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가 창 밖의 나무를 봤다. 날씨가 찼지만, 햇볕은 넉넉히 따뜻했고, 바람도 이따금 불었다. 가지 몇이 건들건들 흔들렸다. 흔들리는 가지처럼 정신이 잠시 흐릿해졌다. 아주 먼 기억을 보는 듯 하다. 이 기억들은 대부분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탔던 자전거와 얽혀있다. 자전거를 멈춰 세울 때 마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었던 작은 소리들이 웅성거렸다. 억새나 갈대의 몸뒤트는 소리, 검불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멀리서 개짖는 소리. 그 때, 기울어 가는 농가의 지붕 과 지붕 위의 호박을 담넘어 훔쳐보았다. 그때는 길가에 서있는 나무를 한참동안 맹하게 쳐다보기도 했고, 그 나무의 이름을 알기 위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어쨌든 지나간 시간들이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상기시킨 과거는 사실 그닥 떠올리고 싶은 것들이 아니다. 나는 현재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과거를 이미 소모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가, 다가올 미래가 두려운 거다. 지금의 시간과 앞으로의 시간에서 달아나기 위해, 나는 그동안 얼마나 자주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했던가. 과거가 비록 즐겁지 못했던 일이었을 망정, 그것이 지나간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과거를 편안해 했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싶다. 작취미성인 채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게으름을 부릴수록, 자판을 느리게 두드릴수록 어제의 말과 말로 부터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내가 남에게 주었을 상처, 간혹 비쳐왔던 나르시시즘적 자기과장의 제스춰가 생각나 게으름이 싫다. 아니, 그 싫음을 꼭 말하고야마는 내가 싫다. 싫다가 싫다.
오늘 나무를 보았다. 나는 이제 나를 조금 덜 사랑할 때도 되었다. 덜 사랑하게 되면, 바람에 간혹 흔들리기도 할테고, 저렇게 오래 살게 될거다.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