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림동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모인 사람 중 반이 고시생. 한 사람은 내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동창 하나는 고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점점 술에 약해지는 것 같다. 아무도 무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 어쩌면 과단성 있게 결정해야 할 일들과 치러야 할 일들 앞에 남겨진 셈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도 같다. 취하는 건지도 모르게 술을 마셨다.

 좁은, 덕분에 정갈하고, 한편으로 여유로워 보이지는 않던 친구의 원룸. 그곳에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 나섰다. 잠이 덜 깬 채로 잘 가라, 인사하던 친구가 문득 나이 들어 보였다. 언덕배기를 내려와서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 밖을 보니 언덕 가득 원룸과 고시텔로 빼곡했다. 각각의 방향과 높이로 서 있던 건물들은 다른 듯했지만 비슷했고, 칙칙했다. 듣던대로 주변에 고시학원이 많았다. 미처 복개되지 못한 곳, 그 건물들을 가르던 커다란 도로 가운데에는 흐르기나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천이 하나 있었고, 그것에 뿌리를 내린 듯한 잡풀이 가득했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다시 마주친 서울. 철로 주변의 고층 건물들. 좁은 공터 하나 없이 임립한 집들. 나는 나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공사중인 철길이 완성되면 누군가  내 집 또한 그렇게 바라 볼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한강을 보며 내 굼뜬 열망도 조금씩 바깥으로 새어나오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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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보다 술에 더 빨리 취하는 탓인지, 그게 술에 취해 하게 된 이야기인지 멀쩡한 정신에서 내뱉은 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아침에 정신이 들어 누워있는 상태에서 지난밤 일을 하나씩 되짚어 보면 어제 한 말들이 말이 되는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후회인지 뭔지도 모를 감정들이 떠오른다. 모든 게 가뭇이 없어서 판단할 수도 없을 것 같고, 판단할 만한 일도 아닌 것 같다. 

 요즘들어 술을 자주 마시게 된다. 이러지 말자, 결심도 하지만 기어코 헛심이 되고만다. 술을 마시고 난 아침에는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생채기를 살펴보는 의아한 심정이 되고만다. 아프지는 않지만 괜한 흉터를 남길까 봐 공연히 마음이 쓰이는 그런 생채기말이다. 벽에 비친 뚜렷한 햇볕만이 위로가 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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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문학회 문집을 들췄다 새삼스럽게 대부분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책을 잔뜩 사놓고 막상 읽지는 않는 습성, 읽지 않은 책들을 잔뜩 쌓아둔 채 새 책들 사기에 바쁜 관성이라면 관성일 버릇. 그렇다고 해도 책과 문집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 읽지 않고 쌓아둔 문집이 마음에 걸렸다.

 작품들은 모두 화사했다. 몇 편은 이미 인터넷으로 읽었던 것들이었는데, 인쇄된 문자를 보니 더욱 풋풋하고 진지해 보였다. 나도 명색이 문학회에 적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내 것은 없었다. 말 그대로 명색인 탓이다. 서글펐다. 나는 왜 글을 쓰지 않았나. 대학생활이라면 문학회 활동 달랑 하나 남는 형편인데 그것마저 소홀했다. 작자로서도 독자로서도.

 다른 학교 문학회의 문집도 있었다. 우연찮게 찾아가 받아둔 것들이다. 이곳의 문집에는 날적이라고 흔히 불리는, 동방에 생각나는 대로 끼적이라고 놓아둔 노트의 글들이 따로 실려있다. 살가운 글들이다. 철없어 보이기도 하고, 서로에 대한 친근한 마음이 엿보인다. 내가 문학회의 날적이에 글을 남겨두는 일은 거의 없었다. 괜스레 어설퍼 보였고, 딱딱한 느낌만 남기는 것 같아 아예 쓰지 않거나 써놓고 찢어버렸다. 그러니 나의 흔적은 없다.

 나는 완전이 아니면 무가 되려는 것 같다. 완전은 이루기 힘든 것이고, 그래서 지금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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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가고 있다. 가끔 시간의 소리가 들린다. 몇 주 전 친구가 생일선물로 준 모래시계에서 나는 소리다. 검은 모래가 한 시간여 좁은 구멍을 타고 흘러 내린다. 그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아 유리 안을 찬찬히 바라보면, 눈에 잘 띄지 않아도 모래는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다. 다시 시간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실제로 모래는 멈추기도 한다. 나는 모래시계를 살짝 흔들어 본다. 여전할 때도 있고, 다시 흘러내리다 다시 멈추기도 한다. 신기한 것은 한번 그렇게 멈추고 모래가 잘 흘러내리지 않을 때 모래시계를 흔들어 모래를 다시 흘려보낸다 해도 이내 다시 멈추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그럴 땐 모래시계를 거꾸로 돌려놓는다. 모래는 다시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시간의 소리도 돌아온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내가 모래가 다했을 때를 유심히 살피고 다시 시계를 돌려놓는 일에 왜 그리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성을 약속하며 다시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일기마저 쓰지 않고 모래시계를 돌려 놓는 일에 심한 자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자책으로 채찍 삼아 나를 길들이는 수밖에는 나 자신을 위한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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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산문선 103
이옥 지음, 심경호 옮김 / 태학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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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음력 8월이면 이 글이 씌어지고 있는 10월 초순쯤 되겠다. 이옥이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음력 8월에 적었던 글월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이 선생은 말한다. ‘멋지기 떄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 거야.” 그는 그의 글에서 멋지다는 표현을 과하게 남발한다. 그에게 세상은 “멀리 조망하여도 멋지고,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멋지고”, 요컨대 “어디를 가든 멋지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 하여도 멋지지 않은 것이 없다.” 역자의 말대로 ‘멋지다’는 말은 하나의 주술처럼 독자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그 주술은 독자를 내밀하고 촘촘한 세계로 인도하지 않는다. 그 세계는 어딘지 조금 축이 난 세계다.

 이옥의 목소리에는 바람소리가 많이 섞여있다. “바람이 메말라 까실까실”해져 그 뼈대만 남은 것이 그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세상 천지의 물상이며 사람을 이야기할 때 멋지다, 멋지다, 끊이질 않고 이야기하고 있다. 반복에 반복이 되고 보니 리듬이 느껴지고, 까실까실한 대로나마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진다. 나는 까실까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살만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자니 이옥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삼가게 된다. 이옥의 삶이 그리 녹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랏일에 마땅히 쓰이지 못했다. ‘흰 봉선화’를 들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들의 심사를 살폈을 때, 그는 어쩌면 자신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옥의 까실까실한 목소리는 가을 벌레의 그것이었나 보다. “은둔을 달게 여기고, 팔리지 않기에, 그 자취가 춥고도 맑”은 가을 벌레는 이옥의 벗이 되어, 이옥 자신을 돌아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옥은 가을 벌레 소리가 던져주는 수심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는 유독 가을에 찾아와 자신의 근심을 돋우느냐고 따져 묻고, 그 모든 것의 원인처럼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말이 없고, 가을소리에 더해 벌레 소리만 더 시끄러울 뿐이었다. 그의 처지는 여전했고, 그는 그에 대한 하늘의 뜻이 원망스러웠던 것이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개구리 울음에도 감정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찮다 여겨지는 사물 하나하나에 마음을 주고 그의 벗으로 삼게 된 것이 그의 외로움과 처량함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말도 안 된다는 객의 핀잔에 그는 실없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우스개가 되어버린 그의 이야기가 처연함을 더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처지를 편벽되게 비관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산문은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일방의 의견을 내세우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의견을 두루 살필뿐더러 하나의 소재에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내세우기도 했다. 예컨대, 벼룩의 어리석음과 고마움을 동시에 새겼고, 시장의 활기참과 인심의 사나움을 함께 지적했다. 얼핏 보아 그가 여인의 정절에 감격하는 듯하지만, 다시 돌이켜 짐작해보면 꼭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송광사를 돌아보며 적은 글에서도 그의 절제된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나한상의 실감나는 묘사는 그것 스스로가 목적일 뿐,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와 잇닿아 있지 않다. 크게 보아 송광사는 큰 스님이 입적한, 백 년 묵은 두 그루의 나무가 서있는 곳일 따름인 것이다. 용모에 대한 관심은 또 어떤가. 그는 어떤 글에서 용모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지만, 곧 변호하기도 하는 것이고, 또 다른 글을 통해 거울을 핑계로 자신의 용모를 돌아보는 것이다.

 어쨌다는 것인가. 도무지 그의 의견을 뚜렷하게 얘기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요모조모 따져보는 그의 습벽이 그만의 힘이라고 여겨진다. 그것이 그의 매력이다. 나는 <시장>이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산문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 풍경은 이러하다. 귀양간 그가 시장 가까이에 사는데, 시장 가까운 쪽에 창을 내고, 거기에 구멍을 내어 바깥 시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때는 세모다. 사람들이 바쁘다. 그는 이런저런 사람들을 묘사하기에 바쁘다. 그리고 마지막에 쉬고 있는 한 사람을 이야기한다. “섶나무를 등에 지고 온 사람이 혁자 바깥에서 쉬고 있는데, 담장을 마주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때 그도 “역시 책상에 엇비슷이 기대고 누웠다.”고 그는 덧붙이고 있다. 글은 갑자기 고요해진다. “세모이기 때문에 시장이 더욱 활기에 넘친다”며 글은 끝이 나는 것인데, 시장 사람들과 동떨어져 창에 낸 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옥과 저잣거리의 쉬고 있는 사람이 자세를 같이하며 겹쳐지는 것이다. 이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세상과 거리를 둔 사람이었다. 그러나 개구리의 슬픔까지 읽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는 슬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슬픔에 깊게 침윤되지 않도록 애썼다. 그렇다면, 그는 세상이 살만 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세상의 살만 하지 못함을 부정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만큼이나 삶을 긍정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구멍을 통해 저잣거리 사람과 포개지는 이옥의 모습에서 나는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다는 이옥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때쯤, 그러니까 음력 ‘8월의 멋진 절기’에 헛헛하게 말했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이렇게 멋진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와보지도 않았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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