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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
윤성희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평점 :
1. 윤성희소설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맨 처음에 읽었던 건 거기, 당신이었다. 십년도 더 전이다.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유턴지점에 보물지도를 묻다부터 마음에 들었다. 봉자네 분식점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소설이 잘 가, 또 보자였던 것도 좋았다. 다음 책이 나오면 또 찾아 읽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 후에 감기와 구경꾼들과 웃는 동안이 순서대로 나왔고, 베개를 베다와 첫 문장까지 나왔다. 모두 나오자마자 샀다. 늘 또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2. 상냥한 사람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생각했다. 상냥한 사람의 이야기일까 상냥하고 싶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결코 상냥해지지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일까. 문득 '상냥한'이 무슨 뜻인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페이지를 열었다. '성질이 싹싹하고 부드럽다.'라는 뜻풀이를 확인하고는 음 역시 나랑은 거리가 먼 형용사 맞군, 하고서 표지를 펼쳤다.
3. 소설은 아역배우 출신인 형민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형민뿐만 아니라 형민의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딸, 직장 동료들, 형민이 출연했던 TV 토크쇼의 진행자, 형민이 출근할 때 들르는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파는 부부 아들의 친구, 형민이 사는 아파트 할머니들, 형민이 들른 휴게소에서 만난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직조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극적인 사건들이 있고 자기 나름의 입장이 있다. 형민은 아내와 이혼하고 딸과 떨어져 지낸다. 형민의 딸 하영은 친구를 사귀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학교에서 벌어진 따돌림의 방관자로 지목됐다. 직장 동료들은 횡령을 했고 차도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생을 다치게 했고 잘못된 일을 못본 척했다. 포장마차에서 샌드위치를 팔던 부부는 사고를 당했다. 형민은 어머니를 잃었고 아내와 사별했고 TV 토크쇼의 진행자는 자살했으며 하영이 외면했던 친구는 자살 기도를 했다. 강차장의 아들도 강차장을 도둑으로 몰았던 문방구 주인도 죽었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과 함께 나와야 할 것 같은, 억울하고 분하고 속상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감정들은, 문장 사이에서 스윽, 하고 지나간다. 형민의 아내가 교통 사고로 입원해 있다가 결국 죽는 내용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형민은 버스를 타고 아내는 택시를 탔다. 그리고 그 택시는 사거리에서 신호위반을 하다 트럭을 박았다. 형민의 아내는 응급실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아내의 귀에 대고 형민은 늘 똑같은 말을 했다. "어서 일어나자. 그러면 내일 풍경이 다르게 보일 거야." (177쪽)
어떻게 보면 굉장히 건조한데, 그 건조함 때문에 더 많은 소리와 장면과 냄새를 상상하게 되는 이런 서술. 그래서 건조하다기보다는 담담하다고 느껴지는 말투. 울고 불면서 해야 할 것 같은 이야기를 조그맣게 속삭이듯이 전달하는 목소리를 따라가고 있다 보면,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조차 꺼려하는 서술자가 눈 앞에 그려진다. 내가 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주는, 정말이지 이 책의 제목처럼 상냥한 서술자.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고맙다는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의 수많은 슬픈 이야기들이 자극적으로 진열되어 있지 않고, 신파로 흘러가지 않아서. 어디선가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는 서술자의 목소리에서 지긋지긋한 삶의 누추한 주름들을 '그래도 아름답게 보아주는' 소설가님의 시선이 느껴져서.
4. 몇몇 장면에서는 지난 소설집인 베개를 베다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영이 같은 학교 친구의 따돌림을 방관하는 에피소드나 형민이 아내와 이혼한 후에도 만나서 낮술을 마시고 방송에 나간다고 새 양말을 신는 장면, 형민과 강차장이 할머니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강차장이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내용 같은 거. 베개를 베다를 읽을 때 기억에 남았던 부분들이라 그런 것 같다. 베개를 베다에 실린 여러 소설들의 특정한 장면들이 상냥한 사람에서 다시 재생된 것 같은 느낌. 지루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겪은 것의 반복인 경우도 많으니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들로만 이루어진 하루 같은 건 없으니까.
서술자만 상냥한 게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상냥해서, 여운이 남는 에피소드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와 이거 진짜 내 얘기다 같은 건 별로 없었는데, 그건 에피소드들이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상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설이란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주지만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고 짐작하기도 하고) 전혀 아쉽거나 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냥한 사람들의 섬세한 말들과 행동들로 인해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 했던 말을 계속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도 잠들지 못하는 '친구'의 무릎에 오른손을 올려놓고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할머니와 악몽을 꾼 아이의 가슴을 토닥여주며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5. 정작 나를 가장 심란하게 했던 인물은 강차장이었다. 이런 문장들을 읽을 때가 그랬다.
이십대 시절 강차장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등교하는 아이들을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치기 어리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될 수 없겠지만 뒤늦게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262-263쪽)
유쾌한 사람, 나는 그 말이 좋았어. 그런데 다리가 부러져 산속에서 구급대원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 마냥 유쾌한 사람으로 살 수는 없겠구나. 다리를 잃은 아르바이트생은 매일 회사 앞에서 시위를 했고, 그 아이를 친 후배 녀석은 출산 중 한 아이를 잃었지. 그때도 나는 우리 딸들하고 영화도 보고, 제주도 여행도 갔다 오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278-279쪽)
나도 그랬다. 이십대 시절,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가 나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싫었다. 정확하게는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직업을 갖게 되고, 그 삶을 살게 되면서, 그 때의 내가 얼마나 치기 어렸는지 깨달았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말은 사실 나 자신이 누군가로 인해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거였고, 더 정확히는 누군가 깊이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상처를 주고받고 갈등을 겪어나가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걸.
여전히 나는 관계에 서툴고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지금 잠깐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려고 애쓴다. 지금이 아니면 이들을 만날 시간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만나는 이들이 나에게 주는 영향은 분명히 있고, 그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렇다면 나는 이들이 준 좋은 것보다 더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고 싶다. 형민을 만난 아이처럼, 아이가 만난 형민처럼.
6. 아픈 할머니를 먼저 꼭 안아주는 마음, 그걸 잘 해내는 사람.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에도 사과하는 마음, 그 마음을 전하기 위해 지렁이 젤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 처음 만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마음, 그랬다가 아이가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면 쪼끄만 게 어른한테 버릇없다고 혼을 내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는 사람. 이런 마음이라면 괜찮지 않나, 하고 생각한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어깨를 겯고 살아가기에는 말이다.
그 마음을 상냥함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상냥한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아주 특출난 삶이 아니더라도,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삶이라도, 때로는 불쾌함과 후회를 견뎌야 하는 삶이라도, 이런 상냥함이라면 상처로 좍좍 갈라진 삶의 틈새들에 바를 수 있는 연고 역할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니까. 그리고 이런 상냥함을 잔뜩 만날 수 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이 더이상 없는 것만 같을 때, 지금의 슬픔만으로도 내가 꽉 찬 것 같을 때, 상냥한 마음을 주고받는 상냥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쉬어가고 싶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슬픔의 그릇을 조금이나마 키우기 위해서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먼저 있어야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