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이중생활하는 친구의 '약점을 잡아 위협'한 대가로 얻어낸 (-.-) 야외 오페라 <카르멘>을 보러 잠실주경기장에 갔다. 당초 비가 오락가락 하여 오후까지도 공연여부가 불투명했었는데, 어쨌든 공연은 강행되었고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았다.

공연은 정확히 저녁 8시에 시작하여 밤 12시가 다 되어 막이 내렸다. 매우 긴 시간 동안, 많은 출연자들이 등장한 대형 공연이었는데, 큰 문제 없이 무사히 진행되었다.

무대는 작년에 같은 장소에서 했던 오페라 <아이다>와 비교했을 때, 스펙타클한 맛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이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소재가 아니라, 궁핍한 시절의 도시, 집시의 소굴 같은 곳이 배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잡한 도시를 표현하기 위해 신경쓴 흔적은 역력하였다. 무대에 오른 인원이 매우 많았는데, 시대의 의상과 소품을 완벽하게 갖춘 배우들이 많을 때는 수 백 명씩 무대에 한꺼번에 있었다.

스크린도 훨씬 시원스레 펼쳐져 있어서 (주경기장의 3층을 모두 뒤덮었다) 마치 영화를 보듯 오페라를 즐길 수 있었다. 가지고 간 오페라 글라스를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인물의 동선과 각도를 섬세하게 포착해낸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도 또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다. 카르멘을 맡은 엘레나 자렘바는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와 역동적인 연기로 열정에 사로잡힌 집시 카르멘을 표현하였으며, 돈 호세 역을 맡은 호세 쿠라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연기와 노래 실력을 보여주었다.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그의 목소리는 과연 감탄을 자아낼만하였다.

팜플렛을 보니 남자 주인공 역의 호세 쿠라가 세계 4대 테너라 하였다. 의심 많은 나,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집에 와 '4대'와 '테너'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4대 테너라 불리는 사람은 호세 쿠라 말고도, 로베르토 알라냐, 안드레아 보첼리.. 두 명이 더 있다. 세계 3대 테너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4대 테너'를 만들어 넣고 싶은 사람은 끼워 넣는 것이다. 알고 보면 지구상에는 '4대 테너'라 불리는 사람이 한 스무명쯤 더 있는게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본다.

오페라 카르멘에는 귀에 익은 노래가 많이 나온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투우사의 노래>일 것이다. "랄라라 랄라 라라라라라~" 이렇게 되풀이 되는 노래, 캡슐에 싸인 유산균들이 장까지 행진할 때 나오는 그 멜로디 말이다. 이 음악이 오페라의 마지막까지 몇번이 흘러나오는데, 통통 튀는 유산균들이 자꾸 떠올라 혼났다.

카르멘은 아름다운 집시 여인과 위험한 사랑에 빠진 병사의 삶이 끝내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병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랑하게 된 집시 여인이 그 사랑을 배신하자, 결국 여인을 죽이고 만다.

"죽을만큼 위험해야 사랑이다" ? 이게 이번 오페라 공연에 쓰이는 메인 카피인데.. 글쎄... 난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이게 오페라니 망정이니 실제 일어난 일이었다면..? 사회면 구석을 차지하는 수많은 치정 살인사건의 딱 그 모습이다.

-- 스페인 OO시 경찰서는 어젯밤 시내의 한 투우장 근처에서 애인(카 모씨, OO세)을 칼로 끔찍하게 살해한 혐의로 전직 군인 돈 모씨를 체포하였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돈 씨는 변심한 애인과 말다툼 끝에 이러한 짓을 저질렀다고 자백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돈 씨는 "애인 때문에 직업도 고향도 모든 것을 버렸는데, 다름 남자 때문에 자신과 헤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사건의 70%는 남편이나 전 남편, 애인이나 전 애인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 즉 여성이 남성을 살해한 경우에는 단 10% 만이 이러한 애정 관계로 얽힌 적이 있는 비율이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포장된 비이성적인 집착의 결과다. 그렇지 않고서야 여인의 변심을 '죽음'으로 응징하는 어이 없는 사태는 벌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사랑이란 이름의 비극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 것이 옳겠다. 흠...

또 딴길로.. 그러나 저러나 위 정도의 감상을 남길 수 있었다는 게 용하다. 사실은 너~무 추워서 오페라에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구가 챙겨온 잠바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 늦은 시간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려니 말도 못하게 추웠다. 칼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뼛속이 시리고, 피곤하여 눈은 졸린데... '여기서 졸면 죽는거야~'라는 비장한 각오로 끝까지 눈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다. 다음 번에 또 가게 된다면 좀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다, 다짐하며...

우쨌든 오페라와 함께 한 봄날의 밤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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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inara 2004-05-16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니사이드 버젼의 카르멘 관람기..잘 보았습니다..ㅎㅎ..
치정 살인극이라니..저도 괜히 무섭네요..오페라의 유령 볼때는 좋았는데..가정경제가 힘들어서 문화 생활을 안하게 되는군요..아이다와 카르멘을 다 보셨다니 부러버요...

ceylontea 2004-05-16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카르멘 티켓을 신청 선착순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B석으로 2장 받았지요... 애당초 제가 가려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동생과 동생친구에게 보러 가라 했지요... 1막 끝나고 9시쯤.. 너무 추워 집으로 간다고 전화가 왔더군요... 기대했던 것 이하라고.. 추위에 감기 걸릴 각오하고 보기 힘들다 하더군요..
전.. 오페라던 뮤지컬이든.. 우리나라에서는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가 제일 좋더군요... 너무 넓으면 잘 보이지도 않잖아요...
세종문화회관은 좌석이 너무 안좋아서.. 비싼 돈 주고 보기 아까와요...
엘지아트센터는 작아서 나름대로 잘 보이기는 하나 규모에 비해 비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튼... 서니사이드님... 추운데... 고생하셨습니다 그려... ^^

sunnyside 2004-05-1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니나라님, 자식도 남편도 앤도 업는 제가, 돈 쓸 구석이 어디 있겠습니까? ㅎㅎ; 사실은 저도 주로 얻어볼 수 있는 것만 봅니다. 제 돈 주고 보기엔 마니 아깝지요..
실론티님, 저도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좋습니다. 맨 꼭대기층만 아닌면 볼만 하더군요. 잠실 같은 데서 하는 공연은 오페라를 보는게 아니라, 오페라 DVD 상영회를 보는 것 같기도 해요. 무대 위 인물들은 너무 작고, 스크린을 통해서만 보게 되니까요. ^^; 그래도 나름대로 잼있게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