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가장 정직한-착취를 통하지 않은- 방식은
어떤 한 영역에서 노하우를 축적하여 그 영역에서 전문가로 인정받아
자신의 노동력을 화폐와 교환하는 방법일 것이다.
소위 물려 받은 자본이 없을 경우
지식 자본이라 불리는 그것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정직한" 방식이
그나마 양식있는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부자가 될 수 있는
몇 안되는, 아니 어쩌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도의 양식을 가진
사람들이 처하게 되는 딜레마가 존재한다.
본인이 한 영역에 정통하게 된다는 것, 즉 그 영역에서 썩 괜찮은 기능인으로
자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대체의 경우 그 일, 그 영역이 자신에게 몹시 익숙한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언가 근사한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는 반복의 과정, 정교한 다듬기의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다듬기란 자기 영역을 일정한 수준에서 구획짓고-탈영토화가 아닌- 그 영역을 갈고 닦아
상품으로 만드는 과정, 즉 광내기를 의미한다.
즉 예술가가 아닌 기능인-부정적 의미에서의-이 되어야만
한 영역의 전문가로서 나름의 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능인들의 역할과 산물을 결코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팔리는 지식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아 영역의 반복을 전제로 하는 말끔한 상품 만들기가 필수적이란 이야기다.
시인은 결코 "진짜 시"를 써서는 부자가 될 수 없다.
말(언어)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같은 이야기를 수백번 반복하면서
자신의 레파토리를 갈고 닦은 성공학 강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질량 보존의 법칙 마냥 행복 보존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
시인은 가난하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반면
성공학 강사는 자신의 지경은 한뼘도 넓히지 못한 채
수백번 똑같이 떠들어온 자신의 반복된 이야기가 마모시킨 영혼의 상실분 만큼
돈 아닌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몇 시간 전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 버린 "분사구문 강의"를 했던
나 같은 학원강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니 세상에 공짜는 없고
우리는 각기 자신의 깜냥과 기호에 맞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뭐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