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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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읽어보고, 그 매력에 <고백>까지 읽게 되었다. 읽은 순서와는 다르게 <고백>이 처음 쓴 소설이고, <속죄>는 그 후에 쓴 소설이다. 두 소설의 형식은 비슷하다. <고백>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현재 한국에서 개봉예정이어서 필자는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읽은 순서에 의한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고백>보다 <속죄>가 더 낫다라고 생각한다. 고백이 밖을 향한다라고 한다면, 속죄는 안을 향하는 소설이다. 고백의 인물들은 타인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행하려하고, 속죄의 인물들은 타인에게서 받은 무언가때무에 자신의 상황에 부딪히는 소설이다. 속죄는 고백과 비슷해 보이지만, 좀 더 진일보 하였다. 긴 시간의 텀을 이용하는 현재 과거의 방식이 다양한 시점을 이용하면서도 짜임있게 진행되고 있다. 어쩌면 이 긴시간의 틈은 영화로는 메우기가 힘들 것이고, 그래서 고백이 영화로 선택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초반의 흡입력있는 설정이나, 사건들이 고백이 영화적인 이유는 있다. 하지만, 고백은 인물의 독백들이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물들이 보여주는 의식, 그 논리들이 조금은 비약이라는 생각과 함께, 감정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것이다. 사건에 전말에 대한 것도 초반에 이미 소진되어 중간은 사건의 진행보다는 인물의 관점만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에 지루한 면도 있다. 물론 후반에 다른 사건이 있지만, 그건 생각보다 임펙트가 있지 않다. 이 임펙는트 사건의 반전을 애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주는 이야기의 마지막 정서가 그다지 약하다는 것이다. 아마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동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 생겼을 것이다. 영화가 소설의 이런 부분들을 잘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다지 매력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히려 속죄의 짜임이는 형식에 고백의 사건들을 접목시키는 시도를 해본다면, 그 시도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변행되었는 가를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이 <고백>이라는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는지는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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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 렛미고 - Never Let Me Go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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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Never let me go


‘아일랜드’....와...‘스카이 크롤로’ 비교해서 보기... 비교라는 접근이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 접근하는 관점에 주목하며,, 각각의 특징을 (감탄하며)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됨.
 

Si-Fi의 접근은 자유롭다.

달에 가기 위해 우주선을 탈 필요는 없다. 자전거를 타고도 갈 수 있다.

우주선을 타고 달에 갈 필요도 없다. 친구집을 방문하러....단 여기서 비용의 문제는
배제한다. 있을 법한 상황을 풀어가는 감독의 선택이 처음에는 의외였지만, 마지막은 놀라웠다. 
 

어쩌면 아주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애초부터 영화는 우리에게 손가락이 아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그 어떤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필자가 주인공들에게 느낀 연민은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연민이 아닌, 우리의 삶에 대한 슬픔이었다. 알지만 피하지 못하고,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삶의 그러함...이라고 할 수 있다.

과감한 선택 속에서 아주 작은 부분까지 균형을 맞춘 영화다. 어쩌면 이러한 소재의 홍수 속에서 다른 주제를 끌어낸 영화이다.
 

몇 번의 '도네이션'후 그들은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 중 둘은 '연장'하고 싶어 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나이든...노인들이 삶의 편린을 껴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자조하며 만나는 그런 성숙함이 서려있다.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그러한 것들에 나는 두려움과 슬픔을 느낀다. 나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일랜드에 과 비교하여 인간적인다. 영화의 우열을 애기하는 것이 아니다. 쿨하게 인정한다. 영혼이 있는 존재 ..인간처럼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더 살기위해...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은 없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절대 명제 속에서 그러한 질문은 소용이 없다. 결국 우리도 그들도 예정되로 죽어간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세를 믿지도 않는다...삶이라는 것을 통째로 한 번 복습한 사람들 같다. 그들의 학교에서 어떤 교육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경쟁도 없었고, 시험도 없었고, 먹고 살기위한 노력도 없었다. 특별한 직업을 위한 장래 희망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랑만이 그들이 '연장'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된다. 사랑하기 위해 조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일년의 그들의 일년과 다른다. 시간은 역시 상대적이다.
 

'사랑'을 위해 '연장'을 욕망하는 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다. 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 라는 것에 대해 자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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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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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의 시점으로 소설은 이루어져 있다. 시점의 변화는 사건에 조금씩 다가면서, 인물들의 감춰진 삶을 보여준다.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접근하는 다향한 시점이 아니다. 각자의 상황에서 바로 본 그 정황이 하나하나의 퍼즐이 되어 점점 그림이 완성되어 간다. 각 시점이 가진 정보의 차이, 즉 단서를 이용하여 속도감이 더해진다. 책을 읽는 동안 큰 하나의 사건을 따라가는지...아니면 그 사건에 휘말린 이들의 삶을 따라가는지가 불분명해진다. 이 두개의 생각은 번갈아 가며 찾아온다. 그 어떤것도 쉽게 책을 놓게 하지 않는다. 어째면 이 이야기는 다섯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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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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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주사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크게 떴다. 그 놀라는 반응은 첫 번째 노린 효과였다. 아, 당신이 미국 박사님! 한국 사람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공무원 같은 보수 집단에게 미국이란 그 얼마나 거룩하고 눈부신 대상인가.
- 마노아




억(億)이란 뜻을 아는가? 그 글자는 사람 인 변에 뜻 의 자가 합해진 거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건 실재하는 수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만 있는 큰 수라는 뜻이야. 그 글자가 만들어졌던 그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경제 규모가 작았으니까 억 단위의 금전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거야.
- 마노아




우리는 흔히 분노와 증오를 감정적인 것, 또는 비이성적인 것으로 값싸게 취급하거나, 경멸적으로 비웃는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비인간적인 불의와 반사회적인 부정이 끝없이 저질러지고 있다. 그런 그른 것들을 보고도 아무런 분노나 증오도 안 느낀다면 그것이 옳은 것인가. 더구나 지식인들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분노와 증오를 느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처절하게 살아온 민족일수록 그 지식인들은 가해자들을 향해 식을 줄 모르는 분노와 증오를 품어야 한다. 그 시간과 세월을 초월하는 분노와 증오는 이성적 판단과 논리적 분석이 없이는 생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분노와 증오는 일시적 감정이나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고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인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현실의 부당함과 역사의 처절함에 대해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다면 그건 지식인일 수 없다. 더구나 작가로서 이성적 분노와 논리적 증오가 가슴에 담겨 있지 않다면 그는 작가일 수 없다.
80년대 그때에 큰 자극을 받았던 어떤 작가의 글 - 마노아




전인욱은 늦은 밤길을 혼자 걸었다. 처자식 있는 몸!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보다 훨씬 더 호소력이 강한 자기변명의 수단이고 무기였다. 그리고 비겁자, 보신주의자들이 가장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였다.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그 한마디는 그 어떤 난처한 입장, 그 어떤 궁지에서도 단숨에 탈출할 수 있는 만사형통의 묘수요, 만병통치특효약이었다. 그 말의 밑뿌리는 우리의 골수에 박혀 있는 인정주의였다.
- 마노아




좀도둑은 포승 받아도 큰도둑은 상 받는다. 우리의 속담이다.
재벌들이 저지르는 그 불법 행위는 분명 사회를 병들게 하고 나라를 망치는 범죄이고, 그 피해는 국민 전체에게 씌워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동안 재벌들의 경제 범죄에 대해 너무나 관대했다. 왜 그랬을까. 기업들이 잘되어야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생각때문이었다.
- 마노아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는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으로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 마노아




투표가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이듯이, 우리가 단결한 불매운동은 기업들과 우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 혁명’이다. 우리가 그 어리석은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기업들은 더욱 신바람 나게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간다.
감기 고뿔도 남 안 준다는 말이 있다. 하물며 왜 재벌들이 당신들에게 돈을 주겠는가.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 내고, 거미줄도 수만 겹이면 호랑이를 묶는다. 조상들의 일깨움이다.
국민, 당신들은 지금 노예다.
- 마노아




사흘이면 남의 일은 다 잊어버린다는 그 말을 다시금 입증해 주듯이 한동안 끓는 물 넘치듯 시끌벅적 왁자지껄해 대던 사람들의 입도 잠잠해지고 있다. 속이 터지는 경제민주화실천연대에서만 어서 빨리 수사를 진행하라는 시위를 검찰청 앞에서 날마다 벌였다. 그러나 그건 법에 저촉되는 것을 피한 1인 시위였다. 그 침묵의 외로운 시위는 저마다 바쁘고 지친 도시인들의 눈길을 전혀 끌지 못했다.
- 마노아




정치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무도덕적인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이다. 그런 존재들에게 국민의 생존권과 재산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을 송두리째 넘겨주고 말았으니 그 결과야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들이 돈과 결탁하는 ‘정경유착’이 벌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배신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또 다른 감시와 감독 조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시민단체다.
- 마노아




“충고란 그동안 있어 왔던 우정에 대한 배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배신을 무릅쓰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 마노아

 

‘이 세상에서 생산되는 먹거리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고루 나누어 먹고도 남는다. 그러나 부자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모자란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 마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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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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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온 글 -


1. 소설 속 세계의 현실성 - “아파르트헤이트, 그 이후" 

1994년 4월 드디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종식되고 남아공은 최초의 흑백연합정부를 수립했다. 흑인을 대표하는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백인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국민당(NP)이 연합하여 구성된 남아공 연합정부는 “보복 없는 과거청산”이라는 대명제를 구현하기 위해 1995년 11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발족시켰다. 이 위원회는 아파르트헤이트 시대 백인정부가 저지른 수많은 인권탄압과 잔악행위는 물론 ANC를 비롯한 반(反)정부진영이 투쟁 과정에서 빚어낸 보복적 폭력 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에게 경제적ㆍ법률적 보상을 관장했다. 위원회는 청문회를 통해 사면을 신청한 가해자들의 고백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그 고백의 진실여부에 따라 가해자의 사면을 결정하고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해 국민통합과 화해를 모색했다. 위원회는 1995년 12월부터 1998년 7월까지 2년 7개월 가량 존속했으며, 2000년 11월까지 총 7,112명이 사면을 신청해 그 중 849명이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핵심인물들은 사면을 신청하지도 않았으며, 신청자들의 대부분은 흑인 경찰을 비롯한 하위직 공직자들이었다.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아파르트헤이트의 가해자들이 위원회에서 한 증언들은 자신의 죄과에 대한 깊은 참회와 반성에 바탕을 둔 진실의 고백이라기보다는 사면을 얻기 위한 하나의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그리고 증언의 과정에서 자신을 체제의 또 다른 희생자로 합리화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죄과의 사실에 대한 인정은 있었지만, 그것을 진실하게 참회하는 것은 부족했으며, 이러한 제도적 절차만으로는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남아공에서 ‘진실과 화해’의 문제는 어떤 면에서 이 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1998년 7월 이후의 시점부터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법률적 사면을 통해 부여한 국가적 차원의 제도적ㆍ행정적 용서 및 화해가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용서와 화해로 곧바로 직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해는 중앙정치의 제도적 장에서 상징적으로 구현되는 것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적어도 남아공에서 진정한 화해란 사회구성원 사이의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조건의 평등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가 하는 문제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그 평등 실현의 가시적인 지표는 다름 아닌 ‘토지’ 즉 땅이었다. 지난 시절 남아공 백인정권의 역사는 한 마디로 흑인들을 토지에서 유리시킨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3년에 제정된 ‘원주민 토지법’은 흑인들이 ‘거류지’라고 불리는 지역 외에서 토지 소유는 물론 백인 소유의 토지 소작마저 금지했다. 1936년의 ‘원주민 토지법’과 1950년의 ‘집단 거주법’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법으로 흑인들의 자유로운 토지 보유와 거주를 점점 더 엄격하게 제한했고, 그런 법을 근거로 흑인들에게서 조직적으로 몰수한 토지를 백인들에게 재분배했다. 그랬기 때문에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과 더불어 흑인들의 토지 귀환 욕구가 증폭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고, 그들의 귀환은 필연적으로 백인농부들과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더 나아가 흑인들에 의한 백인농부들의 무차별적인 살해라는 ‘전쟁 상황’으로 발전했다.  

여기서, 소설 『추락』이 발표된 시기(1999년)가 바로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시점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쿳시가 어떠한 현실 가운데서 이 소설을 쓰게 되었으며, 이 소설이 어떠한 역사적 현실을 관통하는 작품인지를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추락』을 관통해 흐르는 두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활동 및 “토지 귀환을 둘러싼 전쟁 상황”이었다. 전자가 이데올로기적 차원의 문제라면, 후자는 남아공의 인종 및 계급 간의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뒷받침 하는 정치경제학적 토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의 현실을 겪고 있던 남아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추락』은 기본적으로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공이 부딪치고 있는 이런 두 가지 역사적 과제에 대한 소설적 은유로 읽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소설 속 문제의 현실성 - “그러니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진실과 화해’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과거사의 청산 그리고 ‘토지의 귀환’을 통한 잔존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불평등 해결, 이 두 가지 차원의 변혁적 과제를 수행하는 중에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던 1999년의 남아공, 이 소설 속의 세계가 처한 현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 혼란의 세계 앞에서 나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세계에서 두 주인공 루리와 루시는 따로 또 같이 제 몫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한다. 예컨대, 루리가 멜라니를 성희롱한 혐의로 대학 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는다는 설정은 정확히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은유라 볼 수 있는데, 루리는 여기서 스스로를 향해서 진실한 내면의 참회를, 멜라니를 향해서는 형식적 차원의(즉 절차적 차원의) 사과를 넘어서는 인격적ㆍ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를 요청받은 것이다. 그러나 루리는 조사 과정에서 ‘혐의 사실’은 인정하지만 잘못을 반성하고 참회하기를 거부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진상조사위원회란 오로지 법적 영역만 담당할 수 있고 참회나 사과 같은 개인 내면의 진정성까지 문제 삼을 권리는 없으므로, 여기서 참회를 표현하는 일은 잘못된 타협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즉 자신이 다만 당시 “에로스의 노예”로서 행동한 것이라 진술하고(p.81) 급기야 심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에게 “나는 이번 경험으로 풍부해졌소”라고 말한다(p.87). 총장이 마지막으로 제안한 사과성명 발표마저 거부하고 대학에서 파면당하는 것을 기꺼이 수용했던 그가 끝까지 고수한 입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뒤에 멜라니의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 중에서 드러난다. “나한테는 서정적인 게 부족합니다.”(p.260) 물론 그는 자신의 성희롱사건과 루시가 당한 강간 사건 사이의 모종의 연관성을 감지했기 때문에 멜라니의 집을 방문하여 사과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변화는 자신의 위치를 ‘가해자’로 인정한 것에 그칠 뿐 정작 사건 자체를 바라보는 입장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부인과 또 다른 딸에게 무릎을 꿇는 행위도 멜라니의 아버지가 자신의 “속임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제 어떻게든 상대방으로부터 적절한 사면을 빨리 받아내기 위한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걸로 충분할까?” “이거면 될까? 안 된다면, 어떤 게 더 있지?”(p.263) 

여기까지 그가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오류는 조사위원회의 요구를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욕망에 대한 부당한 간섭으로 곡해했다는 점이다. 루리 자신이 멜라니에게 욕망을 실현한 행위가 멜라니에게 딱히 강간은 아니었지만, 명백히 그녀가 욕망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 욕망의 실현 과정에서 명백히 교수-학생, 백인-유색인, 남성-여성이라는 권력관계가 개입되고 있었기 때문에, 루리가 그토록 강변하는 그 욕망 자체가 이미 (서정적인 것의 충분 여부와는 관계없이) 순수한 것이 아닌 정치적 맥락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조사위원회의 참회 및 사과 요구는 윤리적인 차원인 동시에 정치적인 차원의 요구였으며, 자신의 욕망 의 기원과 조건 그리고 성질 자체를 근원적으로 성찰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루리에 의해 제기되는 이러한 선택의 요구들을 통해 작가는 ‘진실과 화해’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새롭게 문제 제기하는 것이다. 루리가 당면해 있는 문제는 기실 그에게 이 세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건 모종의 윤리-정치적 의견 표명을 강제하는 요구였다. 그런데 루리는 이 문제 앞에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하는가? 루리는 “죄의 세속적 탄원과 회개의 보다 영적인 영역을 구분”하면서 회개와 용서의 개념을 스스로 문제화한다. 사실의 진술과 회개는 서로 다른 담론의 영역을 점유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허한 고백을 거부하고, 제도적 거세를 선택한다.   

한편, 남성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헬렌이라는 친구와 동성애를 관계를 맺은 “완전한 시골여자”(p.92)로서, “개를 돌보고 꽃과 채소를 팔아서” 꾸려가는 “단순한 삶”을 선택한, 그래서 “인간이 갖고 있는 특권 일부를 동물들과 공유하”고 살아가는 루시.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단순하고 평화로운 대지에서의 삶은 지극히 불안정한 기반 위에서 꾸려지고 있는 것이었다.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던 지배체제가 타파된 이후 남아공에서는 과도기적 폭력이 만연해 있었으며 미혼의 젊은 백인여성 농장지주인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조건 덕분에 언제든지 폭력의 희생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의 안전은 총과 개들을 통해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불안한 상태의 안전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은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이었다. 그녀가 추구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은 지난 역사에 대한 어느 정도의 반성적인 비판에 바탕을 둔 것이긴 했지만, 아직은 다분히 낭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바램과 달리 그녀가 꿈꾸는 삶, 모든 생명의 조화에 바탕을 둔 상생과 공존의 삶을 일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의 요소가 남아공에는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결국 ‘토지’의 흑인으로의 귀환 문제와 연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남아공에서 토지 불평등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잔혹성과 야만성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모순구조였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극심한 계급불평등으로 직결되도록 매개하는 실질적인 착취의 토대가 바로 이 토지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포스트-아파르트헤이트 시대는 흑인들의 토지로의 귀환 욕구가 증폭되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지난 시절 토지를 부당하게 박탈당했던 흑인들의 관점에서는 백인들의 토지를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되찾아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백인들의 입장에서 그런 행위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소유한 토지를 약탈하는 야만적 행위였다. 소설 속에서 루시가 이러한 흑인들의 정당한 권리행사 혹은 야만적 행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이미 소설 밖의 현실에서 그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루시가 강도와 강간을 통해 맞닥뜨린 새로운 폭력의 세계는,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흑인 여성들을 성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별 문제 없이 일상화되어 있던 루리에게 어느날 갑자기 성희롱의 추문으로 들이닥친 그 세계와 결국 같은 세계일 뿐이다. 

루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 즉 피상적 차원의 죄과 시인이냐 아니면 윤리-정치적 차원의 사죄냐, 라는 물음을 통해 이 소설이 당시 남아공의 백인들이 ‘진실과 화해’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처해 있던 문제의 현실성을 구성해냈다는 지적은 이미 앞에서 했다. 한데, 루시의 경우는 루리와 달리 자신이 사건의 피해자가 되어 선택을 요구받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조건을 떠남 즉 패배냐 아니면 치욕을 감수한 생존의 도모냐, 로 해석하고 그 가운데서 후자를 선택하려 한다. 루리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구조적으로 잘못 파악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강간 및 강도 사건을 통해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요구를 생존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루리의 제안대로 생모와 친척들이 도와줄 네덜란드로 돌아가거나 루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어디 다른 먼 곳에 재정착하는 것까지, 그 다른 삶의 가능성이 그녀에게 완전히 닫혀 있는 것이 분명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지금 이 농장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 패배라고 주장하며 그것을 거부한다. 

대신에 여기에 계속 있음으로써, 자신의 땅을 계속 일구고, 지속될 강간 및 강도의 위협을 모면하고자 페트루스의 사실상 첩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 결국은 땅의 소유권을 페트루스에게 넘겨주고 “그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이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p.308)는 권리 하나만을 챙기는 것이 생존이라고 주장하며 그쪽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녀의 그러한 생존 전략이 그녀가 먼저 거부한 패배로서의 생존과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우리는 사실 잘 알 수가 없다. 루시의 논리는 땅의 주인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땅을 제 손으로 일굴 수 만 있다면 그것으로 성공적인 생존을 선택했다는 의미일 터,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존엄성마저 부인한 굴욕적인 밑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다시 시작하여, 그녀의 말대로라면 “개처럼 되어”(p.307)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우리는 끝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3. 소설 속 해결의 현실성 -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을 향해”

자신의 최소한의 주체적 인격마저 온전히 내버린 상태에서, 그리고 강간 사건의 해결마저 포기하고, 강간범 일당 중 하나인 풀럭스가 수시로 자신을 훔쳐 보는 사태도 참아내고, 강간의 결과로 생긴 임신을 견디고, 끝내는 그 아기를 낳아 기르기로 하고, 자신의 성정체성까지 위반하며 (잠을 함께 자고 싶어 하지도 않는) 페트루스의 세 번째 부인이 되겠다는 루시의 일련의 선택들 앞에서 우리는 실상 이 소설이 남아공의 ‘토지 귀환’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납득할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리라는 우리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고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이 소설이 갖는 상당히 독특한 미덕인지 모른다. 루시의 비논리적이다 못해 독자들에게 불편함마저 느끼게 하는 저 선택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의 순환구조를 백인들이 먼저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자 한다면 백인들이 지금 마치 “개처럼”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철저히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썩 좋은 해결책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독자가 소설을 다 읽은 후 현실에서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그런 해결책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가장 ‘소설적인’ 혹은 ‘소설다운’ 해결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만이 제기할 수 있는 지극히 소설적인 해결책은 소설 밖의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가능한 것으로서의 그런 해결책이 아닐지 모른다. 

무릇 진정으로 소설적인 해결책은 한 사회가 완강하게 구조화하고 있는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통념적 좌표를 흔들면서 ‘문제의 현실성’을 보다 심화ㆍ확장시키는 특정한 선택지의 제출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루시의 선택이 좋은 해결책인지 아닌지는 독자들마다 갖고 있는 각각의 윤리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나뉘겠지만, 객관적으로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루시의 아버지인 루리에게마저도 그러했듯이, 동시대의 통념적 해결책을 거스르는 매우 이례적인 ‘선택’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독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공의 진실과 화해 및 토지의 귀환 문제에 대해 그 고민과 성찰을 중단할 수 없도록 강하게 자극한다는 점이다. 

작가 쿳시의 말을 빌리면, 그의 소설이 지향하는 것은 “벌어진 틈, 거꾸로 된 것, 아래쪽에 있는 것, 베일에 가려진 것, 어두운 것, 묻힌 것, 여성적인 것 등 타자를 읽는 데 있다.” 그의 소설들이 그러한 입장에서의 세상읽기이자 현실에 대한 사유의 한 방식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 테두리 내에서 그의 문학세계를 좀 더 공감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는 소설가이고, 그가 우리와 만나는 방식은 소설을 통해서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소설 안에서 소설의 세계를 만나고, 소설의 문제를 고민하며, 소설의 해결과 논쟁한다. 역설적이지만, 그러한 소설의 길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우리는 소설을 너머, 소설이 반향하는 “진짜 현실의 공포”와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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