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트라팔마도어인들에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은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로키 산맥이어서,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한꺼번에 내려다볼 수 있고, 그들은 원하는 시간으로(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든 시간여행을 갈 수 있다. 지구인들이 말하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그들에게는 없다. 비록 우리에게는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생명은 지속되는 것이라서, 존재는 다시 자신이 살았던 어느 순간으로 지속적인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한가? SF 소설의 황당한 세계관쯤으로 보이는 이 소설은 참혹한 2차 세계대전의 와중인, 드레스덴을 풍경으로 펼쳐지고 있다. 군시설 하나 없는 평화로운 도시가, 중세의 건축미를 자랑하던 아름다운 도시가 지독한 폭격으로 초토화되어버린 비극의 상황. 13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의 인구가 순식간의 죽음의 구덩이로 떨어지고 만 그 비극의 현장, 드레스덴 말이다. 그 드레스덴의 비극 속에서 우연이 원해 살아남은 빌리 피그림의 시간여행.

빌리 필그림의 시간여행을 따라 가 만난 드레스덴은 어설픈 아이와 약간 모자란 늙은이와 광견병에라도 걸린 듯한 청년이 전쟁을 펼치는 암울한 현장이다. 그렇지만 그 현장은 전쟁의 참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잔혹한 묘사 하나 없이 펼쳐진다. 그저 빌리 필그림의 여행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저 그렇게 갈 뿐". 정작 드레스덴을 경험한 빌리는 역사의 참혹한 순간에 미래로 시간여행을 가 버리고, 자신이 죽는 그 순간에는 과거로 훌쩍 시간여행을 떠나버린다.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고, 그 죽음 이후에도 계속 되는 생의 비밀을 알기에, 트라팔마도어인들의 시간개념을 몸으로 숙지했기에 두려울 것이 없는 그의 생. 그저 영원히 계속 될 것이기에 비극과 희극도 아닌, 그저 그런 삶.  

시간의 영원성을 경험하는 트라팔마도어인들의 말에 의하면, 지구는 영원히 전쟁을 계속 하고, 또 역시 많은 사람들이 그 전쟁의 와중에 "그저 그렇게 간다"고 한다. 그 암울한 미래를 보는 순간, 이 소설, 참으로 지독한 반전소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스꽝스러운 검안사 빌리 필그림은 전쟁의 공포 한 마디 직접적으로 내뱉지 않지만, 그가 옮겨다니는 시간의 여정들을 따라다니다 보면, 어느새 지구 상에서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무수한 전쟁의 광경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빌리 필그림이 트랄파마도어 인들에게서 배운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즉 우리가 더러 죽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은 모두 영원히 산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썩 즐겁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 순간 저 순간을 방문하면서 영원을 보낼 거라면, 그 중에 아주 많은 순간들이 좋은 시간인 것을 나는 감사한다. 

나 역시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썩 즐겁지 않다.  그러나 내가 이 순간 저 순간을 방문하면서 영원을 보내야 한다면,  나 역시 그 순간들이 좋은 시간인 것을 감사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제부터라도 간절히 기원해야 할지 모른다.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를 허락하라고. 그리고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내가 순간 순간 시간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될 내 삶이 좋은 시간인 것에 감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 소설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 한 가지. 한 존재가 가능한 시간여행은 그 존재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일까?

- 소설 후반부에 한 사람이 예수의 죽음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정말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청진기를 몰래 숨기고 사람들 틈에 숨는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십자가에서 정말로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키는 1미터 61센티였다고.

- 왜 빌리 필그림은 자신이 살았던 시간 안에서만 여행을 계속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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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5-02-21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깍두기 2005-02-21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입니다. 추천하고, 당장 책을 사 보겠습니다.

2005-02-21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선인장 2005-02-2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 밤새 눈이 내렸네요. 아마도 올해 마지막 눈이겠죠?

깍두기님 > 취향이 저와 비슷하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어쩌죠?

따우님 > 음, 이 작가를 좋아하시는군요...

귓속말 주신 님 > 번역은 그냥 무리 없이 읽히는 거 같습니다. 저도 끝까지 읽지도 못한 책이 있기도 한데, 비교적 잘 읽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