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
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
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
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 <그 여름의 끝>

 

꽃은 장난처럼 피었다가 장난처럼 진다.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붉은 절망이 마당을 피로 덮고, 나의 절망이 끝난 이유는 지겨웠던 여름이 끝이 났기 때문이다. 절망이 끝났기에 여름이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2003년 11월이 장난처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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