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마태우스님이 ID 에 대해 쓰신 글을 보고 나도 내 ID 에 대해 쓰고 싶어졌다.
 
알라딘에 들어오며 메일 계정을 만들 때에는 회사에 입사하기 전부터 고심을 했었다. 회사에 가면 새로운 이메일을 만들 텐데 뭐라고 할까? 그 전처럼 바보처럼 짓지는 말자. 그래서 난 내 이름도 연상되고 뜻도 좋고 이래저래 무난한 sunnyside 라는 ID 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나의 첫번째 ID 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언니의 부탁으로 언니의 친구가 인터넷을 깔아주러 우리집에 왔다. 아무 생각 없이 옆에서 작업하는 것을 지켜봤는데 넷츠고라는 서비스에 등록하며 ID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 ID... identity? 이렇게 중차대한 결정을 지금 내려야 한단 말이지? 옆에선 낯선 사람이 ID를 뭘로 할 거냐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기다리는데 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몇 분을 생각했지만, ID 를 정하는 일은 내게 너무나 어려웠다.
 
끝내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 난, 결국 난 컴퓨터 위에 있던 플라스틱 휴지걸이에 눈이 갔다. 곰돌이가 그려 있었고 'beani'라고 씌여 있었다. 그래서 내 ID 는 'beani'가 되었고 이미 'beani'가 등록된 곳에서는 'beaniii'가 되었다.
 
후에 내 ID 에 대해 한참을 생각했다. 난 결국 나 자신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단어를 찾지 못했고, 고작 휴지걸이에 쓰여진 글자로 내 ID로 정했다. 내가 싫어하는 나의 모습 - 소심함, 결단력 부족이 그대로 드러난 것 같아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 뒤 난 누군가에게 내 ID, 그리고 그에 담긴 내 이면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나에게 '너는 여성이다. 여성은 여러 곳의 성감대를 가지듯(남성이 한 군데에 집중된 데에 반해) 여러 개의 역할과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고로 제한적인 단어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ID가 너에게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뤼스 이리가레이라는 여성학자가 이에 대해 얘기한 바 있으니 참고해보라'고 말해주었고, 나중에 그의 논문을 출력해 주기까지 하였다.
 
난 감동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 소심함과 우유부단함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내 ID 는 멋드러진 여성학 이론과 어우러지며 여성 고유의 multiple identity의 표상이 되었고, 그 뒤로 난 내 ID 를 사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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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9-1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멋진 분을 곁에 두셨네요. 지성을 저렇게 적시에 제대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소중히 여기세요.^^
그리고, 서니사이드...밝고 귀여운 님에게 참 잘 어울린답니다.^^

sunnyside 2004-09-11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소중한 인연이었는데, 지금은 끊어졌답니다. 아쉽죠. ^^;
절 밝고 귀엽게 봐주시니, 제 ID 가 자기 몫을 다 하고 있는 것 같아 기특하네요. ^^

mannerist 2004-09-1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eople Call Me Lucid! => 줄여서 pcmlucid 쓰던 어느날 곰브리치 할배의 서양미술사 책을 뒤적이다 탄생한 아이디가 mannerist랍니다. 평생 흉내쟁이 이상은 못 될 매너 팔자랑 딱 맞아떨어지는게. 근데 sunnyside님 ID가 훨씬 더 멋져요. 뜻으로도 통하고 음운학(맞나?)적으로도 통하지 않습니까. 핫핫. 부럽사옵니다.

넋두리_솔직히 sunnyside 들을 때마다 계란후라이가 생각납니다. -_-;;;;;;;
자박 들어갑니다. 퍼퍼벅~ 아령들고 부들부들 떨고 계신 아리따운 손 편히 수이시길.
잘못했어요. ㅜㅡ

sunnyside 2004-09-1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사실 sunnyside 에는 계란 노른자 의미도 있어요. 난 계란 노른자를 좋아했는데, 언니는 안 먹었죠. 계란 하나를 삶으면 나는 노른자, 언니는 흰자를 먹곤 했어요. 뭔가 사물의 정수 같지 않습니까? 내 생물학 지식이 맞다면 닭이 되는 건 노른자, 흰자는 노른자가 닭이 되기 위해 필요한 영양분일 뿐이잖아요. (아님 말구요. ^^;)

mannerist 2004-09-12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빔밥의 친구 sunnyside up! 아니겠습니까. 밥먹기 싫어하는 얘들에게 간장과 더불어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구요. 오늘도 조카놈 둘이 놀러왔는데 그 맛난 보쌈(!)을 안먹기에 결국 매너가 계란후라이에 간장 해서 밥 비벼먹였다죠. -_-v

둘 다 영양분이고, 노른자와 흰 자 사이의 희멀건 끈이 귀여분 병아리가 되구, 고놈이 자라면서 단백질 덩어리인 흰자와 노른자를 먹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핫핫. ^^;;;

sunnyside 2004-09-12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여? 이거 아는 체 함 해볼라다가 스타일 구겼네요. 에구에구~ ^^;

sunnyside 2004-11-0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때 말한 뤼스 이리가레이의 논문에 바로 이런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여성은 하나도 둘도 아니다. 거칠게 말해, 그녀는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으로 동일시될 수 없다. 그녀는 모든 충분한 정의에도 저항한다. 더욱이, 그녀는 어떤 "적합한" 이름도 가지고 있지 않다.(CS: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