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커플제국인들의 축제일이 지나갔다.
난 오늘 회사에 나가지 않는 토요일이니까, 다행히 회사로 꽃바구니가 배달되어오는 꼴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생각해보니 화이뜨데이에 꽃바구니가 배달된 적은 많지만, 발렌타인데이에 꽃바구니가 배달된 적은 없는 것 같다. 회사에 나갔으면 누군가 돌린 초콜릿을 얻어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결국 난 오늘 단 한점의 초콜릿도 먹지 못했다.
오후 두 시에 선배 언니 결혼식이 있어서 외출을 했다.
예식장이 용산이었기 땜에 내가 사는 이문동에서 '똥차'라 불리는 용산행 전철을 타면 갈아타지 않고 한번에 갈 수 있었다. 난 지하로 들어가지 않고 지상으로만 다니는 '똥차'가 좋다. 특히 오늘처럼 화창한 날씨엔 똥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감상할 수 있어서 더 좋다. 전철 안엔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특히 초콜릿 바구니를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에 나의 바깥 풍경 구경엔 어떠한 제약도 없었다.
결혼하는 신부의 입은 내내 귀에 걸려 있었다. 결혼식에 웃으면 딸 낳는다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는 간단히 무시했다. 언니가 언니를 닮은 이쁜 딸을 낳았음 좋겠다.
결혼하는 선배 언니가 '부녀회'의 멤버인지라 부녀회 9 명이 모두 참석했다.
그 중 이탈한 커플 제국인 3 명을 제외하고, 6 명이 남았다. 제 짝을 내팽개치고 부녀회에 합류해준 두 명의 커플 제국인에게 감사한다. 투항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인가? 짝들이 너그러운 것인가? 양다리를 걸치는 중이라, 딱히 한 사람을 만나기 껄끄러웠던 K 양, 이미 어제 발렌타인데이 의식을 치룬 L 양.. 당신들은 진정한 부녀회 동지다.
우리는 영화 보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근처 건물 지하의 아케이드에서 흑맥주 두 잔씩을 걸치니 오후 5시 반에 문을 닫아야 한다며 종업원이 나가라고 한다. (어처구니없다) 2차로 깔끔한 술집에서 양주 한 병을 시키고 추가로 생맥주를 마셨다.
오후 네 시부터 밤 열 두시까지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너무 많이 웃고 너무 많이 말 해서, 도저히 노래방에 갈 에너지를 남길 수 없었다.
그렇게 커플제국인들의 축제는 지나갔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그리고 즐겁게 지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