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짧게 깎았다. 이제 공부나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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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독료. 시험기간엔 꼭 다른 책을 읽게된다. 그것도 생각도 못했던 책. 읽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책을 어디서 주섬주섬 챙겨와 읽기 시작한다. 지난해 기말고사 기간에 읽었던 책은, 가만 있어보자, 염상섭의 <만세전>이었구나. 동경유학생 이인화의 귀향기. 도덕적 인물도 되지 못하고, 얼핏 보면, 철없는 대학생인 그인데, 그가 밉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솔직했으니까. 정직만으로 그외의 약점이 벌충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인화는 내게 보여주었다. 그전부터 그래왔던 거지만, 이 소설을 읽고 192, 30년대의 조선인의 생활이 더욱 궁금해졌다. 물론 소설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만세 전, 1919년이다. 그 시절 태어난 사람들은 죽거나 노인이 되었다. 간혹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이 사람들의 생애에 얼마나 큰 곡절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된다. 시대의 변화만으로도 곡절의 깊이는 내가 건널 수 없을 만큼 깊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두 세대 안의 일이다. 크게는 한 세대가 역사의 스펙트럼 위에 놓여있다. 이 사실이 너무 신기하고, 믿겨지질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동시에 미시적인 역사와 거시적인 역사가 결합하는 그 지점, 그 풍부한 육체를 꼭 한번 가늠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성석제의 소설집에서 특히나 좋았던 소설 세편은, <칠십년대식 철갑>, <통속>,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다. 세편 모두 통속이기는 매일반인데, 앞의 두 편은 이성관계의 일을 다루고 있다. <칠십년대식 철갑>은 젊음 특유의 자존심과 사랑, 어색함, 불완전한 의사소통에 따른 파국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 원두의 날것인 채로의 욕망과 날것이어서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거침이 그의 향아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애처로웠다. 향아의 얼굴 위에 씌워져 있던 철갑은 시간과 함께 벗겨진다. 그만큼 시간은 무섭고, 인생은 유전한다. 그가 끝끝내 벗겨내고자 했던, 향아의 새로운 철갑, 거들. 요즘 그런거 모르는 소년 있을까. 가히 칠십년대 식이다. 알량한 자존심에 말도 못하고 속만 썩여온 원두. 향아의 결혼식 전날밤이 돼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다니. 요즘 이런 일 없지야 않겠지만, 가히 70년대 식이다, 하고 말하고만 싶다. 덩달아, 나도 참 70년대식이야, 덧붙이고 싶다. 유쾌한 소설이었고, 유쾌했기 때문에 슬프기도 했지만, 어쨌든 인생은 유쾌한거다, 하는 이런 시답지 않은 충고를 일러주었다.

내게도 요즘 유쾌한 일이 생겼다. 직감이랄까, 예감이라고 해야할까. 분명한 오인 또는 착각일텐데, 그 착각이 즐겁다. 사실 세상에 착각 아닌 일이 있을까마는, 원두처럼 그 착각을 확인하고 싶고, 파기하고도 싶어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생채기를 내는 것 같아 자신 유치해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 나는 즐겁다. 그것만은 사실이다.

<비밀스럽고 화려한  쌍곡선의 세계> 속 주인공 시인 제이의 내 가슴을 울리는 한마디.

"제이는 고개를 흔들며 요즘 세상에는 만만한 놈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글에는 아마추어일 게 분명한 목사나 집사가 쓴 평범한 글이 자신이 이때까지 써온 어떤 글보다 더 간단히 감동을 자아내고 눈물을 짜내게 하니. 제이는 앞으로 가일층 노력해서 하루빨리 자신이 읽은 글을 쓴 목사나 집사와 맞먹는 수준에 도달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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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가 창 밖의 나무를 봤다. 날씨가 찼지만, 햇볕은 넉넉히 따뜻했고, 바람도 이따금 불었다. 가지 몇이 건들건들 흔들렸다. 흔들리는 가지처럼 정신이 잠시 흐릿해졌다. 아주 먼 기억을 보는 듯 하다. 이 기억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탔던 자전거와 얽혀있다. 자전거를 멈춰 세울 때 마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었던 작은 소리들이 웅성거렸다. 억새나 갈대의 몸뒤트는 소리, 검불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멀리서 개짖는 소리. 그 때, 기울어 가는 농가의 지붕 과 지붕 위의 호박을 담넘어 훔쳐보았다. 그때는 길가에 서있는 나무를 한참동안 맹하게 쳐다보기도 했고, 그 나무의 이름을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쨌든 지나간 시간들이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상기시킨 과거는 사실 그닥 떠올리고 싶은 것들이 아니다. 나는 현재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과거를 이미 소모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가,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거다. 지금의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에서 달아나기 위해,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자주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던가. 과거가 비록 즐겁지 못했던 일이었을 망정, 그것이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과거를 편안해 했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작취미성인 채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게으름을 부릴수록, 자판을 느리게 두드릴수록 어제의 말과 말로 부터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내가 남에게 주었을 상처, 간혹 비쳐왔던 나르시시즘적 자기과장의 제스춰가 생각나  게으름이 싫다. 아니, 그 싫음을 꼭 말하고야마는 내가 싫다. 싫다가 싫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나는 이제 나를 조금 덜 사랑할 때도 되었다. 덜 사랑하게 되면, 바람에 간혹 흔들리기도 할테고, 저렇게 오래 살게 될거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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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최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는 일. 또 누군가의 전화를, 메일을 기다리면서, 또 나도 모르게 기다리던 누군가 메신저에 짠! 하고 나타나선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기다리면서 앉아있는 일. 나를 흥분시키는 무엇. 다음날 특별한 약속이 있거나, 또는 꼭 해야할 일이 있다면 기대의 틀에 맞춰 마음은 모양을 갖춰 내 마음 편안해질까. 하나만 생각하자. 너는 지금 어떻든 한 발 앞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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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그대로 과학철학 보고서에 최악의 점수가 매겨졌다. 그것이 개인 보고서가 아닌 조 보고서였기에 더욱 찜찜했다. 혹여 내가 맡았던 부분 때문에 점수가 이모양으로 나온건 아닌지, 마감시간을 30 분 넘긴 나의 게으름이 다른 조원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을지. 물론 남이 입었을 피해를 먼저 생각한건 아니다. 보고서 점수가 내 학점에 미칠 영향력을 가장 먼저 곰곰이 따져 보았으니 말이다. 최고점과 3점 차이. 그 정도 가지고 뭐 그렇게 마음 쓸 필요있냐 하겠지만, 첫째, 지금까지 제출된 보고서 중 그 누구도 맞지 않았던 최악의 점수라는 사실, 둘째, 요약 대상인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데 따르는 좌절감이 나를 아프게 했다. 이번 학기 제대로 수강한 과목 하나 없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난 과학철학만큼은 좋은 성적을 바랐는데, 교재 한번 읽지 않았다는 극명한 사실이 나의 불성실을 고자질했으므로 나는 괴로웠던 것이다. 천학비재함을 겸양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는 진실로 천학비재한데다, 공부도 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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