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만경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은 로마의 신층 주택지에 세운 모던한 맨션의 한 방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흑벽영화지만 이미 아침이 밝았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아침까지 계속된 듯한 기나긴 이별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린 채, 남자와 여자는 방의 끝과 끝에 완전히 지쳐 앉아 있다.

"널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어." 남자가 말한다.

"그렇지만 난 행복하지 않았어." 모니카 비티가 대답한다.

"언제 사랑이 끝난 거야?"

"...... 정말, 모르겠어."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부탁이야, 이제 마음 쓰지 마."

"남자가 생긴 거니?"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런 게 이유가 아니라고."

"그럼, 무슨 이유지?"

"...... 모르겠어."

모니카가 방을 나간다. 이른 아침, 아직 아무도 걷지 않은 신흥 주택지의 잘 정비된 도로. 지나치게 말끔하게 정돈되어 오히려 살풍경한 길을 천천히 걸어간다.

휴일 오후, 학교는 한가하다. 도시의 무더위를 살짝 피해 찾아간 곳,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읽던 책을 내처 읽는다. 료스케와 료코의 뒷이야기가 내내 궁금해,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무언가 책장을 넘기는 손을 부여잡는다. 료스케가 머뭇거릴 때마다, 료코가 머뭇거릴 때마다, 나 역시 주저한다. 그들 감정의 결을 따라 도꾜만을 배회한다. 료코가 있는 오다이바와 료스케가 있는 시나가와 사이의 거리는 좁혀들 듯, 좁혀들 듯 좁혀지지 않아 나를 애타게 한다.

선명한 화상 자국만큼 선명한 사랑의 기억을 안고 사는 료스케. 한 때 진실이라, 영원이라 믿었던 사랑을 잃어버린 그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미팅 사이트에서 만난 료코에서 어떤 떨림을 감지했으면서도 몸에만 열중한다. 밤새 전화기를 붙잡고 보내지 못할 메시지를 지웠다 썼다 하면서도, 제 마음의 떨림 같은 거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료코에 대한 마음을 뜨거운 몸으로만 전할 뿐이다.

사랑 따위, 애초에 믿지도 않았던 여자 료코.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 때문에 자기의 본모습을 잃는 것이 어리석다고 믿는 그녀는 애초 사랑에 대해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숨기고 료스케를 만나고, 몸에만 집착한다. 스스로 몸만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질 정도로. 그래서 처음으로 사랑의 느낌을 경험하고도 약속 장소에 나가지 못한다. 료스케에 대한 마음을 이성적으로 재단하며 방어할 뿐이다.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던 여자 료코가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낀 날, 가슴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료스케는 진실한 사랑이란 없다고 말한다. 어긋나는 사랑의 순간. 그러나 둘 사이에 감정이 공유되었든, 그렇지 않든 사랑을 몰랐던 여자가 사랑을 알게 될 때 그녀 삶은 변한다. 사랑을 믿지 않았던 남자가 사랑 앞에서 머뭇거리는 순간, 그의 삶 역시 변한다. 그래서 료스케는 도쿄만을 헤엄쳐 그녀에게 다가가고 영원한 사랑을 묻는다. 료코가 처음으로 미오라는 본명으로 호명되는 순간, 그녀는 보이지도 않는 어딘가에서 도쿄만을 헤엄쳐 오는 그의 존재를 깨닫는다. 핸드폰과 문자 메시지와 메일과 몸으로만 소통하던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움직이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순간을 확인하고도 영화 "일식"의 마지막 장면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무엇 때문일까. 약혼자와 헤어진 모니카 비티는 알랭 드롱을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특별히 아름다울 것 없는 일상의 풍경을 새롭게 느끼게 하는 새로운 사랑. 그러나 내일도, 모레도, 다음 날도, 그 다음 날에도 만나자고 약속한 이들 연인은 그 날 밤 약속장소에서 만나지 못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약속 장소를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과 잠시 멈추었다 가는 버스...... 그 쓸쓸한 풍경이 가슴에 남아 나는 료코 아니 미오를 향해 다가오는 료스케의 몸 아닌 어떤 것을 마음으로 느끼면서도 못내 불안하다.

사랑이 언제 끝난 걸까,라는 남자의 물음.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채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언제 끝이 났는지 알지 못한채 사랑은 끝난다. 언제인지도 모르게 끝이 나고서야, 비로소 이게 사랑의 끝이구나 짐작할 뿐이다.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사랑의 시작과 끝을, 사랑의 이유를, 사랑의 목적을.

꿈에 보았던 세상 끝의 풍경이 눈 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 때 느꼈던 그 영원한 공포가 아직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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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5-06-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달기가 망설여집니다. 회복기환자의 퀭한 눈에 어린 그늘이랄까, 늦은 햇살이 시든 잔디에 비스듬히 비끼는 가을 오후같은 쓸쓸함. 그런 것이 어려 있어서 말걸기가 조심스러웠어요, 그런데도 비어있는 공간이 안쓰러워 잠시 공기를 흔들고 갑니다. 별 일 없으시지요...또 여름이 오겠군요.나처럼 나이를 먹어가는 나무도 해마다 새 꽃을 피우고 여름은 작년처럼 늠름하게 당도하겠지요.계절은 늙을 줄도 모르는군요.

선인장 2005-06-10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길을 뚫고 공항에 다녀왔어요. 한 달 동안 집에 와 있던 동생이 다시, 시카고로 날아갔지요. 오는 길은 차가 너무 막혀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다리가 아팠어요. 자꾸만 몸이 까라앉네요.
여전히 이 방 공기가 흔들리고 있어요. 님 덕분이에요. 오랫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