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돌이켜 보자. 대학에 들어와 맞은 두번째 해. 이런 글 쓰고 싶지 않았다. 무연히 지나가고 싶었다. 어쩌다 이메일 확인만 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지나간 편지들을 보는 일은 당시의 시간이 현재의 시간을 보다 풍성케하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대개 얼마남지 않은 자존감을 팍 구겨놓는 일인듯 싶다. 이게 나란 말인가.

간혹 답장에 내가 보낸 편지의 내용이 고대로 첨부되어 있는 경우라도 만나면 낯뜨거운 정도가 심해진다. 그정도로 그치는게 아니라 이건 낙망이다. 어쩌면 이런 엉터리 문장에 치졸한 내용을 담았단 말인가. 상대편의 답장은 거개가 우문현답인데, 이런 편지친구들이 있음에 감사해야할지 열패감에 젖어야 할지 분간할 수 없다. 내가 저지른 올해의 소행들이 내년 연말 즈음엔 다시 부끄러운 신색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까. 질문이 꽤 침울하다. 작년의 답장은 올해 내가 겨우 일구어 논 인격적 수준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내년이 되어서야 친구의 뒷꿈치를 쫓아갈 수 있으려나. 거북이를 좇는 아킬레스의 신세를 벗어날 수는 없는걸까. 이것이 올해 나의 질투의 내용이다. 내년에 다른 일로 샘바른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아킬레스의 신세를 상기하는 일도 지겨우니만큼.

새해가 코 앞이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게으름 그리고 애꿎은 질투뿐이다. 지나가는 너를 붙잡고 얄궂게 너를 탓해보는 일은 내가 그만큼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내가 너보다 많은 부분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때로 너에 대한 질투의 심정을 나는 사랑으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내 부끄러움의 대부분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친구여, 나를 조금은 가엾이 여겨다오. 천하게도 나는 세밑에 네게 동정을, 용서를 구한다.

새해가 세 시간여 남았다. 신생의 시간이 닥쳐온다. 올해, 나는 강짜를 부리기 보다는 나 자신을 스스로의 기율로 삼았으면 한다. 내 자족의 기준이 내가 아닌 타인이 아니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젊음이 아름답고 진실해 보이는 것은 삶이 다양한 것이라는 것을 그 가능성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25)

소설은 그러나 넋두리나 논리가 아니고 구체성을 가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감정적 자제와 논리의 육화를 요구한다.(31)

치유의 방법을 꿈꿀 수는 있지만 그것을 살기는 힘들다. 삶은 개인적 희원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정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32)

그것들에서 삶은 이해하기 힘든 아픔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들의 주인공들은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삶은 열려 있는 아픔이지 닫혀있는 아픔은 아니다.(33)

자기는 일상적인 삶을 살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남의 삶만 이야기하는 소설가란 속물이다라고 말하는 소설가를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도, 자기의 소설을 읽는 독자도 똑같은 속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36)

삶에 어떤 식으로든지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언어적 시도는 문학 작품이 될 수 있다.(67)

다시 말하면 억압적인 언어가 행복한 언어로 완전히 대체될 때까지이다. 그 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우리는 올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 믿음만이 행복한 언어를 낳게 할 수 있다. 그 믿음이 믿음으로서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시작의 밑에 숨는 원리로 나타나야 한다. 다시 말해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믿음이 근거하고 있는 억압적인 폭력의 거부와 깨어난 세계의 행복스러움을 새롭게 억압하는 정치 구호로 이용될 가능성을 갖는다.(90)

진정한 대화는 자료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논리적 어려움에 대한 토론을 의미하는 것이데, 분석정신이 헤이해지면 그러한 대화는 거의 불가능해지며, 자신의 주의 주장에 대한 과격한 옹호, 자신의 추상적 이론에 대한 비판에 접했을 때의 경련적 흥분만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02)

공동체 의식이란, 대화에서 싹터 나오는 공감대의 확산이 발휘하는, 같이 있다, 같이 느낀다, 같이 판단한다라는 의식이다...동인지나 계간지의 중요성은 그것들이 그런 공동체 의식을 만들기 쉬운 자리라는데 있다...그 의식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동인지나 계간지는 말의 엄정한 의미에서 동인지나 계간지라 할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발표 기관일 따름이다.(103) 

세계에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는 절망적이지만, 이 세계는 아직 그러한 질문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희망적이다.(115)

문제작 편향은, 선동적이고 충격적인 것이 좋은 것이라는 편견을 낳게 한다...때로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에 있어서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문제를 감추기 위한 허위 문제라는 것도 문학은 보여준다.(122)

예술은 넓은 의미에서 그 말의 제도성을 부숴 버리려는 달성하기 힘든 욕망을 동인으로 간직하고 있는 제도다. 그것은 제도를 파괴하려는 제도다...제도가 제도를 파괴하는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은 역사의 간계이겠지만 사회는 문학이나 예술같은 제도를 만듦으로 사회의 부정적 폭발을 어느 정도는 해소한다.(129)

예술 속에서의 편안함이란, 현실 부정 속에서의 편안함이다.(140)

그러나 정말 힘있는 충격 효과는 사소한 것들의 집합에서 나온다. 과장되지 않은 사실들의 나열은 때로, 나아가서 대개 과장된 것들의 나열보다 훨씬 깊은 충격을 준다.(165)

부정적 힘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면 대개 힘을 잃게 마련인데, 문화적 공간이란 그 부정적 힘을 없애는 공간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다. 문화는 더럽고 짐승스러운 것들을 더럽고 짐승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173)

삶의 자리를 떠나는 문화란 관념이지 문화가 아니다...그것이 이론에 맞는가 안 맞는가를 따지기 보다는 그것이 좋은 작품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한다.(174)

술 자리는 즐거워야 한다. 그곳은 울분을 터뜨리는 자리나 슬픔을 과장하는 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술 자리에서 지나치게 슬픈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은 괴롭다...술이 인생의 무상함을 덮어 주는 마취제가 되어서는 안된다.(199)

아름다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 훈련 중에서 내가 보기에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문장을 많이 외는 것이다...좋은 문장을 외는 것은 나쁜 문장을 나쁘다고 인식하는 태도의 밑바탕을 이룰 수가 있다. 나 자신도 그런 잘못을 흔히 범하지만, 나쁜 문장은 겉치레가 많고 과장이 심한 문장이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는 겉치레를 않고 과장없이 사고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232)

죽음이 그 충일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부터, 육체는 그 충일감을 더욱 강조한다...견딜 수 없다! 들판에 나가 나는 행복하다고 외쳐야 할까 보다.(236)

* 괄호 안은 페이지

-김현, <두꺼운 삶과 얇은 삶>, 나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김수영, <봄밤>

미치도록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낙망과 책망의 원인과 대상을 알 수가 없다. 아니, 사실 나는 잘 알고 있다.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머지 그 원인과 대상의 실상이라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모른 체 하고 싶다. 다만 뜻 모른채 욕지거리를 늘어놓고 누군가와 악다구니 한판 하고 싶다. 이 적의가 열띠어 갈수록 나는 나의 보고싶지 않은 환부를 아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볼 수밖에 없다. 그 환부, 그 틈새는 기실 내가 자초한 것이었다. 나는 그 틈새를 꿰기 위해 노력하지만, 틈새는 그 역산으로 더욱 크게 아가리를 벌린다.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사강은 지난 1995년 코카인 복용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예술이나 예술가, 학문이나 학자들을 치외법권 지대에 두려는 성스러운 노력은 일반적 수준에서 자유에 대한 법의 제재를 줄여 가려는 세속적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유는 볼테르나 사르트르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위의 몇줄은 생각보다 다층적인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1. 현재의 법적 제재와 여러 금제들은 사회적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학자나 예술가연하는 자들에게 자유의 성역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 또한 법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은 일반인과 견주어 치외법권에 보다 가깝게 놓여있다.

2. 금제의 확대와 일부 계층의 자유에 대한 성역화는 '일반적 수준에서 자유에 대한 법의 제재를 줄여 가려는 세속적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유는 확대되어야 하고 세속화 되어야 한다.

3. '자유는 볼테르나 사르트르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같이 자유를 누려야 한다. 예술가 또는 학자는 사회의 일원이며 그들은 자유를 영위할 수 있다. 일반 대중 각 개인 또한 사회의 일원이므로 그들은 자유를 영위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남을 부러워하는" 모든 사람을 경멸한다. 아니다. 사실은 나는 그들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나 '남을 부러워한다'는 말을 별다른 자의식 없이 내뱉는 인간들을, 나는 여전히 경멸한다.

남을 부러워하는 인간은, 자신의 인생을 복권쯤으로 생각하고 남의 인생 또한 복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남의 당첨된 복권을 부러워하듯, 남의 인생을 부러워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들이 지불한 그 댓가 앞에서 '부럽다'는 말 따위나 흘려놓고 있을 틈이 없다. 그들은 그 댓가는 생각하지도 않고 남을 부러워한다. 나는 그들이 정당한 댓가를 지불하던지, 복권같은 한가로운 인생에 만족하던지,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렇다. 선택지는 둘 뿐이다.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든지, 변화를 원한다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러야한다. 너무 단순한 진실이어서 가끔 그 사실을 잊곤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예년처럼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이브 분위기도 딱히 나지 않는다. 방에 누워 천장만 보고 있다. 천장 보고 있다 해서 특출한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요, 무슨 변화를 획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서 뭐하랴, 말만해서 뭐하랴, 무슨 상념이 있기는 하다면, 이 따위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나는 나의 타고난 게으름과 소심함이 내 인생을 망치고 있다고 쉴새 없이 자탄해왔지만, 그 자탄으로 치죄와 함께 죄과를 치러왔다. 그러니까, 나는 판관인 동시에 죄수가 됐고, 죄수가 됨과 동시에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던 것인데, 그 자유란 실상 거짓 자유, 내가 만들어낸 환각의 자유였던 것.

 세상에 쉬운 것 치고 그 이면을 의심하지 않을 만한 일 드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