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시험이 남았다. 제출 할 레포트 몇 개 남았다. 공부한거 하나 없고, 시작한 레포트 하나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바쁘지가 않다. 머리는 바쁘다, 바쁘다 하는데, 정작 손과 마음은 바쁘지 않으니, 게으름을 탓해야 할지, 나는 천성적으로 느리게 사는 사람이요, 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사실 오늘 크게 절망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절망도 지겨우니, 이건 절망도 아닌 것 같다. 기적도 일상이 되면, 기적이란 이름이 낯간지러워지기 마련. 오히려 자유로워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억압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되는대로 엉겨붙고 싶다.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요즘 왜이리 힘이 없느냐, 너를 믿는다. 믿다니, 이거 무슨 소린지.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네 할 일 잘 하리라 믿는다, 이번 시험도 잘 치뤄내겠지. 이런 얘긴가. 아니면, 네가 요즘 정신 못차리는거 같으나, 아버지는 진정 너를 믿어서, 네가 그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런 얘긴가.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아버지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지난밤을 잊지 못한다. 수병아, 넌 아무래도 조직생활 적응 못할거 같으다, 시나 소설을 정식으로 써보지 그래. 아버지도 말해놓고 뜨끔했으리라. 이 새끼 정말 그러면 어쩌지 하고. 하지만, 내가 한다고 하면 말릴 사람아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의지가 약했고, 그 의지박약을 훤히 꿰고 계신 아버지가 내 자존심 살살 살려주면서, 내 앞길을 조금씩 터주셨던 거다. 난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됐어, 속으로 탓만 했지, 나는. 너, 언제 철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