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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검 12 - 완결
김혜린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좋아…. 어쩌지도 못할…
사람, 사랑, 삶…. 계속 부르면 같아져 버리는저 몇마디 때문에-
이 빌어먹을 세상이 그래도 참 예뻐….
예쁜 것들은 왠지 눈물이 나고 눈물은 왠지 노래가 되지!
창도 꽃도 될 수 없었던 내 노래.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없었던 내 두 개의 사랑.
그러나 정말이야, 산마로. 가슴이 뜨거운 사내여-
나도 약속을 지키고 싶어.
정말… 지키고 싶어….
- <불의 검> 중 붉은 꽃 바리의 대사
고등학교 시절 나는 교과서보다 더 열심히 만화책을 읽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던 <댕기>와 <르네상스>를 교과서 밑에 숨겨두고 참 열심히도 읽었다. 참고서 따위 사물함에 넣어두고 다니면서도, 나는 그 무거운 만화책들을 가방에 넣고다니며 다음 책이 나올 때까지 읽고 또 읽곤 했다. 이따금 툭 터져버린 눈물 때문에 책을 빼앗기기도 했다. 한승원의 눈물 겨운 단편들, 먼 이국의 혁명과 간절한 사랑을 그린 황미나의 엘 세뇨르, 지루하기만 했던 국사책 대신 고구려사를 흥미롭게 그려낸 김진의 바람의 나라, 그리고 불의 검...
십몇 년 만에야 완간된 불의 검을 다시 읽다. 퇴색한 몇몇 유물들로만 기억되는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를 살았던 그네들의 인생에 금세 마음을 빼앗겨,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른다.
아라, 산마로, 소서노, 천궁과 바리... 이름도 고운 그네들은 하나 같이 문명 이전의 자연을 닮았다. 몸은 단단히 땅에 두고도 하늘을 바라볼 줄 아는 생을 온전히 살아간 그네들. 바람의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공기의 움직임으로 하늘의 뜻을 이해하고, 사람과 삶, 사랑이 서로 다른 말이 아님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깨닫는 그네들. 곧은 의지를 지녔지만 유연하고,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그 열망때문에 타인을 괴롭히지 않고, 제 삶의 내용에 대해 끊임 없이 고뇌하지만 그로 인해 어두워지지 않는 그들. 옛날 옛적에 살았던 아름다운 사람들...
어느 누구 하나 미운 이 없고, 어느 누구 하나 정이 가지 않는 이 없지만, 가장 안타까운 이는 바리. 산마로에 대한, 아라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며 피를 토해내던 바리. 그이의 애처로운 웃음과 서글픈 노래는 너무도 생생해서 책장을 넘겨도 지워지지가 않는다. 아무르족도 아니면서, 그저 아무르의 노래를 사랑해서, 아무르족을 위해 몸을 파는 바리. 지극하게 아라를 사랑하고, 지극하게 산마로를 사랑해서,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온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바리. 온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었던 바리, 바리...
이제, 다시 생각해 보면 이들의 삶은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삶. 소서노가 눈물을 통해 예감한 먼 미래, 하늘을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그저 당위적이기기만 한 삶. 그러니 불의 검은 아득한 옛날 옛적에 있었던 아름다운 이야기 한 토막, 꿈결에서야 들을 수 있는 바리의 애달픈 노래 한 자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