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학사
여인석 외 지음 / 의료정책연구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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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와 의사학 분야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으며 좀 많이 궁금했다. 의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의학의 생성과 변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의학공부의 근본이 되기도 할텐데, 도무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의학사는 눈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 이 책 역시 개설서로는 미키 사카에(三木榮)의《朝鮮醫學史及疾病史》와 김두종 선생의《한국의학사, 1966》가 나온지 거의 반세기만에 출판된 게 아닌가.

 

이런 사정은 서양의학사 연구 분야 역시 마찬가지여서, 90년대 이후에야 대학에 의사학 교실이 개설되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역사학쪽에서 의(醫)의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이젠 다루는 주제와 방법도 다양하여 이즈음의 논문들은 질병사, 제도사, 병원사, 우생학, 의학사상, 정신의학, 의철학, 식민지의학, 환경의학, 심지어 열대의학과 의료지리학 등 여러 주제에 관련되지만, 아무래도 연구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서구의 서양의학사의 역사(historiography)에서 보이는 연구방법, 연구 내용과 관점에 대한 논쟁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오랜 산고 끝에 나온 이 책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의학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의학사의 시대구분에 있어 한국사학계의 빈약한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에, 집필자들이 표명하는 만큼의 시대구분론에 입각한 설명을 서술 내용에서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생명의학을 지향했던 미키가 결론적으로 식민사관에 빠져들었다든가(김호, 2005),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김두종 선생이 문화사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의학사를 서술하려 했으나 단선론적 진보사관으로 일관했던(여인석, 1998) 두 경우를 비교해보더라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것들을 떠나, 언제쯤이면 우리 선조들이 사유했던 몸에 대한 고급한 담론의 역사를 읽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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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 동아시아의 사상은 가능한가? 아이아 총서 1
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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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년 역사교육과정에 ‘동아시아사’ 교과목이 신설되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로 나뉘어 서술됨으로써, 국사와 세계사로 양분된 역사교육 체계가 재편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동아시아사는 한편으로는 한국사와 중복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사의 일부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동아시아사의 위상과 정체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에 새로 마련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은 한국사란 무엇이며 한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원래부터 한국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한국인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역사이며, 한국사가 전근대에서는 주로 동아시아, 근대 이후에는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에 김기봉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고 사는 세계화시대에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역사공간을 나눠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며, 한국의 역사학 분류체계는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로 재편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한다.(한국 역사학의 재구성을 위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사, 2013)

 

일본 근대 역사학이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해서 동아시아세계를 망각하고 ‘유럽적’ 세계 개념을 전유하여 역사학의 3분과 체제를 정립했고, 그 체제가 한국의 역사학에 그대로 전수되어 오늘날에까지 3분과 사이의 소통과 융합을 막는 학문적 분류로 권력을 행사하여 왔던 바, 이제 탈냉전을 맞이하여 한국 역사학에서는 동아시아사의 귀환이 일어나고 있고 이를 계기로 역사인식의 개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한국발 동아시아담론의 한 축을 담당해온 백영서는 그간의 논의를 되돌아보는 글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한 문제 접근을 제시하면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과 동아시아론을 연결하여 그를 통해 지역주의적이면서도 세계사적 차원의 보편적 지향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초극론'을 다시 곱씹는다. 전쟁에 대한 불감증과 전쟁책임에 무관심한 당시 일본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다케우치가 찾아낸 길은 근대 일본에서 아시아적인 원리를 지향하는 '전통'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었으니, 곧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발상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일본이 근대화하는 동안 억압되었던 민중의 실천과 사상을 재통합하는 길, 곧 저항하는 주체의 형성이며, 그 모델은 이미 중국혁명에서 실례로 나타났던 바 있다. 이것이 오늘날 일원적 진보주의의 근대관을 벗어나게 하는 사상적 자원으로 다케우치가 검토되고 있는 이유다.

 

다케우치의 아시아론은 서양 근대성에 대한 반항이라는 이유에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풍요로운 원천으로 전화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케우치 사상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주체의 자기부정 혹은 저항으로서의 절망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지점들에 대한 통찰이기에 결국 '동아시아'의 유효성이 있다면 국민국가의 틀 속에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주체의 존재영역을 발견할 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영서의 '이중적 주변의 시각'은 다케우치의 그것과 변별점이 있다. 서구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기에.(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 근대극복 이중의 과제, 2008)

 

3. 쑨거는 루쉰을 통해 타케우치가 찾아낸 '자기부정' 을 다시 읽는다. 해서 그녀의 독법은 흥미롭다. 중국현대문학 비평가로서, 일본근대사상사 연구자로서 그녀가 걷고 있는 길은 '연대' 의 길이다. 학위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엔 특이하게도 서문이 세개나 된다. 중국판, 일본판, 한국판 서문이 한 곳에 실려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활동범위와 학문적 연대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윤여일이 쑨거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쓴 글들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사상이 살아가는 법 - 쑨거의 동아시아론>, <내재하는 중국-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중국연구란 무엇이었나>, <동아시아라는 물음> 등)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일본 현대사의 여러 국면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1930년대의 지나학자들과의 논쟁, 패전 국면에 대한 비판, 일본공산당의 근대주의적 성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1950년대 초의 국민문학논쟁, 안보투쟁 국면에서의 실천, 그리고 '근대의 초극'을 둘러싼 논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현대사의 매국면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논쟁적인 글들을 발표하고 직접적인 실천에 뛰어들면서 '역사에 진입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분명 이 책은 다케우치가 루쉰에게서 읽어낸 주체성의 존재방식에서 오늘에 유효한 '동아시아 사상'의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루쉰에게서 다케우치는 근대화 과정에서 동양이 세계사로 발을 내딛어 자신의 역사를 형성하는 계기를 본다. 그것은 저항을 통한 자기실현의 길, 곧 자기부정 속에서 주체는 부단히 갱신되는 유동성을 얻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동'의 의미이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루쉰에게서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았고 역으로 일본이 역사를 상실했음을 통감하고선 일본의 근대화를 '타락'이라 부르며 그 최전선에 선 아카데미즘의 지식인과 그들의 '합리주의 정신'을 비판한다.

 

4. 그러나 다케우치와 그를 다시 읽고 있는 쑨거에 대한 비판(함동주, 서광덕, 이정훈, 류준필, 고성빈, 백지운 등)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건 또 무얼 얘기하는 걸까.

 

아무래도 다케우치는 주체 형성의 계기로서만 아시아를 사고했기에, 그리고 아시아의 역사적 실체에 주목하지 않은 탓에 대안적 가치 또한 제시할 수 없었던 점이 여러 비판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에 이어, 오늘날 경제사에 기반을 두고 유럽 중심적 역사 해석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동아시아와 중국을 마주세워 세계사를 다시 쓰고 있는 일군의 지식인들, 즉 포머란츠와 웡 등 캘리포니아 학파의 연구성과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강진아,< 세계체계와 국민국가의 회색지대 - 동아시아론의 성과와 한계>,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 - 캘리포니아 학파에서 글로벌 헤게모니론까지>)

 

이제《다케우치 요시미 선집》까지 번역되었으니 좀 더 생산적인 논의들을 기대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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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김진호 지음 / 삼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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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젊은 스승을 만나 명상을 접한지도 그러구러 제법 되었다. 수행에 재미를 들여 탄력을 붙여나갈 당시 그이는 더러 믿음을 얘기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도무지 와 닿질 않았다. 이거 무슨 종교도 아니고 왠 믿음이냐. 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 의미와 내용을 궁금해 했다. 과연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그러다가 어느날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이가 제시하는 생명관, 인간관, 세계관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를 살아가면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고자 하는 게 당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 믿음 기꺼이 추구해 나가겠노라고.

 

2.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저 '믿음'에서부터 비롯될 터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부터도 종교에서 얘기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도 아니며,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와 열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 흔치도 않다.

 

그러나 불가의 대승기신론은 우리로 하여금 진여(眞如)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며, 이 믿음을 통해 나를 살리고 일체 생명을 살리는 길, 곧 대승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일진대 이러한 믿음이란 결국 타고 가야 할 거리가 아닌가.

 

나아가 특정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주체적인 것이 될때 그 믿음은 지신이 뿌리내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밝혀 알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 기독교 신학에 무지한 까닭에 신약학을 비롯한 연구사와 최근의 동향에 대한 글들을 살펴보고 기독교의 성립과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와 바울신학, 그리고 요한복음신학을 우선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론 서양 고전문명의 중세문명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소화되는지를 살필려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기독교 고유의 사유가 이성의 자족성 혹은 완전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갈라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문제는 바울을 만나면서부터다. 이 즈음에 마주한 게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이른바 '의인론'(義認論 discourse of Justification by faith, 혹은 칭의론)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이센(G.Theissen)은《기독교의 탄생》에서 바울이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가지고 유대교와 맞서는 독특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작에 샌더스(E. P. Sanders)가 1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고 말한 데서 촉발된 이래 이른바 바울신학의 '새 관점'은 결국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고,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닌 교회론적 주제였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고 있듯이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바울신학의 주제들은 바울의 종교적 배경, 그의 회심의 성격과 의미, 선교 초기와 말년,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복음과의 관계,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가 어떻게 그의 인간학 및 종말론과 관련되느냐 하는 문제들로, 불트만(R. Bultmann)이 포괄적으로 언급한 이래 여전히 논의 중인 것이다.

 

예컨대 칭의론에 대해서 톰 라이트(N. T. Wright)는 칭의론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러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속에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상황에서 바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바울신학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겠다.

 

5. 여기에서 무얼 도울려고나 하듯 오늘의 저 책을 대할 수 있었다. 저자 김진호는 민중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이가 아닌가.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울의 신학을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으로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임을 선언한다.  

 

저자는 무시간적이고 무현장적인 바울의 사상과 신학을 추상화하는 데 몰두해온 기존의 바울 해석 방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예수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신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바울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신학적 응답인 셈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은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다.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 현장임을 진작에 밝혀냈던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창락이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 이야기이다

 

한편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과 오늘날 난민과 유민·이민 현상을 파행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을 유비시키면서 바울을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 사건적 주체"(바디우) 또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아감벤)로 재발견한 점만큼은 높이 평가하되, 둘 다 바울의 언술과 실천이 갖는 '현장성'을 놓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의인론'을 서로 연계시키는 통합적인 해석을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대도시에서 바울이 벌인 싸움은 지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주변부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에서 민중신학이 고민하는 문제와 중첩되기 때문에 지구화 시대 주변부의 거대도시 서울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바울의 현장투쟁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릇 바르트가 텍스트에 대해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다."라고 하였듯이, 바울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컨텍스트에서 읽어 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6. 내 바울 읽기는 믿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복음과 더불어 바울서신은 신약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어나갈수록 바울에 대한 입장과 해석이 다양함에 놀랐다. 바울은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다.


김진호가 낯선 바울을 찾고 있다면, 김영석은 바울의 삼중신학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체계적이고 명쾌하다. 그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 혹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신자의 삶이며, 이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무엇보다 그의 바울 해석은 인간의 참여를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바울의 신학을 하나님-그리스도-믿는 자라는 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부터 살펴본다. 기존의 해석은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법정적 구원의 관점, 사회과학적 관점, ‘새 관점’, 묵시 신학적 접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법이 그것이다. 저자는 법정적 구원의 관점을 포함한 다섯 가지 독법 모두가 같은 약점, 즉 하나님, 그리스도, 믿는 자라는 세 주체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윤리가 신학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바울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바울 이후의 후기 서신들(2 바울서신과 목회 서신)에 담긴 신학과 바울 스스로의 신학이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해 낸다. 진정성 있는 일곱 바울서신 안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해석해내기 위해서이다. 이후 자신이 설정한 틀을 차례로 분석한 뒤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얘기하는 바울의 삼중 신학은 로마서 322절에 가장 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7. 이렇듯 믿음은 의로움으로 이어진다. 의로움은 하늘이 드러난 것이고.

 

ps.

믿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인데,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로 이 단어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을 뜻한다. 라틴어는 ‘fides’로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을 가리키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f에 행동이 더해진 개념이고,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켜가는 믿음을 뜻한다.(김영석, p183) 하여 궁극엔, ‘믿음은 실천이다라는 명제까지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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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 종교에 대한 후기근대적 접근
배국원 지음 / 동연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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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철학의 이해, 배국원, 동연, 2000

 

 

1. 종교학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하게 된 건 전적으로 장석만의 글들을 읽으면서부터였던 것같다. 그가 주도했던 종교문화연구소에서 펴낸 책들과 기관지《종교문화비평》에 실린 글들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했으니까. 뿐만아니라《인텔리겐챠(2002)》라든가,《한국 근대성 연구의 길을 묻다(2006)》와 같은 책에서 들려주는 생생하고도 진솔한 그의 목소리가 내게 묘한 울림을 가지고 와 닿았더랬다.

 

 

그의 학위논문의 주제는 한국에서 종교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의 개념사 연구에서 종교 개념에 관한 연구가 지니는 의미를 종교 개념은 인간의 사고 및 행위 분야에서 기본적인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동아시아의 근대적 인식체계에서 종교는 세속세계의 전체와 서로 대응되는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어 종교 영역에 대한 검토는 세속 영역을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데에서 찾고 있다. 한국에서 비판적 종교학의 포문을 연 그는 이후 한국사회의 역사적 과제와 맥을 잇는 종교학의 과제를 모색하는 방향에서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찾고 있는 듯하다. 오늘 이 책의 존재를 알게된 것도 그가 참여한 어느 대담에서였다.

 

 

2. 저자는 신학자이다. 하지만 호교론으로서의 신학을 뛰어넘어 인문학으로서의 종교학과 종교철학을 얘기하고 있기에 나는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종교를 이해하는 기존 방법에 대한 질적 변화를 주도하는 종교철학과 여러 종교들의 자료에 대한 양적 변화를 주도하는 종교학의 변화로 인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신학, 특히 신학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저자는 종교학을 '종교적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으로, 인간에 대한 종교적 이해를 강조하는 현대종교학을 새로운 인간학, 새로운 해석학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종교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라고 정의되는 종교철학은 '궁극적 관심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라는 포괄성으로 인해 학문적 정체성의 모호함이 지적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여 저자는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종교철학적 반응들이라 할 수 있는 개혁주의 인식론, 반기초주의, 해체주의, 종교다원주의 등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종교철학의 정체성을 가늠한다.

 

 

3. 이 책에서 유별나게 내 관심을 끈 것은 '반기초주의'가 종교철학에 던진 의미와 이른바 '개혁주의 인식론'의 기수인 플란팅가(Alvin Plantinga)의 '신념의 기본성' 문제이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믿음 내지는 신념의 문제'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미 종교철학의 주요 관심사항의 하나인 종교적 신념의 정당성 문제가 이제는 근대철학적 사고에서 비롯된 인식의 개인적 기초가 아니라 그 사회적 기초, 곧 공동체의 인식론적 기능이 중요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전자의 의미이다. 즉 종교적 신념의 경우 예전처럼 신념의 검증 가능성과 근거 여부를 따지기보다 그것의 문화적 맥락, 공동체적 중요성, 사회적 효용성등이 더욱 문제시되고 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믿음은 늘 삶에 대한 태도에 있어 결단을 요구한다. 내 경우 무엇에 대한 믿음인지, 무엇을 위한 믿음인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식론에서 늘 언급되는 종교철학자로서의 플란팅가는 신에 대한 믿음을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으로 파악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은 객관적, 합리적 신념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증거주의와 기초주의라는 두 원인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명하거나 감각적으로 확실하다'라는 기본적 사실의 기준은 '누구에게 확실하거나 자명하다는 의미에서'라고 수정되어야 한다며, 객관적 규범으로서의 기본성 기준의 상대화는 기초주의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우리가 흔히 구분하는 '안다'는 것과 '믿는다'라는 것의 문제를 들고나온다. 성경에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공존하는 두 인식 형태라는 것이다. 구약은 인간의 믿음이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며, 신약에서도 역시 믿음과 지식은 분리되지 않고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에서 믿음과 지식의 결합은 특별히 '기독론적'인데,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음을 아는 앎과 믿는 믿음은 똑같이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새삼스레 신학자임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여기에 응답하듯 플란팅가는 철학에서 이성은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능력으로 이해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에서 파악된 이성은 반대로 타율적이고 교조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불완전하며 교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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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가 사랑한 책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고운기 지음 / 현암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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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매력적인 책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저자의 관심은 유별나다. 이 책에서 보듯이 객원교수로 일본에 건너가서까지 삼국유사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어서 하는 소리다. 저자가 여말 선초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사의 간행과 유통의 현장을 찾아나서는 과정은 르포를 읽어나가듯 흥미롭다. 그래서 술술 읽힌다


현재 삼국유사 초판본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두 몇 차례 인쇄됐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다. 확인된 판본 중 가장 멀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조선 초기이고 마지막은 조선 중종 7(1512)에 경주 부윤이던 이계복이 경상감사 안당의 도움을 받아 찍은 것이다. 그 이후로는 다시 간행된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1904년 일본 도쿄제국대학이 문과대학 사지(史誌)총서의 하나로 삼국유사를 현대식 활자로 찍어냈다. 한국에선 최남선이 1927'계명에 삼국유사를 실었다. 이는 도쿄제국대학이 간행한 것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묻혀 있던 삼국유사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것은 일본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적한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비록 전쟁에선 패하지만 상당한 양의 우리 문화재를 약탈해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중 이계복이 1512년에 찍은 삼국유사가 포함됐고, 일본 에도막부의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상납됐다. 도쿠가와는 상당한 애서가여서 장서각을 만들어 귀중한 책들을 보관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책들은 아들들에게 물려졌다. 역시 책을 소중하게 여긴 아들 요시나오(義直)가 삼국유사를 비롯한 중요한 책들을 물려받았다. 폐번치현(廢藩置縣)을 불러온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막을 내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쿠가와 가문의 장서는 잘 보존돼 이후 나고야 시립 호사문고(蓬左文庫)의 모태가 됐다. 그런데 19세기말~ 20세기초 일본에 근대역사학을 도입하려던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 구사카 히로시(日下寬) 같은 학자들에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었고 활자본으로 간행된다.


물경 5만 점이 넘는다는 도쿠가와 가문의 그 많은 책 중 어떻게 삼국유사가 눈에 띄게 됐을까. 1624년 도쿠가와 가문이던 오와리 번(尾張藩)에서 천황에게 32종의 책을 빌려줬다 돌려받는다. 천황이 봤던 책이라면 특별한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당연히 책의 목록'禁中', 京都에 있던 천황의 처소에 빌려준 서적의 목록이 따로 만들어졌다. 이 목록에 삼국유사가 올라 있었다. 저자는 도쿄제국대학 국사학과 학생들이 읽을 원전을 찾던 학자들 눈에 이 목록이 대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삼국유사의 현대판 간행이 조선 침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화 작업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다.


문제는 늘 간단하지 않다.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1894년 최초로 삼국유사를 인용하여 '단군고(檀君考)'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저들의 동양사학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타자로서 아시아라는 존재를 상정하여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해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역사학을 비롯한 우리 인문학이 일제의 지배하에 성립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과제가 총체적인 역사적 의미의 담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사실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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