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시험이 끝났는데 개운치 않다. 자발적 포기가 현애철수의 비장함을 띠지 못한다면야, 자기방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요 며칠 나를 방기해왔다. 이 허망함을 뭐라할까. 싸야할 짐들은 널려있고, 남은 레포트도 있는 판에 마음은 진즉 뽕밭에 가있으니. 방중계획도 마땅히 잡을 수 없고, 어젯밤엔 허랑한 말들만 잔뜩한 것 같아 맘이 편치않다.

시험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김현전집 중 <자료집>을 뒤적이다 김현의 글읽기 글쓰기 습관에 대한 김치수의 글을 읽었다. 한 시간에 2, 300페이지를 읽는 속독가였다고. 그것도 <세계문학전집>을. 속필이기도 해, 원고독촉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으며, 대부분 청탁이 들어오는 즉시 글을 썼다나. 그는 또 막힘없이 줄줄 문장과 문장을 이어나갔다고도 한다. 한 시간이면 한 권 뚝딱 읽고, 그것도 작품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았다니. 참 사람 맥빠지게 하는 얘기들이었다. 그에게 백지의 도전이란 영 딴나라 이야기였던 것인지. 난 그의 일기를 읽으며, 또는 산문을 읽으며 적어도 그는 글을 힘들여 쓰는 문필가 중 하나일거라 생각했다. 그는 스타일리스트였으니까 말이다. 내 예상은 보기좋게 배신당했다. 김훈이 사건기사를 무척 빨리 써댔다는 어느 기자의 말도 사실이었나 보다. 좋은 글 쓰기 위해 혹은 자세히 읽기 위해, 느리게 읽고 느리게 쓴다는 내 변명은 무참해졌다. 막 써야겠다. 나탈리 말이 일리가 있긴 있었군.

글들을 읽어가면서, 그 사람 냄새에 빠져 들다보면, 글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역시나 분식이나 수사가 아닌 그 분식과 수사로 나타나는 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현의 글을 읽고 김현을 읽을 수 있다. 학적 내용뿐만아닌 성격이나 체질이 보인다. 문체는 그 문체를 쓴 사람이라는 고졸한 충고가 허망된 말만은 아닌 듯 하다. 그만한 문체를 얻기위해 노력한 자라면, 인격 또한 저절로 수양되었으리라.

다 시답잖은 소리다. 오늘 짐 싸야하고, 내일 기숙사 떠난다. 적어도 오늘은 그게 중요하다. 기숙사 복도의 등 몇개가 낭하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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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의 의미와 회귀의 의미

K군, 군과 나와의 이러한 기호적 지평내에서의 만남이 바람직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문자로서의 이러한 기호란 너의 것도 아니지만 더구나 나의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이 신념 때문에 이 자리를 빌어 두 가지 이야기를 해 두기로 하였다.

첫째 번 이야기는 출발에 관한 것이다. 출발이란 무릎이다. 무릎의 메타포가 출발인 것이다. K군, 군은 상처 없는 무릎을 보았는가. 우리가 미지를 향할 때, 우리가 보다 멀리 손을 뻗치려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일어서려 할 때, 피를 흘려야 하는 곳은 바로 이 무릎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뜀박질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산과 대지와 강의 흐름과 칸트의 星空(Kants Sternenhimmel)은 사정없이 우리를 막아선다. 그것은 가정이고 네 이웃이고 친구이며 사회이다. 너를 에워싸는 이 감옥에서 너는 탈출해나와야 한다. 이미 날 때부터 너는 그 탈출의 욕망의 씨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의 구름 때문에 네가 넋을 잃고 시무룩해 있을 때 아마도 어머니는 너의 건강을 근심할 것이고 심지어 강아지도 네 표정을 살필 것이다. 이 수없는 거미줄 같은 인연의 끈에서 군은 질식해 본 적이 없는가. 이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번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너의 무릎을 사용해야 한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번의 탈출은 보다 아픈 것이다. 그것은 미지를 향한 너의 야성적 본능이다. 내가 목마른 너에게 물을 떠 준다면 너는 그 물을 마셔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네 갈증의 욕망을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너의 몸을 눕힐 자리를 내가 만들어 준다면 너는 거기서 잘 수가 없으리라. 너는 저 새벽의 광야, 청정한 호수, 태풍 속의 존재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헛된 소유가 아니라 욕망 자체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소유도 너를 죽이는 것이다. 안일한 나날보다는 비통한 나날을, 죽음 이외의 휴식은 없는 것이다. 참으로 두려운 것은 못다 한 욕망이 죽음 후에도 남지나 않을까에 있을 뿐이다.

K군, 이 욕망이 바로 사랑의 의미이다. 그것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다. 설사 내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고 중성자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너는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 그것은 오직 너만이 가진 순수 욕망 때문인 것이다. 행위의 선악을 판단하기도 전에 행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열정(passion)이며 아픔인 것이다. 그 아픔이 본능적 욕망의 순수라면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K군, 보이지 않는 무릎의 상처가 아물기 전에 너는 모든 책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너의 골방에서, 거리에서, 도시에서 탈출해 가라.

K군, 여기까지가 너에 있어서의 문학이다. 그것은 영혼의 충격이고 모랄이다. 실상 여기까지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탕아의 귀가>와, R.M.릴케의 <말테의 수기>와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와 A.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었을 때 가능한 너의 언어다.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운 언어를 어째서 우리는 서서히 배신하게 되고 말았는가. 어째서 너는 주름살이 늘때마다 비굴한 몰골과 발맞추어 평범한 사나이가 되고 말았는가. 어쩌자고 행위의 판단 이전에 행위하던 네가 살얼음판을 걷듯 그렇게 움츠리고 말았는가. 폭풍우 속에 놓였던 그 네가 어째서 선량한 아저씨가 되고 복덕방에서 장기나 두면서 백발과 함께 주저앉게 되었는가. 그 감수성과 본능과 감각의 비수는 어디로 갔는가?

이 모든 물음에의 해답을 찾는 것은 이미 너에게는 문학이 아니다. K군, 이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 문학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이라고 적어도 군은 말해야 한다. <아홉 개의 교향곡>과 <최후의 만찬>과 중성자의 발견에 대해서도 네가 영원히 비웃을 권리를 가졌을 때까지가 문학이라면 그 이상 최고는 없다.(non plus ultra) 대체 그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너의 젊음인 것이다. 그 아픔인 것이다. 현실의 대치물로서 예술이 놓인다면, 그러한 것이 예술이고 문학이라면, 너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평범한 속물로 주름살을 늘이며 사라져야 한다. 베에토벤과 미켈란젤로와 오펜하이머를 수용하고 절을 할 때 너의 의미는 없다.

K군, 여기서부터 우리의 회귀의 의미가 시작된다. 살아 있는 정신(der lebendiger Geist)이 사라질 때 닥치는 추악함을 견디기 위해 우리가 돌아갈 길에는 파우스트적인 악마의 시련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옥이 놓여 있다. 그것은 본능적 욕망의 대가로 지급되는 보편적 아픔이다. 이러한 자기회로를 비교적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이 이른바 문화라는 장치이다. 물을 것도 없이 문학도 그러한 장치 중의 하나이다.

K군, 이러한 어리석음과 확실함의 승인 위에서 한국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나는 썼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한 입문서가 아니다. 그 이하이면서 그 이상이다. 물론 군은 아직도 실수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실수가 어떤 비참의 경지에 이를지라도 군은 우리에게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선상에 머물 것으로 믿는다. 그것은 군이 순수했다는 과거적인 사실 자체에서 마침내 달성되리라.

 

어리고 성긴 가지 너를 믿지 아녔더니

눈 기약 능히 지켜 두세 송이 피여세라 

燭 잡고 가까이 사랑할 제 暗香조차 浮動터라(<歌曲原流>에서)

-김윤식, <한국 근대문학의 이해> 서문

지난 학기 헌책방에서 우연히 읽었던 서문. 정신이 섬뜩했다. 욕망도 이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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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보다 밝고 넓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해진다. 아, 나의 짐작은 틀렸구나. 착각은 또 얼마나 반가운가. 설령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착각이라고 우기고 싶어만 진다. 가령 이런 말들.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일종의 호감과 연대의 심정은 수틀리기 일쑤다. 나는 그를 모른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은가. 그에 관해 알고 싶은가. 안다면, 그를 안다면...

특유의 소심함 때문이겠지만, 거리에서 깔깔 웃는 여자아이 몇몇 지나갈때면,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아름답다. 풍경같다. 풍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막막함을 꾹 참아내고 한걸음 더 내딛으면, 나 또한 그 풍경이 될 수 있을까.

영화 <프리다>에 대한 이주헌의 글을 읽었다. 깔끔하고 좋았다. <내 마음 속의 그림>의 글들은 영 밍밍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 글은 그렇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 고통 속에 살았다지. 유작의 제목은 '인생 만세!' 였다고. 예전의 나라면 감격했겠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 그녀가 살다 갔구나, 그 정도의 느낌만 받았다. '치열', '처절', '절망'. 이런 단어들에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못한다. 내가 '치열'하지 못해서 일까. 외려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 일상을 영위하는 것, 그 이상의 '치열'이 없다고 여겨진다. 일상 너머의 '열정'이 마뜩지 않다. 어떻게 된 것일까. 친구는 내가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 아니, 내가 바랐던건 제대로된 일상일 뿐이었다. 풍경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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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내서점에 들렀다, 김원일의 소설집을 봤다. 표지디자인과 제목이 좋았다. 책을 읽지 않았으니, 내용은 모른다. 정작 소설을 읽고 난 후, 어떤 감상을 갖게 될지 모르겠다. 한 양로원에서 소설은 시작된다고 한다. 양로원. 노인은 거짓없는 웃음과 발가벗겨진 욕망, 이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노인을 그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이 두 모습이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이다. 그 두 개의 양태는 사람이 짊어진 솔직한 모순으로 여겨진다. 그 모순은 과연 슬픈 것일까. 이 소설은 제목으로 보았을 때, 그런 질문을 던져주지 않을까 싶다.

젊음보다는 노년이 내게 적당한 이야기이지 싶다. 조로의 치기로 하는 말은 아니다. 취향이 그렇다는 것일 뿐. 물론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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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시험이 남았다. 제출 할 레포트 몇 개 남았다. 공부한거 하나 없고, 시작한 레포트 하나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바쁘지가 않다. 머리는 바쁘다, 바쁘다 하는데, 정작 손과 마음은 바쁘지 않으니, 게으름을 탓해야 할지, 나는 천성적으로 느리게 사는 사람이요, 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사실 오늘 크게 절망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절망도 지겨우니, 이건 절망도 아닌 것 같다. 기적도 일상이 되면, 기적이란 이름이 낯간지러워지기 마련.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억압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는대로 엉겨붙고 싶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요즘 왜이리 힘이 없느냐, 너를 믿는다. 믿다니, 이거 무슨 소린지.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네 할 일 잘 하리라 믿는다, 이번 시험도 잘 치뤄내겠지. 이런 얘긴가. 아니면, 네가 요즘 정신 못차리는거 같으나, 아버지는 진정 너를 믿어서, 네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얘긴가.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아버지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지난밤을 잊지 못한다. 수병아, 넌 아무래도 조직생활 적응 못할거 같으다, 시나 소설을 정식으로 써보지 그래. 아버지도 말해놓고 뜨끔했으리라. 이 새끼 정말 그러면 어쩌지 하고. 하지만, 내가 한다고 하면 말릴 사람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의지가 약했고, 그 의지박약을 훤히 꿰고 계신 아버지가 내 자존심 살살 살려주면서, 내 앞길을 조금씩 터주셨던 거다. 난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어, 속으로 탓만 했지, 나는. 너, 언제 철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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