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80년, 봄날을 기억한다. 나는 나이 먹은 학생들 틈에 낀 청강생이었다. 육성회비도 내지 않고, 출석부에 이름도 없었지만, 매일매일 철길을 돌아 학교에 갔다. 내가 살던 고향은 당시 광주에서 한 시간 남짓 거리에 있었다. 어른들이야, 어떤 소문에 시달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절 봄볕은 그저 따사롭기만 했다.

철이 들면서, 그 해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렴풋하게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막내 동생을 업고 광주 근방을 헤맨 이야기를 했고, 막내 삼촌은 할아버지께 끌려왔다고도 했다. 대학에 와서 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광주 관련 학살자들의 공소시효는 만료되었다.

생각해 보면,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소설의 완성도나 그 사상의 깊이 때문이 아니라, 정서적인 공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다. 내가 감동한 것은 소설 이외의 글이나, 그의 말이었다. 월북이나 동인문학상 거부 같은 것들. 황석영이 동인문학상을 거부했을 무렵, 내 상황을 돌이켜보면 글쟁이들에 대한 의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90년대 이후 소설은 주방이나 pc방에 갇혀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각종 브랜드 이름 따위가 지겹게 나열된 소설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 두고 새로운 소설, 새로운 경향, 일상에의 발견이라도 떠들어댔지만, 소설 속 일상은 내 삶과 조금도 겹쳐지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지, 무얼 쓰는지 고민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만이 교실 안에 가득했다. 그 때 나에게 동인문학상을 거부하겠다는 황석영의 선언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여전히 소설은 주방과 골방에 갇혀 있다. 소설가들이 달리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뒤늦게야 <오래된 정원>을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80년 이후 내 시간들과, 서울의 시간들과, 이 나라의 시간들을 생각했다. 불과 20여 년. 내 기억의 줄을 잡아당기면, 어느 새 당겨 올라오는 시간들임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풍광은 생경했다. 소설 속 오현우가 18년 만에 출옥했을 때, 서울의 거리를 보고 이렇게 당황했을까. 긴박하게 전개되는 오현우의 도주 생활이, 미경이의 분신이, 그 젊은이들의 분노와 어른스러움이 나는 어색했다. 그 청춘들이 나라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고백할 때, 보다 정당하게 살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할 때도 그러했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우리는 아직 자라지 못했음을.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나라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그 청춘들보다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줄 몰라서가 아니라. 어느 한 순간도 제 시간을 온전히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순간도 내 앞을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겠다는 의지를 품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는 오현우와 한윤희의 사랑이, 감상적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내 그들의 정원이 부러웠다. 갈뫼라는 이름도, 그 뒤 어딘가에 있다는 저수지도, 그들이 함께 오른 나즈막한 야산도, 장작이 타들어가는 아궁이도, 흔들리는 촛불도, 을씨년스러운 화장실도 부럽기만 했다. 누군가의 의지를 품어주는 여자는 아름다웠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무시하지 않는 남자의 마음은 따뜻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꿈꾸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들을 보면서 알았다. 마음 밑바닥에 품고 있는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타인과의 관계는 조금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소설을 다 읽고, 일주일.

나는 남도 어디쯤에 있을 갈뫼라는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신대철 시인의 시에서 '바람부리'라는 말과 마주 했을 때처럼, 마음이 자꾸만 떠나라, 떠나라 한다. 먼 어딘가를 기억하지 말고, 그 곳 갈뫼를 찾아 말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코죠 2006-11-1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나 부디 너무 멀리 가진 마세요. 갈뫼만 보시고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요. 속노랑 고구마 쪄놓고.

선인장 2006-11-14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싶은 오즈마님... 늘 어딘가를 떠돌아도, 마음으로는 늘 님이 그리워요.. 잊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