설처럼은 느껴지지 않음. 그냥 별 세개 정도로 합시다...



5.

이 책까지 해서 찬호께이 작가의 소설을 총 네 편 읽었다. 맨 처음에 망내인을 읽었고, 그다음에 염소가 웃는 순간을 읽었고, 그다음에 13.67을 읽었고, 그다음에 기억나지 않음, 형사를 읽었는데


제일 재미있던 건 역시 13.67. 워낙 재미있다는 평이 많은 책이라 과연 뭐 얼마나 재밌길래...하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고!!!!!!!!!! 읽는 내내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계속 마지막 페이지를 먼저 봐버리고 싶었다ㅠㅠ 정말 안간힘을 기울여 끝까지 결말을 먼저 보지 않았고, 대신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읽었다 빨리 결말 보고 싶어서...


기억나지 않음, 형사 읽고 나니까 13.67이 다시 읽고싶어져서 그냥 전자책을 살까...하고 알라딘에 들어가봤더니 구판이 절판되고 개정판이 나왔었네(작년에). 이 재미있는 책이 겨우 10쇄밖에 안 됐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30쇄는 됐어야 할 것 같은데 거참.


다음으로 재미있었던 건 망내인. 13.67보다 덜 재미있지만 더 현실적인 얘기기도 하다. 이렇게 인터넷이 무섭다ㅠㅠ는 생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권해주기도 했고.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라 언제 끝나나 싶은 순간도 없지는 않지만, 잘 읽히고 심란하고 서글프다. 책의 띠지에도 쓰여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흉기가 아니라 악의다'라는 문장도 참 슬프다. 김지운 감독(세상에나)이 드라마로 만든다는데 책보다 재미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혼자 해 봄. 


제일 재미 없었던 건 역시 염소가 웃는 순간. 뭐랄까 오컬트가 얼기설기 덕지덕지 칠해진 청춘물...이라고 해야 하나. 초반부터 '그만 읽을까...'하는 생각과 '그래도 망내인 쓴 작가 책인데 조금만 더 읽어보자'하는 마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우걱우걱 읽었고 중반 이후로는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정말 힘들게ㅠㅠ 겨우겨우 끝까지 읽었다ㅠㅠㅠㅠㅠ 다 읽고 나서의 결론은 '하 초반에 집어치웠어야 했는데...'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좀더 생생하고 이야기가 좀더 매력적이었으면 아리 애스터 영화 같은 느낌이 났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뭐 에휴...넷플릭스에서 보다가 집어치운 '10대들 등장하고 오컬트 섞인 노잼 시리즈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처럼 만들고 싶었겠지만 그보다 훨씬 재미없게 만든 온갖 '청춘호러물'들이 떠오르기도 하고...절레절레절레...그래서 염소가 웃는 순간을 읽을까 말까 하는 분이 혹시라도 계시다면

1) 웬만하면 읽지 말고

2) 시간이 엄청 많으면 읽고

3)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다면 읽고

대신 큰 기대는 절대 안하시기 바람.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기대가 적으면 재미가 있기도 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