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의 두 저작과 <김병익 깊이읽기>를 일별했다. 이동하의 경우, 요전에 강유원이 자신의 서평집에서 그의 책 한권에 혹평을 해놓아 찾아 읽게 됐다. 자유주의자를 자칭하는 문학평론가 이동하는 크게 복거일과 조동일의 생각을 이어 받은 듯하다. 민중주의에 침윤된 정치사상과 문학을 혐오하는 그는 그것의 무류성과 억압과 전체주의적 성격을 지적한다. 쿤데라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주의적 명분을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이용하는 인물들이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래, 자본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톺아보는 그의 태도는 매우 신중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혜택을 입고 있는 여러 문화예술인들이 그들의 작품에서 대부분 자본주의 비판 일변도로 임하고 있는 현실은 그에게 지식인의 이중성을 엿보게 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일종의 도덕성을 담보해 주는 것이 될 때, 그 도덕성은 자신의 위치를 살피지 않은데서 기인하는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고 그는 주장한다. 자신이 발딛고 있는 현실에 대한 탐색은 그를 또한 국문학자이게 했다. 조동일은 그에게 서양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 있는 학문을 주체적으로 포용하려는 노력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스승이다. 한국 문학의 이론을 서양의 그것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이룩하려는 조동일의 기백은 낭만적 엑조티시즘에 일침을 가한다. 이동하는 조동일에게 잊혀진 제3세계 문학의 소중함을 배우고, 그로부터 제3세계에 속하는 한국이 그 세계를 합당한 이유없이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이동하가 전혜린과 피천득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당시 자신들이 딛고 있는 한국이라는 현실에 눈감은 채, 막연한 이국동경에만 치우쳤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이는 허영이자 허위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나 문학에 대한 비판이 민중주의 쪽으로 편향돼 있다는 사실은 지적해둘만하다. 일방적이며, 그 일방에 대한 무차별적 비판은 얄궂게도 다른 한 쪽을 옹호하게 되는 탓이다. 한쪽의 그름이 다른 한쪽의 옳음이 될 수는 없다. 이동하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점은 자못 치명적이다. 민중주의에 대한 반감이 그를 복거일 식의 자유주의로 이끌었지만, 복거일에 대한 비판적 이해는 책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또한, 조동일과 복거일을 동시에 추종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남는다. 영어공용화론을 시작한 자와 그에 대한 반론을 책 한권 분량으로 펴낸 자가 동시에 상찬의 대상이 될 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낭만적 민중주의에 대한 경사가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데 대한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그의 논지에 나는 동의하지만, 근본적 자유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 또한 그만큼 클 수 있음을, 이 명민한 문학평론가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김병익의 균형감각이 소중함을 새삼 알겠다. 그는 보수주의적 시각을 견지하지만 특유의 너른 품으로, 이견을 배척하지 않는다. 배척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의견을 성찰하는 데 좋은 연료로 사용한다. 그는 참으로 내성의 지식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