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걸음 내딛으면 세상은 보다 밝고 넓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흐릿해진다. 아, 나의 짐작은 틀렸구나. 착각은 또 얼마나 반가운가. 설령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착각이라고 우기고 싶어만 진다. 가령 이런 말들.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일종의 호감과 연대의 심정은 수틀리기 일쑤다. 나는 그를 모른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 나는 벗어나고 싶은가. 그에 관해 알고 싶은가. 안다면, 그를 안다면...
특유의 소심함 때문이겠지만, 거리에서 깔깔 웃는 여자아이 몇몇 지나갈때면,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아름답다. 풍경같다. 풍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지금의 막막함을 꾹 참아내고 한걸음 더 내딛으면, 나 또한 그 풍경이 될 수 있을까.
영화 <프리다>에 대한 이주헌의 글을 읽었다. 깔끔하고 좋았다. <내 마음 속의 그림>의 글들은 영 밍밍하다는 느낌을 주었는데, 이번 글은 그렇지 않았다. 프리다 칼로. 고통 속에 살았다지. 유작의 제목은 '인생 만세!' 였다고. 예전의 나라면 감격했겠지만, 전혀 공감하지 못했다. 아, 그녀가 살다 갔구나, 그 정도의 느낌만 받았다. '치열', '처절', '절망'. 이런 단어들에 더 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못한다. 내가 '치열'하지 못해서 일까. 외려 아무렇지 않게 사는 것, 일상을 영위하는 것, 그 이상의 '치열'이 없다고 여겨진다. 일상 너머의 '열정'이 마뜩지 않다. 어떻게 된 것일까. 친구는 내가 언제나 현실에 안주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 아니, 내가 바랐던건 제대로된 일상일 뿐이었다. 풍경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