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환 선생의 글 <히브리적 사유의 특성과 의미>를 읽다가 사이드가 극찬한 바 있는 키스 w. 휘틀럼의《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을 다시 만났다. 이젠 그동안 밀쳐 놓았던 홉스봄과 이성시 선생의 책들, 그리고 저 휘틀럼을 읽을 때가 된 듯하다. 가을이잖는가. 아래는 간단한 메모이다.

 

 

1.만들어진 전통, 에릭 홉스봄, 박지향 장문석 역, 휴머니스트, 2004

 

홉스봄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새로운 국경일, 의례, 영웅이나 상징물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지는 등 '전통의 창조'가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문제는 그런 발명된 전통들이 역사와 동떨어져 있으며 정치적 의도에 의해 조작되고 통제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특히 이 시기 유럽에서 전통의 창조가 '현재'의 필요를 위해 과거의 이미지를 만들어낸 예들을 추적하며,  만들어진 전통이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정치인들에 의해 국민국가의 권위와 특권을 부추기기 위해 사용되었음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 책은 집단적 기념행위가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신화와 의례가 사람들로 하여금 만들어진 '공식 기억'을 믿도록 하는 데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다.

 

 ‘만들어진’ 전통의 유형은 대체로 3가지로 파악한다. 첫째는 공동체들의 사회통합이나 소속감을 구축하거나 상징화하는 것들이고 둘째는 제도, 지위, 권위 관계를 구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들이며, 셋째는 그 주요 목표가 사회화나 신념, 가치체계, 행위 규범을 주입하는 데 있는 것들이다. 전통을 발명하는 과정에서 열등자들 사이에 복종심을 주입하는 방법보다는 엘리트들의 집단적 우월감을 고취하는 방법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즉 특정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서로 간에 동등하다고 느끼게끔 한 것이다. 이는 독일식의 군국주의적/관료주의적 형태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영국처럼 사립학교들의 탈군사화 된 ‘법 없이도 살 신사’의 모델일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엘리트들을 전 부르주아적 지배 집단이나 권위에 동화시킴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2. 만들어진 고대, 이성시, 박경희 옮김, 삼인, 2001

 

고대의 역사란 근대 국민국가들이 만들어낸 투영물이며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고대사가 모두 만들어진 전통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 이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중심- 주변에서 주변적 존재로 간주되었던 대상을 중심에 두는 동아시아 세계론으로 저자가 해체하려는 것이 국가라면 탈근대를 위해 넘어서야 할 것은 국가를 기초로 하는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일국 내의 중앙-지방 간의 은폐된 불평등 구조이기도 하기에 여기에 요구되는 것은 지방이라는 관점이다.

 

*함께 읽어야 할 글

이성시, <일본 역사학계의 동아시아세계론에 대한 재검토 - 한국학계와의 대화로부터 >, 역사학보 216, 2012

 

3.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키스 w. 휘틀럼, 김문호 역, 이산, 2003 

 

3.1 고대 이스라엘이란 유럽 문화의 '현재적 관심사'에 의해 발명되었다는 주장. 곧 그리스 사유 및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 각인된 그리스도교의 영향에 의해서는 물론, 그에 따른 성경에 대한 편향된 관심이 결국 고대 이스라엘과 히브리적 사유를 발명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이러한 주장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과 함께 학문과 권력, 포스트모더니즘적 철학, 현대의 해체주의와 연관된 해석학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제공한다.

 

- 사이드(Edward W. Said)는 오리엔탈리즘의 발전에 있어서도 서양의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문화와 제국주의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결국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비서구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대위법적 독해'(contrapuntal reading)이다. 위의 책, p18

 

- 역사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은 인간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으로 이루어진 유럽문명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가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유럽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하여 국민국가를 고대 안으로 역투사했으며, 동시에 시온주의 운동을 탄생시켰다. 시온주의 운동은 이질적인 오리엔트에 '문명화된' 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문화와 문명의 연속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과거에는 팔레스타인은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인은 없었는데,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인은 있으나 팔레스타인은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아이러니가 생겨났다. p 93

 

- 따라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나 성서적 시간에 포섭되어서는 안되고 '세계사' 나 '세계시간'에 포섭되어서도 안된다. 팔레스타인은 자기의 고유한 역사의 핵심부분이며 모든 세계사의 한 부분을 형성하는 자기만의 리듬과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의 미세환경, 즉 우리가 팔레스타인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특성을 구성하는 다양성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p106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이다.

 

3.2 김진호는 이 책에 대한 논평에서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연구사를 다음과 같이 개관하고 있다.(첨부파일 참조)

 

최근의 연구사적 논의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학은 크게 네 단계의 전개 과정으로 설명된다.1920년대 이후의 알트(A. Alt) 학파와 1950년대 이후의 올브라이트(W.F. Albright) 학파는 이 분야의 고전적가설을 대표한다. 흔히 ‘이주가설’과 ‘정복가설’이라고 각각 불리는 이 주장들은, 서로 대립각을 높이 세웠지만, 팔레스타인 ‘외부’에서 들어온 종족적 집단이 사회적 조직에서나 문명 수준에서나 원주민을 압도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관점을 견지한다. 차이가 있다면 서서히 이주해 들어온 것이냐 갑자기 대대적인 정복을 통해 들어온 것이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대부분의 신학자들이나 신학생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지식은 바로 이러한 고전 가설의 기반한 일련의 논의들이다.

 

한편 1970년대 중반 이후 고전 가설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가 제시되었다. 흔히 ‘혁명가설’이라고 불리는 이 논의는, 노먼 갓월드(N.K. Gottwald)의 거의 천 쪽에 달하는 대작이 그 중심에 있다. 실은 그 훨씬 이전(1962년)에 올브라이트의 제자인 조지 멘덴홀(G.E. Mendenhall)이 발표한 논문에서 혁명가설이 최초로 제기되었지만, 거의 주목받지 못하다가 갓월드에 의해 연구사적 전환점으로 거론되면서 새삼 중요한 저술로 평가되었다. 이후 멘덴홀이 갓월드의 가설이 사회적 혁명을 강조하는 데 반해 자신은 문화적 혁명이라고, 양자의 차이를 부각시키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혁명가설’의 가장 주된 공통점이자 연구사적 공헌은 고대 이스라엘은 외부인이 아니라 바로 팔레스타인의 내부의 기층대중에서 유래했다는 관점을 확고하게 했다는 데 있다. 또한 이들의 연구가 중요한 것은 비교인류학과의 학제간 연구의 성과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는 데 있다.


한국에서 갓월드의 기념비적 저작은 민중신학적 지향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읽혀지기 시작했고, 적어도 일각에서는 한때 열렬한 탐독의 대상이었으며, 그의 학문적 명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오늘날에는 적지 아니 회자되고 인용되는 주요 저작에 속한다. 하지만 방대한 학제간 연구의 소산으로 제기된 이 책의 풍부한 이론적 함의들은 거의 제대로 독해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더욱이 목회 현장에서는 이 책의 이론적 함의는 고사하고 문제의식의 일부라도 거의 참조되기조차 않는 상태에 있다.


마지막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연구들이 쏟아졌는데, 이 논의들은 ‘제2의 수정주의’적 연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고전가설들과 혁명가설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식론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연구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내부에서 출현한 것이라는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갓월드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혁명가설을 따르지 않는다. 이주가설이나 정복가설, 혁명가설이 공유하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잘 조직된’ 결속체는 왕국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심지어 최근의 추세는 왕국 출현기인 기원전 10세기보다 훨씬 후대에야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사회문화적 결속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도 이데올로기적이고 사회적인 통합의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하면서 말이다. 이것은 다른 팔레스타인 족속들과 이스라엘이 ‘잘 구별된’ 사회적 실체였다는 전제가 고대 이스라엘 역사학에서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에서도 최근 이들의 저작이나 논문이 조금씩 번역 출간되고 있어 약간의 인지도가 생기기도 했지만, 성서학자들조차 대부분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거의 알지 못한 형편이다.


이상에서 약술한 연구사적 궤적은 한국의 신학계에선 여전히 먼, 낯선 현상이다. 말한 것처럼 고전가설들이 대부분의 논의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성서 역사학에 대한 저급한 관심은 수정주의적 논의를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여건을 조성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성서를 대하는 태도에 있다. 수정주의적 견해들은 고전가설에 비해 성서를 훨씬 비판적으로 대면하고 있다.


교회나 교회의 신학은 통상 ‘성서가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는 관점’을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근대 이후 성서학은 이러한 관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어느 정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진 것처럼 행세해왔지만, 그러한 균형은 성서 역사학이 교회의 성서 이해의 경계를 월장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실행되는 균형이었을 뿐이다. 뒤에서 좀더 얘기하겠지만 휘틀램은 이 책을 통해서 교회주의적 전제가 얼마나 성서 이해의 암초가 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이때 교회주의적 전제는, 휘틀럼이 보기에는, 교회와 서구 중심주의, 이스라엘 민족주의의 교묘한 절충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수정주의적 견해들이 성서를 더욱 ‘비판적’으로 보려한다는 것은 성서가 역사적 ‘사실 자체 혹은 기준점’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하나의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다른 이해’도 있었다는 당연한 인식을 연구에서 참조하겠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다른 이해’의 주체들에 관한 선입견 없는 조사 및 연구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 연구에서 이와 같이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인식을 수정주의적 태도라고 할 만큼 호들갑을 떠는 것은 성서 역사학이 돌파해야 하는 교회주의적 전제라는 벽이 그만큼 두텁다는 것을 의미한다.

 

휘틀럼은 이 최근의 제2의 수정주의적 견해를 대표하는 연구자의 하나다. 그런데 이 책의 서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의 저술은 고대 이스라엘사에 관한 ‘대안적’인 역사를 저술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기획된 것이다. 실은 고대 이스라엘사라기보다는 ‘고대 팔레스타인 역사’를 그는 쓰려 했다. ‘대안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함축한다. 그는 이 대안적인 역사 저술 작업에서 심각한 장벽을 경험했다. 그것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연구사 자체가 동시대를 함께 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왜곡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휘틀럼이 평가하기에는 이러한 편견과 왜곡은 최근의 수정주의적 연구들도 그다지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 편견과 왜곡으로 점철된 연구사적 과오를 통렬하게 문제제기하는 이 책을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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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과 불교 불교입문총서 20
권오민 지음 / 민족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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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이롭다. 모니터를 줄창 들여다 보다가 눈이 침침해져 마당으로 나서니 사위에 풀벌레소리 가득한데 뒷산 수풀 작은 불빛들이 명멸한다. 늦반딧불이다. 큰아이와 애반딧불이 구경하러 절길을 오르던게 어제인 듯 한데.

 

긴 가뭄으로 애를 태웠더랬는데 장마가 시작되더니 그치는 기색도 없이 어느새 가을이다. 아직도 땅이 질퍽해 가을 무 배추 파종이 늦어지고 있건만, 이는 바람엔 청량함이 깃들어 서늘하기까지 하다.

 

2. 이것도 집착인가, 빗속에 시작된 책읽기가 여지껏 계속되고 있다. 불교평론에 실린 글들을 읽다가 한국불교학에 대해 일말의 거리낌 없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어느 패기만만한 수상소감에 꽂히고 말았다. 경상대 철학과 권오민 교수의 글이었다. 그의 글 삼십여편을 갈무리하여 통독하고 나니 조금이나마 아비달마불교의 중요성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다. 예전에도 수시로 필요성은 느꼈지만, 중관과 유식을 붙잡기에 앞서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도 뒤늦게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불교사와 사상사 및 경전성립사에 어두운 채 그때 그때 찾아 읽는 급한 독서가 불러온 폐해라고나 할까.

 

이어 근대불교학에 대한 몇몇 책들과 불교학회40주년 기념 특집《 불교학연구》68호에 실린 분야별 불교학 연구동향을 일별하고 나니 비로소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 다소 감이 잡힌다. 만시지탄이다. 시간이 되면 스칼러쉽이 뛰어난 매력적인 학자들의 저서를 집중적으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3.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심재관, 책세상, 2001​

불교와 불교학, 조성택, 돌베개, 2012

현대불교학 연구사, J.W. 드 용, 강종원 편역,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4

불교경전은 어떻게 전해졌을까, 심재관 외, 불광출판사, 2010

역경학 개론, 고영섭 외, 운주사, 2011

중국불경의 탄생, 이종철, 창비, 2008

인도불교사1. 2, 에띠엔 라모뜨, 호진 옮김, 시공사, 2006

중국불교사, 鎌田茂雄, 정순일 옮김, 경서원, 1996

중국불교, 계환, 민족사, 2014

일본불교사 근대, 카시와하라 유센, 원영상 윤기엽 조승미 옮김, 동국대출판부, 2008

근대일본과 불교, 스에키 후미히코, 이태용 권서용 옮김, 그린비, 2009 

인도철학과 불교, 권오민, 민족사, 2004

불교철학의 역사, D. J. 칼루파하나, 김종욱 옮김, 운주사, 2008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D. J. 칼루파하나, 나성 옮김, 한길사, 2011

 

​중관과 유식을 붙잡으며 틈틈이 읽은 책들이다. 늦기 전에 간단한 소감이라도 적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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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학사
여인석 외 지음 / 의료정책연구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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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와 의사학 분야에 대한 글들을 찾아 읽으며 좀 많이 궁금했다. 의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의학의 생성과 변천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성찰이 의학공부의 근본이 되기도 할텐데, 도무지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의학사는 눈씻고 찾아봐도 잘 보이질 않는다는 사실이. 이 책 역시 개설서로는 미키 사카에(三木榮)의《朝鮮醫學史及疾病史》와 김두종 선생의《한국의학사, 1966》가 나온지 거의 반세기만에 출판된 게 아닌가.

 

이런 사정은 서양의학사 연구 분야 역시 마찬가지여서, 90년대 이후에야 대학에 의사학 교실이 개설되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역사학쪽에서 의(醫)의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이젠 다루는 주제와 방법도 다양하여 이즈음의 논문들은 질병사, 제도사, 병원사, 우생학, 의학사상, 정신의학, 의철학, 식민지의학, 환경의학, 심지어 열대의학과 의료지리학 등 여러 주제에 관련되지만, 아무래도 연구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는 서구의 서양의학사의 역사(historiography)에서 보이는 연구방법, 연구 내용과 관점에 대한 논쟁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튼 오랜 산고 끝에 나온 이 책은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의학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의학사의 시대구분에 있어 한국사학계의 빈약한 연구결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기에, 집필자들이 표명하는 만큼의 시대구분론에 입각한 설명을 서술 내용에서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 부분은 생명의학을 지향했던 미키가 결론적으로 식민사관에 빠져들었다든가(김호, 2005), 이를 극복하고자 했던 김두종 선생이 문화사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의학사를 서술하려 했으나 단선론적 진보사관으로 일관했던(여인석, 1998) 두 경우를 비교해보더라도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 것들을 떠나, 언제쯤이면 우리 선조들이 사유했던 몸에 대한 고급한 담론의 역사를 읽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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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 동아시아의 사상은 가능한가? 아이아 총서 1
쑨거 지음, 윤여일 옮김 / 그린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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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7년 역사교육과정에 ‘동아시아사’ 교과목이 신설되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가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로 나뉘어 서술됨으로써, 국사와 세계사로 양분된 역사교육 체계가 재편성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동아시아사는 한편으로는 한국사와 중복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사의 일부를 이룬다. 그렇기 때문에 일차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동아시아사의 위상과 정체성이다.

 

이와 관련하여 2012년에 새로 마련된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 교육과정 적용을 위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은 한국사란 무엇이며 한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인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원래부터 한국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한국인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해온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 역사이며, 한국사가 전근대에서는 주로 동아시아, 근대 이후에는 세계와의 연관성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인다.”

 

이에 김기봉은,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고 사는 세계화시대에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로 역사공간을 나눠서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며, 한국의 역사학 분류체계는 한국사, 동아시아사, 세계사로 재편성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언한다.(한국 역사학의 재구성을 위한 방법으로서 동아시아사, 2013)

 

일본 근대 역사학이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해서 동아시아세계를 망각하고 ‘유럽적’ 세계 개념을 전유하여 역사학의 3분과 체제를 정립했고, 그 체제가 한국의 역사학에 그대로 전수되어 오늘날에까지 3분과 사이의 소통과 융합을 막는 학문적 분류로 권력을 행사하여 왔던 바, 이제 탈냉전을 맞이하여 한국 역사학에서는 동아시아사의 귀환이 일어나고 있고 이를 계기로 역사인식의 개편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2. 한편 한국발 동아시아담론의 한 축을 담당해온 백영서는 그간의 논의를 되돌아보는 글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통합한 문제 접근을 제시하면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론'과 동아시아론을 연결하여 그를 통해 지역주의적이면서도 세계사적 차원의 보편적 지향을 견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초극론'을 다시 곱씹는다. 전쟁에 대한 불감증과 전쟁책임에 무관심한 당시 일본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다케우치가 찾아낸 길은 근대 일본에서 아시아적인 원리를 지향하는 '전통'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었으니, 곧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는 발상이 그것이다. 그 내용은 일본이 근대화하는 동안 억압되었던 민중의 실천과 사상을 재통합하는 길, 곧 저항하는 주체의 형성이며, 그 모델은 이미 중국혁명에서 실례로 나타났던 바 있다. 이것이 오늘날 일원적 진보주의의 근대관을 벗어나게 하는 사상적 자원으로 다케우치가 검토되고 있는 이유다.

 

다케우치의 아시아론은 서양 근대성에 대한 반항이라는 이유에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풍요로운 원천으로 전화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케우치 사상이 빛을 발하는 대목은 주체의 자기부정 혹은 저항으로서의 절망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지점들에 대한 통찰이기에 결국 '동아시아'의 유효성이 있다면 국민국가의 틀 속에 포획되지 않는 새로운 주체의 존재영역을 발견할 때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백영서의 '이중적 주변의 시각'은 다케우치의 그것과 변별점이 있다. 서구중심의 세계사 전개에서 비주체화의 길을 강요당한 동아시아라는 주변의 눈과 동아시아 내부의 위계질서에서 억눌린 주변의 눈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기에.(동아시아론과 근대적응 근대극복 이중의 과제, 2008)

 

3. 쑨거는 루쉰을 통해 타케우치가 찾아낸 '자기부정' 을 다시 읽는다. 해서 그녀의 독법은 흥미롭다. 중국현대문학 비평가로서, 일본근대사상사 연구자로서 그녀가 걷고 있는 길은 '연대' 의 길이다. 학위논문을 발전시킨 이 책《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엔 특이하게도 서문이 세개나 된다. 중국판, 일본판, 한국판 서문이 한 곳에 실려있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활동범위와 학문적 연대를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윤여일이 쑨거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쓴 글들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읽을거리다. <사상이 살아가는 법 - 쑨거의 동아시아론>, <내재하는 중국-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중국연구란 무엇이었나>, <동아시아라는 물음> 등)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일본의 근대에 대한 비판을 일본 현대사의 여러 국면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1930년대의 지나학자들과의 논쟁, 패전 국면에 대한 비판, 일본공산당의 근대주의적 성격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1950년대 초의 국민문학논쟁, 안보투쟁 국면에서의 실천, 그리고 '근대의 초극'을 둘러싼 논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현대사의 매국면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논쟁적인 글들을 발표하고 직접적인 실천에 뛰어들면서 '역사에 진입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분명 이 책은 다케우치가 루쉰에게서 읽어낸 주체성의 존재방식에서 오늘에 유효한 '동아시아 사상'의 가능성을 찾고자하는 야심찬 기획이다. 루쉰에게서 다케우치는 근대화 과정에서 동양이 세계사로 발을 내딛어 자신의 역사를 형성하는 계기를 본다. 그것은 저항을 통한 자기실현의 길, 곧 자기부정 속에서 주체는 부단히 갱신되는 유동성을 얻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동'의 의미이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루쉰에게서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았고 역으로 일본이 역사를 상실했음을 통감하고선 일본의 근대화를 '타락'이라 부르며 그 최전선에 선 아카데미즘의 지식인과 그들의 '합리주의 정신'을 비판한다.

 

4. 그러나 다케우치와 그를 다시 읽고 있는 쑨거에 대한 비판(함동주, 서광덕, 이정훈, 류준필, 고성빈, 백지운 등) 역시 만만치 않다는 건 또 무얼 얘기하는 걸까.

 

아무래도 다케우치는 주체 형성의 계기로서만 아시아를 사고했기에, 그리고 아시아의 역사적 실체에 주목하지 않은 탓에 대안적 가치 또한 제시할 수 없었던 점이 여러 비판자들에 의해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에 이어, 오늘날 경제사에 기반을 두고 유럽 중심적 역사 해석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동아시아와 중국을 마주세워 세계사를 다시 쓰고 있는 일군의 지식인들, 즉 포머란츠와 웡 등 캘리포니아 학파의 연구성과가 상대적으로 부각되고 있다.(강진아,< 세계체계와 국민국가의 회색지대 - 동아시아론의 성과와 한계>, <중국의 부상과 세계사의 재조명 - 캘리포니아 학파에서 글로벌 헤게모니론까지>)

 

이제《다케우치 요시미 선집》까지 번역되었으니 좀 더 생산적인 논의들을 기대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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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부팅 바울 - 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김진호 지음 / 삼인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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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젊은 스승을 만나 명상을 접한지도 그러구러 제법 되었다. 수행에 재미를 들여 탄력을 붙여나갈 당시 그이는 더러 믿음을 얘기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도무지 와 닿질 않았다. 이거 무슨 종교도 아니고 왠 믿음이냐. 난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그 의미와 내용을 궁금해 했다. 과연 무엇에 대한 믿음이며, 무엇을 위한 믿음인가.

 

그러다가 어느날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그이가 제시하는 생명관, 인간관, 세계관을 온전히 내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바를 살아가면서 실천하고 구현해 나가고자 하는 게 당신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시작한다면 그 믿음 기꺼이 추구해 나가겠노라고.

 

2.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대부분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저 '믿음'에서부터 비롯될 터이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부터도 종교에서 얘기하는 믿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 것도 아니며, 절대자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와 열정에 대한 논의는 그리 흔치도 않다.

 

그러나 불가의 대승기신론은 우리로 하여금 진여(眞如)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 씌여진 책이며, 이 믿음을 통해 나를 살리고 일체 생명을 살리는 길, 곧 대승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일진대 이러한 믿음이란 결국 타고 가야 할 거리가 아닌가.

 

나아가 특정 대상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주체적인 것이 될때 그 믿음은 지신이 뿌리내린 자신의 근거를 스스로 밝혀 알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3. 기독교 신학에 무지한 까닭에 신약학을 비롯한 연구사와 최근의 동향에 대한 글들을 살펴보고 기독교의 성립과 관련하여 역사적 예수와 바울신학, 그리고 요한복음신학을 우선 좀 들여다보고 싶었다.

 

물론 서양 고전문명의 중세문명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소화되는지를 살필려면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기독교 고유의 사유가 이성의 자족성 혹은 완전 가능성이라는 고전적 이상으로부터 갈라서는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4. 문제는 바울을 만나면서부터다. 이 즈음에 마주한 게 바울신학의 핵심이라는 이른바 '의인론'(義認論 discourse of Justification by faith, 혹은 칭의론)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이센(G.Theissen)은《기독교의 탄생》에서 바울이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가지고 유대교와 맞서는 독특한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작에 샌더스(E. P. Sanders)가 1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다”고 말한 데서 촉발된 이래 이른바 바울신학의 '새 관점'은 결국 1세기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있지 않았고, 바울의 이신칭의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닌 교회론적 주제였다는 두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고 있듯이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바울신학의 주제들은 바울의 종교적 배경, 그의 회심의 성격과 의미, 선교 초기와 말년, 예수의 설교와 바울의 복음과의 관계, 바울의 믿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가 어떻게 그의 인간학 및 종말론과 관련되느냐 하는 문제들로, 불트만(R. Bultmann)이 포괄적으로 언급한 이래 여전히 논의 중인 것이다.

 

예컨대 칭의론에 대해서 톰 라이트(N. T. Wright)는 칭의론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고 말한다. 바울신학의 핵심은 그러한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속에서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가느냐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하여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상황에서 바울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바울신학은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이겠다.

 

5. 여기에서 무얼 도울려고나 하듯 오늘의 저 책을 대할 수 있었다. 저자 김진호는 민중신학의 맥을 잇고 있는 이가 아닌가.

 

바울은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회당에서 의인론을 편다. 사람이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라며, 그 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이스라엘인뿐 아니라 헬라인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차별 없이 의롭다고 인정해준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 모두를 은혜의 공간으로 호출하는 선언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바울의 신학을 권력 없고 소외받던 이들을 재주체화하는 신학담론으로 권리 없는 자들을 위한 신학, 즉 ‘인권으로서의 신학’임을 선언한다.  

 

저자는 무시간적이고 무현장적인 바울의 사상과 신학을 추상화하는 데 몰두해온 기존의 바울 해석 방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적 예수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고 배척되는 이들과 함께 하고자 했던 그의 신앙적 실천의 관점에서 바울연구를 이어나가고 있다. 민중신학적 응답인 셈이다.

 

그 실마리가 된 것은 김창락의 바울 재해석이다. 김창락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기득권자들인 유대인들에 대해 비기득권자들인 이방인을 옹호하려는 것이 바울의 투쟁 현장임을 진작에 밝혀냈던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창락이 입증하는 데 실패한 현장의 사회사적 맥락을 밝힌다. 바울의 현장은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가 아니라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이며, 그 안에서 비기득권자인 이방인은 주로 개종해 들어온 해방노예들임을 주장한다. 이들은 고대적 세계화가 한창 진행되던 1세기 지중해 지역의 독특한 사회사적 상황에서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민이 된 자들이다. 도시의 지배층과 시민층, 그리고 서민들은 이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 심지어는 증오를 쏟아냈다. 이스라엘 교포 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그곳에서 순혈주의적이고 배제주의적인 근본주의적 이스라엘 종파인 유대주의가 거세게 물결쳤다. 바울은 그런 현장 한 가운데서 이들을 옹호하고, 이들에 대한 배제의 논리를 공박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연구사에서 다뤄지지 않은 ‘낯선 바울’ 이야기이다

 

한편 저자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의 현상과 오늘날 난민과 유민·이민 현상을 파행적으로 양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의 유럽을 유비시키면서 바울을 "보편적 개별성을 추구한 사건적 주체"(바디우) 또는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아감벤)로 재발견한 점만큼은 높이 평가하되, 둘 다 바울의 언술과 실천이 갖는 '현장성'을 놓치고 있는 점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면서, 바울의 '종말론'과 '의인론'을 서로 연계시키는 통합적인 해석을 지향한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대도시에서 바울이 벌인 싸움은 지구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주변부의 메트로폴리탄인 서울에서 민중신학이 고민하는 문제와 중첩되기 때문에 지구화 시대 주변부의 거대도시 서울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바울의 현장투쟁을 오늘 우리 시대 우리의 공간으로 컨텍스트화(contextualization)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릇 바르트가 텍스트에 대해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 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다."라고 하였듯이, 바울이라는 텍스트를 어떤 컨텍스트에서 읽어 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6. 내 바울 읽기는 믿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복음과 더불어 바울서신은 신약을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읽어나갈수록 바울에 대한 입장과 해석이 다양함에 놀랐다. 바울은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다.


김진호가 낯선 바울을 찾고 있다면, 김영석은 바울의 삼중신학을 얘기한다. 한마디로 체계적이고 명쾌하다. 그에 의하면 바울신학의 핵심은 하나님의 의() 혹은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사는 신자의 삶이며, 이 세 가지가 함께 작용하는 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다. 무엇보다 그의 바울 해석은 인간의 참여를 강조하는데 방점이 찍힌다.


이처럼 바울의 신학을 하나님-그리스도-믿는 자라는 틀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먼저 바울이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부터 살펴본다. 기존의 해석은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법정적 구원의 관점, 사회과학적 관점, ‘새 관점’, 묵시 신학적 접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법이 그것이다. 저자는 법정적 구원의 관점을 포함한 다섯 가지 독법 모두가 같은 약점, 즉 하나님, 그리스도, 믿는 자라는 세 주체의 역동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바로 윤리가 신학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바울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가 된다는 이야기다.


그는 바울 이후의 후기 서신들(2 바울서신과 목회 서신)에 담긴 신학과 바울 스스로의 신학이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해 낸다. 진정성 있는 일곱 바울서신 안에서 발견되는 바울의 신학을 제대로 해석해내기 위해서이다. 이후 자신이 설정한 틀을 차례로 분석한 뒤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가 얘기하는 바울의 삼중 신학은 로마서 322절에 가장 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인데, 모든 믿는 사람에게 미칩니다.”

 

7. 이렇듯 믿음은 의로움으로 이어진다. 의로움은 하늘이 드러난 것이고.

 

ps.

믿음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emunah’인데, 신실, 충성, 한결같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신약성서에 사용된 믿음에 대한 그리스어는 ‘pistis’로 이 단어 역시 신실함, 충성, 헌신을 뜻한다. 라틴어는 ‘fides’로 기본적인 뜻은 신뢰, 보호, 의존이다. 믿음을 가리키는 이런 단어들은 어떤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믿는 인식론적 동의를 뜻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믿음faith은 그러한 인식론적인 믿음belif에 행동이 더해진 개념이고, 한 번 그렇다고 생각하는 데 그치는 믿음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켜가는 믿음을 뜻한다.(김영석, p183) 하여 궁극엔, ‘믿음은 실천이다라는 명제까지 도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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